내가 수능 막 끝나고 한참 여자친구랑 티알하고 놀 때니까. 대략 7년 전 이야기임.

난 마스터링 하면서 플레이어가 정 붙이는 NPC들을 무참하게 썰어 죽이는 재미에 한참 푹 빠져있었음.


이번 캠페인은 여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친구들을 데리고 1렙부터 진행하는 디앤디 3.5 플레이였음.

플레이어들이 두 세션쯤 하고 여전히 감을 잘 못잡는 것 같아서...

파티의 부족한 부분도 보완하고, PC들이 게임하는 요령도 터득하게 하려고 GMPC를 하나 넣어서 게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듬.


그래서 파티는 NPC 위저드 캐릭터를 우연히 던전에서 만나서 동료로 삼게 됨.

본래는 좀 관록있는 모험가를 연기하려고 했는데 전원 여자였던 플레이어들의 바램때문에, 어쩌다보니 그 NPC 위저드는 미소년 쇼타가 되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중무장한 마셜 여자 캐릭터(팔라딘, 파이터, 레인저, 클레릭)들과 소년 위저드는 어느새 8레벨 즈음에 접어들었음.


이제 슬슬 PC들도 NPC에 정을 붙였겠다. 어느정도 게임에 숙달되었겠다. 해서 GMPC를 죽일 때가 왔음.

막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세션에서, 여자친구가 자기 엘프 레인저 캐릭터가 위저드 캐릭터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고백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캠프파이어 씬을 하나 요청했음.

그래서 그 씬 끝나고, 다음 전투에서 8레벨 PC들은 해당 캠페인의 최종보스이자, NPC 위저드의 원수였던 15레벨 소서러와 마주침.


NPC 위저드는 호기롭게 "너의 주문 목록은 다 파악하고 있다"면서 플레이어들과 함께 꽤나 선전했지만.

(디앤디의 소서러는 알고 있는 주문이 적어서 파악하면 공략이 가능함)

전력차가 어마어마하게 났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전멸 직전까지 몰림. NPC 위저드는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고 PC들을 던전에서 탈출시키면서 '비록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내 몫까지 더 살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 디스인티그레이트로 시체까지 갈아서 먼지로 만들어버림.


이 장면 끝나고 여자친구가 너무 서럽게 우는 걸 보고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음.

원래 플레이어들이 NPC에 정을 들이면 자주 죽이고 그 다음에는 언데드로 내보내거나 하면서 자주 괴롭히는 편이었는데

이번 캐릭터는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내 자캐처럼 여기기도 했었고, 자기 PC가 이제 막 사랑 고백도 한데다가

스스로도 최애캐라고 생각해서 애정을 많이 쏟았다고 함.

그동안 도움 받은것도 많았는데, 아무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기도 했고.

뭐 그래서 날 원망하지는 않는데, 너무 슬프다고 했음.


아직 그때는 내가 심성이 여리고 착할 때라서 그런지. 여자친구가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나도 마음이 좀 짠해짐.

그래서 클레릭 7레벨 스펠 중에서 Resurrection을 쓰면, 신체의 일부만 있어도 부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음.

여자친구의 레인저 캐릭터는 그 위저드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활줄을 가지고 있었거든

(당시에 엘프는 연인의 머리카락으로 활줄을 만든다는 설정이 있었음)


하지만, 해당 세계관이 굉장한 로우 파워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PC들은 7레벨 주문을 써 줄 수 있는 NPC를 찾지 못했음.

그래서 8레벨 캐릭터였던 PC들은 해당 주문을 얻기 위한 모험을 떠남.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PC들은 결국 7레벨 주문인 레저럭션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음.

그 과정에서 최종보스였던 15레벨 소서러가 다시 덤벼왔지만 손쉽게 갈아버렸음.


10000gp와 성수. 그리고 10분동안의 영창 끝에. 그의 머리카락을 매개 삼아 위저드는 다시 소생하는데에 성공했음.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이미 13~14레벨이었고, 위저드 NPC는 8레벨이라서 함께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음.

게다가 게임상으로는 이미 몇 년이 흐른 뒤라서 PC들이란 나이 차도 꽤 나게 되었고. 엘프였던 내 여자친구는 이미 수백살 차이나서 상관없었지만..

NPC 위저드는 PC들의 변한 모습에 좀 놀라워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소생시켜준 사실에 고마움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의 원수였던 소서러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딱히 이 세상에 목표랄 게 더 이상 없어서 PC들과 앞으로도 함께 모험할 것을 약속했음. 


그리고 몇 달 뒤 대망의 캠페인 엔딩.

각각 캐릭터 에필로그를 내가 만들어서 납득할만한 엔딩들을 만들어줬음.

클레릭은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같은 힘을 지닌 인물로, 성녀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팔라딘은 신의 챔피언이 되어서 이후로도 많은 서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파이터는 ...뭘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뭐 어디 가서 밭이나 갈았겠지....


이제 여자친구였던 레인저 차례였는데. 마음 속에 생각해두었던 에필로그는 그녀와 위저드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려주는 엔딩이었음.

수백년을 살아가는 엘프와 인간의 수명 차이 때문에 도저히 그들의 미래에 대해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

근데 여자친구가 괜찮다며 수십년 뒤에 위저드의 임종 장면을 지키는 장면을 에필로그로 짜달라고 했음.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어. 봄이 가고, 봄이 가고, 또 다시 봄이 지났어. 엘프였던 당신의 외모는 여전히 한 결 같았지만...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자 소년의 황금빛 머리칼은 하얗게 빛을 발했고. 그의 복숭아빛 뺨에도 어느새 깊은 주름이 지게 되었지.

어느날, 소년은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그 미소를 당신에게 지으며. '또 다시 혼자 남겨두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

그리고는 마치 그때처럼 볼을 밝히며 겸연쩍게 웃더니 '그때처럼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요. 내 사랑'이라고 덧붙였고.

그리고는 당신의 변함 없는 외모를 바라보며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그러나 다 꺼져가는 촛불 같은 불안한 모습으로. 그의 긴 생애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지."


그러자 여자친구가 화답했어. "괜찮아요.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요. 게다가 지금은 그때처럼 기약 없는 이별도 아닌걸요." 


그녀는 그의 손을 꽉 붙잡으며 담담하게 그 이별을 받아들였고. 노인이 된 소년은 마지못해 미안하다는 기색을 거두고는 그 숨을 거두었지.

그리고 가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또 다시 가을이 왔어. 낙엽들이 그 만연하던 어느 계절에. 그녀는 마침내 긴 긴 기다림을 끝냈고. 

마치 떨어지는 낙엽처럼, 또 다시 다가올 봄에 대한 기대를 품고, 수백년간 고대해 왔던 그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어.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미안,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라며

볼을 붉히고는 소녀에게 사과했어. 

그리고. 소녀는 그 영원같은 기다림 끝에 안식을 얻었을까? 아마도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거야.


라면서 에필로그를 냈고. 거의 즉석에서 생각해 낸 엔딩 치고는 코끝이 짠했던 것 같아. 

같이 플레이 했던 사람들도 다들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고 말해줬고. 사실 나도 마지막 몇 마디를 할 때는 말을 고르는 동안 감정이 북받쳤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 경험 이후로 나는 NPC들을 함부로 죽이는 걸 그만두게 되었고,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스터의 길을 걷게 되었지.


아참, 그리고 난 그 여자친구랑 대판 싸우고 반 년 뒤에 헤어졌지. 다 쓰고보니 마지막이 제일 슬픈 이야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