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H-!!!!'

땅이 울릴 정도의 함성과 지하에까지 전해지는 열기는 대단했다. 다음 검투시합은 '브루투스'의 시합이기 때문일까? 들어온지 2년이 채 안된 오크 투사 '브루투스'는 오크치고 그 덩치와 힘이 평범했다. 오히려 키는 컸지만 마른편에 속했다. 그러나 다른 오크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이 오크는 자신의 육체만을 앞세워 싸우는게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일부러 틈을 내줬다는 듯이 몇번이고 방패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관중의 함성을 이끌어냈다. 빠르지는 않지만 오크 특유의 근육과 맞물린 검술은 일순 화려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었다. 머리도 상당히 좋아 책을 읽는 모습도 간혹 보였으며 전술, 전략에도 능해 다대다 전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런 브루투스의 스승인 빅터는 가슴을 울리는 함성에 흡족했다. 자신의 검술과 방패술을 대부분 흡수하고 오크만이 가진 강력한 근력을 이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일구는 경우는 저녀석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자신이 검투사를 은퇴하고 교관 직위에 오른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금요일의 큰 시합을 마치고 주인에게서 하사된 보화들과 며칠간의 휴일이 주어졌다. 물론 빅터는 저녁에 친구들과의 파티만을 즐기고 올 생각이었지만.

'WAGH-!!!'

이어지는 함성이 더 커진걸 보니 이번에도 화려하게 적을 농락하며 승리한듯하다. 브루투스 이 녀석도 몇년 더 하면 이녀석도 은퇴할지도 모르겠군, 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주인 그나이우스에게로 갔다.

"주인님, 빅터입니다."
"들어오게! 안그래도 자네를 보고싶었네."

방 안에는 진한 녹색 토가에 은으로 수를 놓아진 참으로 귀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자가 있었다. 표정은 부드러웠으니 눈빛은 강직하여, 스스로의 가문과 자신이 가진 것들에대한 자부심이 강해보였다.
그러나 빅터가 방에 들어서자 눈빛이 일순 부드러워지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빅터! 내 충직한 검사! 어서오게."
"이제 싸움에서 물러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만 둬주십쇼, 그런 장난은."
"하하, 자네를 볼때마다 챔피언 벨트를 움켜쥐고 관중을 향해 방패를 치켜들었던게 생각난단 말이야."

업무를 보는 도중이었는지 그의 책상에는 양피지와 잡다한 서류들이 가득했다.

"오늘이 바로 그 10년째니 말이야. 일전에 말했듯이 며칠간 휴가를 다녀오게. 휴가에 필요한 모든 비용도 내가 내줌세."
"주인님, 저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검을 휘두르는 것만 해와서인지, 이곳에서 검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편합니다."
"자네가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고 자유인이 되었을때도 나에게 그 말을 했었지. 교관이 되겠다고."
"그렇습니다, 주인님."

녹색 토가의 중년은 희끗해지는 자신의 머리를 쓸며 말을 이었다.

"항상 고마울 따름이야. 가진 재산도 별로 없고 옛날에 대단했던 술파가문이라는것 하나만 남았던 나의 집안을 이렇게 크게 만든 것도 다 자네 덕분이니 말일세."

빅터는 새삼 동고동락했던 그나이우스와의 세월을 돌이켜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님, 이만 저는 시내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하 이거 휴가가는 사람 붙잡고 뭐하는건지 모르겠구만."

그나이우스 마그누스 술파.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 검투장을 관리하는 명예로운 집안이었다. 그러나 귀족간의 암투로 그 재산을 모두 잃고 남은건 빅터와 몇가지 집기가 전부였다. 그때 빅터가 챔피언 벨트를 따내지 못했다면 다시 이 검투장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은 자신에게 있어 영광과 명예를 준 곳이었다. 검투장 입구에 양각된 독수리 문양을 쓰다듬고 자신의 성이된 아들러만을 입속으로 되새겨보았다.
'아들러만(adlermann)...'
독수리인간이라는 뜻이었다.

말을 타고 가다가 거치는 곳엔 빈민가가 있었다. 거지들과 좀도둑들이 한데 뭉쳐 구정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동네... 그것이 빅터의 감상이었다. 자유민이 된지 10년째이지만 이곳의 냄새는 영 적응되지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때 어떤 거적을 두른 노인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 빅터의 발목을 잡았다.

"당신은 누구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붉은 연기...창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너는 오늘 모든걸 잃을 것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의 노인은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있었다. 빅터는 예언이랍시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뒤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집시인줄 알고 뿌리치려했으나 노인의 아귀힘은 굉장했다.
말에 박차를 가하자 그제서야 떨어지며 자신의 무리속으로 도망쳤다.
이 빈민가는 항상 빅터에게 짜증나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봐! 주인장! 여기 구운 닭한마리 가져와!"
"여기 맥주 한잔 더!"
"뭐? 맥주를 시킨다고? 자네 혀가 어떻게 된거 아니야?"

단골 펍의 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빅터! 한잔 하러 왔나?"
"내가 빅터한테 말 오줌맛 맥주 한잔 쏘지!"
"푸하하하! 빅터 후딱 마셔버리라구!"

들어오자마자 주근깨가 매력인 젊은 여급이 그에게 맥주를 한잔 내밀며 반겼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자 여기요. 말오줌맛 맥주!받아요!"
"하하하!""맛-쎠라! 맛쎠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거냐!"

빅터는 들어가자마자 공짜로 받은 희뿌연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입가로 질질 새나왔지만 오늘만큼은 그런것은 신경쓰고싶지 않았다.

