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년 정도 됐나? 나는 한참 새로 모은 팀이랑 패스파인더를 하고 있었다. 배경은 실제 역사에 판타지를 첨가해서 입맛에 맞게 조금 수정한 자작 세계였다.
PC들은 갈리아 지역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몇 년이 지난 후, 해당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광산촌의 민정관에게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이 광산촌은 꽤나 변경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풍부한 은맥이 있었던 덕에 규모 자체는 작지 않았고, 광산관리인과 인부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PC들은 처음에는 전쟁 후 피냄새를 맡고 모여든 괴물들이나, 아직까지 제국 정착지 주변을 배회하며 약탈을 일삼는 야만족 패잔병 따위를 몰아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사건을 거친 끝에 PC들은 야만족 사이에 새로운 카리스마틱한 지도자가 나타나 다시 부족들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수백 야만족의 공습이 임박한 데 비해 가까이 주둔하고 있는 군단은 없었다. 광산촌에는 기껏해야 열댓 명 남짓한 수비대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주민들이 모두 터전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광산촌이 위치한 곳은 갈리아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경지여서, 마을을 나가는 순간 험한 원시림과 구릉지가 나왔거든. 야만족의 추격을 받으며 그곳을 통과하는 건 민간인들에게는 무리였지. 물론 PC들은 자기들끼리만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광산촌에 남아 결사의 항전을 돕기로 했다. 재빨리 파수대 몇 명을 인근 도시로 보내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한 후, PC들은 곧바로 남은 광산촌 주민들과 함께 방어준비에 나섰다.
이 과정은 실제 기간으로도 5주에 걸친 모임으로 진행됐다. PC들은 야만족 척후병들과 싸우며 인근 제국 벌목소에서 인부들을 피신시키고, 방책을 세울 목재를 확보해왔다. 그 다음 광산에서 꺼내온 토사물과 바위를 마을 마법사의 도움으로 굳히고 얼리며 토벽을 쌓고, 거기에 날카롭게 깎은 통나무로 목책을 세워 임시적인 방어선을 구축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야만적 전위부대가 나타나 목책 구축을 방해했지만, PC들은 그들 자신도 스킬 챌린지를 통해 방책을 쌓고, 아직 목책이 완성되지 않은 지점을 돌파해 들어오는 야만족들을 막아내며 인부들을 보호했지. 목책이 완성된 후에는 야만족 드루이드들이 소환한 대기의 정령들이 밤하늘로부터 늑대인간들을 안고 나타나 광산촌 행정관청에 낙하돌입시켰다. 그 때도 비록 많은 마을 주요인사들이 학살되긴 했지만, PC들은 마을 마법사와 성직자 등 핵심인물들은 보호해냈지.
하지만 야만족 본대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점점 극한으로 치달았다. 마을 주요인사들이 암살됨에 따라 주민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이를 알고 있던 야만족들은 밤마다 방책에 피상적인 공습을 가하거나, 돌을 던지고 방패를 두드리면서 방책 너머로부터 겁을 줬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PC들은 살아남기 위해 nPC인 살아남은 마을 주요인사들과 꽤 깊은 유대를 맺었다. 마을의 아포테카인 할머니라거나, 실력은 좋지만 겁이 많고 의지가 박약한 허약 체질 중년 마법사라거나, 전쟁사제 출신에 죽음의 신을 섬기는 근엄한 냉소주의자 사제 아저씨 등. nPC들도 각자 나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왔다. 부상자들을 치료한다거나, 제한적이나마 마법으로 식량과 식수를 만든다거나, 방어에 필요한 공동작업을 지휘하는 일 같은 거.
그러던 중 결국 야만족의 공세를 버티기 힘들어지자 nPC들 중 사제 아저씨가 특단의 제안을 했다. 이는 바로 사망한 파수병과 주민들의 시체를 네크로맨시로 일으켜서 다시 싸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의 법인 '딕툼 모르툼'을 어기는 일이었다. '딕툼 모르툼'은 제국의 중앙신전인 콜레기움 폰티피쿰의 허가를 받지 않은 모든 종류의 사자소생을 금하고 있었다. 딕툼 모르툼의 위반에 대한 처벌은 신성마법에 의한 잔인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있다가는 곧 방책이 돌파되고 주민 모두가 학살될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PC들을 비롯한 광산촌 수비 지도자들은 네크로맨시의 사용에 동의했다.
