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옛날에 돌렸던 썰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냥 비교적 최근에 돌렸던 디앤디 이야기나 할까 함.

꽤나 긴 이야기니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라고는 못하겠고, 여튼 재미있게 읽어줫으면 좋겠음.


나는 마스터링을 할 때 PC들이 성공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품게 되었을 때, 갑자기 절망을 선사해주는 것에서 많은 재미를 느끼는 편인데,

인간의 감정이란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 그자체이기 때문에

스토리 도중 계속해서 PC들에게 공포와 절망을 심어주면 오히려 감정이 죽어버리고,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지만

PC들이 주어진 목표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놓치게 되어버리면

그 희망이 일순간 사라지고 절망으로 바뀌어가면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감, 무력감 같은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거든.


뭐 어쩌다 보니 말이 좀 길어졌는데.

때는 2014년 4월쯤 되었을거임. 나는 당시 뉴비였던 플레이어 네 명을 데리고 내 고유 세계관으로 디앤디 3.5 캠페인을 하고 있었음.

PC들 중 몇 명은 용병 낙오병이었고, 나머지 몇 명은 오크들한테 포로로 잡혀서 북부로 이송되다가 용병 PC들이 구조해주면서 알게 된 사이였음.


그 PC들이 5~6레벨쯤 되었을 때 그들은 '블랙 마쉬'라고 불리는 거대한 늪지대로 향하던 도중, 고블린 산적들에게 털린 곡식 마차를 발견하게 되었고.

온통 엎어진 곡식통들 사이에서 블랙마쉬의 영주 앞으로 보내져 있던 왕국군의 비밀 암호문 비스무리하게 생긴 편지를 발견했음. 


몇 번 해독을 해보려고 했지만 관련 기술을 찍은 캐릭터가 아무도 없었던 관계로, PC들은 그 편지를 영주에게 그냥 넘겨주기로 결의했음.

전쟁 영웅 출신에다, 왕국 내에서도 급진파 주전론자로 알려졌던 블랙마쉬의 영주는 꽤나 깐깐한 인물이었고 PC들이 왜 이런 편지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 의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걸 가져온 PC들한테 고마움을 표했고, 마침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줄 사람들이 조금 필요하던 차였는데 잘 되었다며 PC들에게 임무를 하나 내려줌.


최근 영지 외곽에 있는 소규모 촌락들에서 마을 사람들이 잇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좀 조사를 해 보라는 거였음.

PC들은 영지 내를 떠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정보를 모으고, 그 과정에서 오크나 놀, 고블린 같은 사악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이 어째서인지 서로 연합해서 왕국의 촌락들을 습격하고 있으며, 이들의 배후에 왕국을 음해하려는 사악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됨.


PC들의 조사에 따르면 실종된 마을 사람들은 악마 소환의 의식을 위한 제물로 사용되려던 것 같았고, 일부는 언데드로 되살아났는데. 되살아난 언데드들은 늪지대에 사는 다른 휴머노이드 종족이었던 리자드맨들의 영토를 습격하고 있었음.

이 늪지의 리자드맨 부족들은 인간들과 딱히 직접적인 교류는 하지 않지만, 몇 년 전에 어떤 대마법사의 중재로 인해 인간들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일반인들은 잘 몰랐지만, 왕국을 습격하는 다른 몬스터들을 오히려 적대하며 그들과 싸워오고 있었음.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되살아난 인간 시체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얄짤 없었고, 그 덕분에 리자드맨의 영역 주위에는 부패한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가득했음.



이 때문에 PC들은 리자드맨들을 잠시 의심하고 적대할 뻔 했으나, 마침 파티의 마법사가 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오해를 풀고 리자드맨들의 도움을 받아 놈들의 근거지를 일망타진하고, 사로잡혔던 마을 사람들을 구해올 수 있었음.


영주가 맡긴 일을 모두 끝마친 일행들은 영주에게 보고를 위해 성으로 돌아가던 중, 잘 무장한 인간 군대가 성에서 나와 어디론가 출병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성문 앞 경비대장에게 자세한 사실을 듣고는 졸도할 뻔 했음. 영지의 순찰대가 리자드맨들의 영토에서 영지민으로 추정되는 심하게 부패한 인간 시신들을 발견했고, 그 근처에서 리자드맨들의 무기가 발견되었으며.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주는 '감히 자신의 영민들을 건드린' 악독한 리자드맨놈들을 징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낸거였음.


일행들은 인간들과 리자드맨 사이의 내전을 막기 위해 영주의 집무실까지 열심히 내달렸어.

그리고는 명령권자였던 영주에게 당장 토벌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쳥해야했지. PC들이 열심히 RP로 '그 리자드맨들이 우리랑 우호 관계이며 이것은 크나큰 오해'라며 열심히 설득한 끝에 영주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전령관(Herald)을 불러 자신의 명령을 급히 중지하고 영지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림.