"10년동안 마셨지만 자네 맥주는 최악이야! 쾨글러!"

이들은 빅터의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었다. 전직 검투사를 하던 자도 있고, 경비병도 있었으며, 빅터가 현역일때 그가 진다는 것에 돈을 걸었다가 낭패본 자도 있었다.

고급 포도주에, 여관주인 쾨글러가 빅터를 위해 직접 만든 케익도 있었다. 물론 쾨글러도 케익이 뭔지 잘 몰라 빵을 굽고 거기에 간 고기와 감자 무스로 장식한게 전부지만.

새벽이 되어 끝난 파티를 마치고 빈민촌의 냄새를 맡기싫어 일부러 반절은 더 되는 길을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과음한 탓에 술도 깰 목적으로 말을 타고 숲길을 거닐었지만, 오늘은 왠지 스산한 것이 그냥 빨리 돌아갈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아악'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까마귀 한마리가 빅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였다. 하늘에 연기가 가득했다. 붉은 화염이 치솟고 연기가 하늘을 메웠다.

'붉은 연기...창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너는 오늘 모든 걸 잃을 것이다!!!'

재수없게 낮의 집시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이랴! 빨리 가자!"

박차를 가해 도착한 검투장과 저택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단은 주인이 우선이다. 주인만 살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가는 길에 시체들이 보였다.
빠른 검술을 익혀 레이피어를 주무기로 사용하던 얀은 묵직한 둔기로 맞은듯이 머리가 함몰되어있었다. 머리쓰는 싸움을 좋아해 그물과 단창을 쓰던 벤터하임은 그 단창에 꿰뚫려 쓰러져있었다. 그 외에도 아끼던 제자들이 무참히 당해 죽어있었다.

"끄륵....컥컥."

목이 베어 죽은줄 알았던 에를이 살아있었다. 빅터의 방패검술을 수련하던 제자였다.

"에를! 말하지 마라. 누워있어!"
"오르륵...크헉...오크....커헉!"

에를이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을 보자 두명의 오크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생각해보건데, 가장 바라지 않던 일이 발발한것 같았다. 오크의 반란. 자신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

옆에 에를이 쓰러지며 놓친 방패와 검이 있었다. 빅터는 그것을 주워들고 오크를 보며 읊조렸다.

"오냐. 내가 책임지고 교육을 마쳐야지."

달려오는 오크중 한놈을 방패로 넘기고 다른 놈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다. 첫합은 막혔지만 바로 다음 합에 목이 꿰뚤렸다.
방패로 넘긴 오크에게 다시한번 방패를 휘둘르고 복부에 칼을 꽂았다.
저택으로 들어가자 대검을 든 오크 두놈이 자신을 보고 달려온다. 빈틈 투성이다. 롱소드가 휘둘러지자 팔이 한쪽 날아가고 넘어지면 목을 찌른다.

"We! A-rea! We! A-r...."

전투함성으로 동료를 부르는 소리에 빠르게 목을 베었지만 늦었다. 불타는 저택의 홀에는 오크들과 경비병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2층 발코니에는 브루투스가 그나이우스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빅터가 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브루투스의 검이 그나이우스의 목을 갈랐다.

"브루투스! 너마저! 다른 오크와 똑같은 야만족이었던 건가!"
"스승. 나는 이곳에서 당신에게 많은 걸 배웠소. 검술 뿐만이 아니었지."

브루투스는 그나이우스의 머리를 쥐어 터트리고 말을 이었다.

"인간의 문화, 인간의 역사, 전술과 전략. 어느것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 그런데 말이오, 스승은 그걸 아는지 모르겠소."

천천히 발코니에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브루투스, 무슨 말을..."
"이 주인은 나는 물론이고 이곳의 오크 전사들중 어느 누구보다도 약해빠졌지. 그러나 모든걸 가졌소. 심지어 내 목숨마저 가졌고, 난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소."
"인간의 문화와 지식을 배우고도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는건가? 이 세상은 힘만으로 모든걸 증명하는 곳이 아니다!"

브루투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내 계단에서 내려온 브루투스는 홀을 사이에 두고 빅터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그건 인간들이 만든 규칙이지. 왕국의 법과 도를 왜 나한테까지 요구하는지 모르겠더군"
"네놈은 선을 넘었고 내 주인을 죽이고 내 명예를 불태웠다. 브루투스! 널 죽이겠다!"
"인간은 오크보다 약하지. 그러나 인간들은 오크들보다 강하오."

빅터는 방패를 치켜들고 홀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전략과 전술덕분이더군. 그렇다면 이제 오크들도 인간들만큼 강해질 수 있소."

말을 마치자마자 사방에서 날아온 화살이 빅터를 꿰뚫었다.

"함께하지 못하는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소. 핍박받는 나의 형제 자매가 당신의 가르침보다 소중한 것을."

그 말을 끝으로 빅터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팔다리를 꿰뚫었던 화살들은 모두 치료되어있었고 자신이 누워있는 곳을 살펴보니 너른 잔디밭이었다. 누워있던 자리 근처에 놓여진 방패옆에는 자신의 검과 챔피언 벨트가 있었다.

"으윽.."

챔피언 벨트 옆에 짤막한 편지가 있었다.

[당신은 정말 존경하는 인간이지만, 다시 만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소.]

명예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건만 바로 그 명예를 더럽힌 적에게 목숨이 구해졌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놈만큼은 반드시 죽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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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재주는 없어서 재미는 없지만 플레이는 재밌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