네크로맨시로 계속 일으키는 언데드 덕분에 PC들은 방어선에만 묶여있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광산촌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마을 주변의 언덕들로 이어진 작은 갱도들로 이동해 야만족의 후방을 치고, 드루이드들을 암살하는 등 말이다. 이렇게 야만족의 공세도 교란되면서 PC들은 전령의 구호요청에 응답한 인근 지역 군단이 나타나 야만족을 물리쳐줄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시설이 파괴됐지만, 그래도 살았다는 생각에 광산촌은 축제분위기가 됐다. 야만족을 몰아낸 군단장은 어떻게 이 작은 광산촌이 수백 야만족의 대규모 공습을 막아낼 수 있었는지 들은 후 PC들에게 큰 보상을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군단장은 '딕툼 모르툼'을 위반한 마을 사제를 체포해 구금했으며, 조만간 인근 도시로 보내 신전에서 처형시키라고 지시했다. PC들의 호소에도 군단장은 이 결정 만큼은 바꾸지 않았다.
PC들이 구금된 사제를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하루를 고민하고 있는 사이, 상황을 보다못한 nPC들이 먼저 움직였다. 몇몇 nPC들이 합심해서 구금되어있던 사제를 몰래 빼내 탈출시킨 것이었다. 처음에 PC들은 자기들이 손 쓰기 전에 사제가 탈출했다는 데 기뻐했다. 하지만 곧 PC들은 군단장의 소환을 받았다. PC들은 군단장이 사제를 빼돌린 게 자기들일 거라고 의심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군단장은 바로 도망친 사제를 붙잡게 하기 위해 PC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처음에 PC들은 이 요구를 거부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위기를 같이 넘긴 전우이고, 모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총대를 매고 법을 어긴 건데, 그 대가로 불명예스러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단장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군단장은 도망친 사제를 붙잡아오는 이에게 거부하기 힘들 정도의 보상금을 제공하겠노라 약속했고, 여기에 PC 중 하나의 원수였던 친-제국파 야만족 용병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파티 중 돈에 미친 바바리안(CE)과 위자드 PC(CN)는 보상금에 눈이 멀어 의뢰를 수락했다. 친-제국파 야만족 용병에게 형 둘과 누나가 죽은 클레릭 PC는 경쟁심에 불타 의뢰를 수락했다. 파티의 양심이었던 노예 검투사 출신의 파이터 PC는 끝까지 의뢰를 거부하고 싶어했지만, 다른 PC들이 모두 의뢰를 수락하자 어쩔 수 없이 따라오기로 했다. 사실 파이터 PC는 다른 PC들이 정말로 사제를 죽이려 들면 자신이 개입해 제지하기 위해 계속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 사제는 몇 년 전 이 지역에서 제국과 야만족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을 때 한 요새에서 수비대 장교로 복무했었고, 야만족의 책략으로 요새가 불탈 때 그는 혼자만 살아서 간신히 탈출했었다. 혼자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이 있었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 죽은 전우들을 제대로 장사지내주고자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요새의 폐허는 불타죽은 고통과 원한으로 미친 언데드가 되어 되살아난 전우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언데드가 된 전우들을 어쩔 수 없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이 지역에 정착해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기로 했었다. 그리고 이제 딕툼 모르툼 위반으로 쫓기게 되자 절박해진 그는,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그 요새의 폐허로 도망쳐 숨어버린 것이다.
이 요새 폐허는 일종의 던전이었다. 안에는 주로 쉐도우와 레이쓰 계통의 적들이 득실거렸고, 처음으로 인코포리얼 적과 조우한 PC들은 신나게 얻어맞으며 어빌리티 드레인을 당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던전을 탐사한 PC들은 간신히 요새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요새는 강을 끼고 있었고 요새 지하에는 식수를 공급받기 위해 강과 연결된 지하 저수조가 있었다. 사제는 이 요새 폐허에 남아있는 옛 무구들을 되찾고, 언데드들의 도움을 받아 추적을 뿌리친 다음(자신은 비밀 통로의 위치 등 요새 구조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언데드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마법도 있었다), 이 저수조를 통해 강으로 흘러들어 흔적을 지우고 도망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만약 사제의 과거 및 요새 지하의 강과 연결된 저수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의 행방은 여기서 끊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PC들은 그의 계획을 파악하고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거의 성공했었다.