그러자 전령관은 비릿하게 웃더니, 영주의 가슴을 검으로 깊게 찔러버림.

알고 보니 그 녀석은 배신자 스파이였고 PC들 때문에 일이 틀어지게 되자. 영주를 살해해서 그 명령을 철회하지 못하게 한거지.


영주는 대단한 애국자이자,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에 왕국의 적이 보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리자드맨과 왕국군을 내전 상황에 빠트린 다음.

그 혼란을 틈타 그를 제거하는 것을 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PC들이 가지고 왔던 왕국군의 암호문..으로 보이는 편지를 눈 앞에서 흔들며 조소했어.


그건 왕국군의 암호문 같은게 아니었어. 조건이 맞으면 악마들을 소환하기 위해 사악한 주문이 빼곡히 쓰여져 있는 일종의 트리거였지.

그리고 PC들에게 "그간 잘 해 주었다며, 자신의 성공은 다름 아닌 너희들 덕분"이라고 치하한 다음 성 내에 악마를 소환해 버려.

영지 내의 전투 병력들은 모두 토벌대로 나가서 거의 공백 상태나 마찬가지였던데다가, PC들이 무사히 악마들을 무찔러 버린다고 해도 편지를 가져온 건 그들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 운이 나쁘면 이단심문관들에게 악마 소환의 조력 혐의로 잡혀갈 수도 있고.


방금 전까지, 영주에게 이 일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왕국과 리자드맨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던 PC들은 모조리 전의를 상실해버려.

이 전투를 이긴다고 해서 자기들이 얻는 것도 없고,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고.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들은 영웅.

배신자와의 싸움에서 결국 그들은 승리하게 되었음.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지, 사악한 술식으로 유황불길속에서 소환된 악마들이 재가 날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시민들을 죽이고 있었고, PC들만의 힘으로는 그것을 막아내기에 너무나도 힘겨운 상황인데다. 영지를 떠난 토벌군은 지금쯤 리자드맨들과 교전을 시작해서 피를 피로 씻는 원한관계에 들어서게 되었겠지.  


이 사실에 오열하고 있던 PC들 앞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영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불행중 다행으로 영주는 겉옷 안쪽에 갑옷을 받춰 입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검이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었고,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거지.


이것만 가지고는 절망적인 상황이 타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PC들은 다시 마음을 고쳐잡고 영주와 함께 최후의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해.

그리고 각자 무기를 움켜쥐고 악마들을 향해 돌격하는데....


곳곳에서 중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나서 악마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해. 토벌대가 귀환한거지. 증원군은 그 뿐만이 아니었어

리자드맨 또한 나타나서 왕국군을 지원하기 시작한 거지. 전투는 대승이었어. 악마들이 소환되고 나서 민간인 피해가 조금 있었지만, 

중무장한 왕국군과 리자드맨 증원군을 당해낼 수 없었던 거지. 하지만 PC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어.

리자드맨들을 토벌하기 위해 보낸 왕국군이 갑자기 리자드맨들과 동맹을 맺고 악마들과 싸워서 영지를 지켜냈으니까.


기적같은 승리의 기쁨에서 빠져나온 PC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들 앞에 한 마법사가 나타나며 자신을 소개해 

이 대마법사는 수년 전에 인간과 늪지대의 리자드맨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던 인물이기도 하고, 세계관 내에서도 꽤나 전설적인 지위에 있는 대마법사였음.

그는 줄곧 PC들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해왔던 숭고한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본래는 세상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불필요한 충돌을 막는 한편, 영지까지 게이트Gate를 열어서 군대를 이동시켰던거지.





그는 일행들의 노고들을 칭찬해 주었고, 그들에게 강력한 마법 아이템들까지 하나씩 선물로 주었어.


그리고는, 이 곳 뿐만 아니라 왕국의 곳곳에서 더 사악하고 끔찍한 계획들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으며, 자신은 더 이상 세상의 일에 관여할 수 없지만

PC들이 자신을 돕는다면 그 계획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들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게 되지.


그렇게 해서 PC들은 한 층 더 위험하고 큰 악을 상대하기 위해 이야기 속에 더 깊이 몸을 내던지게 되었고,

향후 스토리에서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지지자(대마법사)와 연줄(영주)을 얻어내기도 했지.

당연히 PC들이 이후 스토리에 가지게 된 애정들도 더욱 각별해졌고.



이토록 내가 품었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절망에 빠졌을 때 느끼는 그 무기력함과 참담함도 좋지만.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일이 한순간에 해결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을 때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도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나 만족감 같은 감정들이 절대적인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새벽에 쓰다 보니까 괜한 잡설이 길어진 것 같네. 이만 줄일게. 모두들 즐거운 주말 보내길 바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