그러나 바로 저수조로 들어가기 직전 방에서, PC들은 운이 없게도 이 요새에서 가장 강력한 언데드였던 보닥과 마주쳤다. PC들은 보닥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위자드 PC가 네거티브 레벨을 대량으로 얻어서 사실상 1레벨이 되고 말았다. 연출상으로는 강력한 음기에 노출되서 시꺼먼 핏줄이 불거지고, 피부는 창백해지고, 숨도 제대로 못쉬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파티의 클레릭 PC는 안타깝게도 네거티브 레벨을 없애주는 주문에 필요한 고가의 시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파티는 모든 역경을 뚫고 드디어 따라잡은 사제를 앞두고 거래를 해야만 했다. 내용인즉 파티는 사제를 더 이상 쫓지 않는 대신, 사제는 위자드 PC의 네거티브 레벨을 마법으로 제거해준다는 것이었다. 사제가 제안한 방식은 이러했다. 자신이 도망칠 때까지 파티는 모든 무기를 저수조 안에 던진다. 그리고 위자드 PC만 혼자 사제에게 가까이 다가와 치료주문을 받은 후, 사제가 도망칠 때까지 인질이 된다. 1레벨이 되서 거의 모든 주문을 잃어버린 위자드는 치료를 받는다 해도 다시 주문을 준비할 때까지는 별다른 위협이 안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파티는 모두 동의했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가 돈에 눈이 멀어 자기를 죽이러 따라온 PC들에게 이 정도까지 사정을 봐준다는 것에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제국 요새의 지하 저수조
이 거래는 위자드 PC가 회복주문을 받을 때까지는 정상적으로 이행됐다. 정말로 PC들은 저수조에 무기를 던졌고, 위자드 PC는 아무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사제 앞까지 나아갔으며, 사제는 치료 주문을 써주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위자드 PC는 소매 안에 숨겨놓고 있던 스코칭 레이 완드를 기습적으로 꺼내서 서프라이즈 라운드까지 얻으며 사제의 눈에 갈겼다. 그와 동시에 바바리안 PC는 전속력으로 뛰어들어 클레릭을 그래플 한 다음 저수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바바리안 레이지 파워로 얻은 바이트 어택으로 사제의 목을 물 속에서 물어뜯기 시작했다. 물론 위자드는 물 바깥에서 계속 사제를 향해 미친 듯이 스코칭 레이를 갈겼다. 사제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물 속이어서 제대로 주문을 시전할 수 없었고, 결국 무의미한 발버둥만 치다가 익사 아닌 익사를 당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PC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겼다. 특히 NG 성향의 파이터 PC는 게거품을 물며 바바리안과 위자드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바바리안의 대답은 이러했다.
"쫓지 않는다고 했지 죽이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그리고 나는 약속대로 모든 무기를 저수조 안에 던졌다." 과연 스스로 저수조로 뛰어들어서 내츄럴 웨폰인 이빨도 저수조 안에 던진 셈이었다.
위자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완드는 무기가 아니다." 뭐... 장착 슬롯 기준이나 아이템 분류표상 무기가 아니긴 아니다.
우리 파티는 정말 약속을 잘 지키는 파티였다.
멋지네. 이런 플레이를 하고도 PL간에는 불화가 안 생겼다면 더욱.
짱인데, 로그 있으면 로그 보고싶다
TR이라 로그는 없음. 이 때 하던 사람들은 계속 같이 하는 중. 정작 플레이어 중 파이터 플레이어가 저런 인정사정 없는 더러운 상황으로 흘러가는 걸 제일 좋아했었지.
아쉽군...
가장 강한 적이 보닥이었을 정도면 꽤 저레벨 플레이였을 거 같은데 재미있게 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1~2 레벨 워리어였던 야만족들을 최대한 많이, 효과적으로 쓸어담기 위해 물리적인 딜에 모든걸 집중했던 파티라서 인코포리얼 대책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다른 pc의 성향에 대해 잘 이해하고, 그들이 행할 행동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면 저런 파국도 극적인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 피트도 주문도 별로 없는 저레벨 파티였지만 재미있는 시나리오 덕에 흥미진진한 플레이었죠
캬..파티원들 인성 좀 보소ㅋㅋ 파이터 플레이어가 그런 성격이었다니 또 재밌네. 플레이어간 불화가 아닌데 저런 플레이는 개따봉이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