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스칼렛피스트 용병단의 연무장은 흙먼지와 병사들의 땀방울, 그리고 기합으로 가득하다.
스무명이 넘는 용병이 각자 창과 검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련을 하고있다. 장창을 들고 마치 봉술처럼 이리저리 창을 휘두르며 장검을 든 사내를 제압해가는 용병의 이름은 쾨니히. 용병계에서도 제법 짬이 굵은 편이었다.

"쾨니히! 살살 봐줘가면서 해라. 그리고 바트는 어제 알려준대로 발 11자로 유지해!"

용병단 건물 2층에서 들려온 외침에 쾨니히와 그 상대-바트-는 2층을 향해 경례를 해 보이고는 물을 마셨다.
땀을 흘리며 이것저것 자세를 잡아보며 서로 토론을 한다.

"역시 빅터씨는 이런 일에 익숙하시군요."
"그래. 남부에서 검투사들을 가르키기도 했으니. 하지만 자네는 도저히 못당하겠더군. 실전에 강한 타입인가?"
"하하, 제가 가르치는 건 영 젬병이라 그런가봐요."

2층의 복도를 걸어가는 사람은 빅터와 라이암이었다. 그들은 오늘 조식으로 나온 얼어붙은 케이크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이것이 먹으라고 준 건지, 숯돌 대신으로 쓰라고 준건지 고민하다가 차를 한잔 마시고 단장의 명령에 따라 올라가는 중이었다.

"단장님, 빅터씨를 데려왔습니다."
"어, 들여보내렴."

문이 열리자 이자벨은 단장실의 책상에 발을 올리고 서류 뭉치를 읽고있었다. 펜을 되는대로 휘갈기는듯 했지만 의외로 필체는 좋았던 것이 기억난다. 빅터는 단장실의 응접 테이블 한자리를 차지해 차를 마시고 있는 젊은 청년과 그 뒤에 벽에 기대 시미터에 기름을 먹이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청년은 마법사의 특징인 로브를 입고있었고, 흑갈색의 머리를 자랑으로 여겨도 될 정도로 머릿결이 좋았다. 반면에 그 뒤-연무장 용병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인상이 좋지 못한 한스라는 친구-의 남자(30대처럼 보인다)는 외모같은 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는 칼질을 하기 편하도록 다듬는 수준이었고 면도 역시 거슬리지 않기 위해 하는 수준이었다. 눈빛이 불타오르는 것에서 험난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은 한스, 발가이르고 저쪽은 빅터야. 당신들 이번에 임무가 있어서 불렀어."
"빅터씨, 안녕하세요. 발가이릅니다. 서있지만 마시고 이리와서 차한잔 어떠세요? 1층 공용과는 맛이 아주 달라요! 이건 서쪽어디어디..."
"발가이르, 조용히. 그보다 무슨 일 입니까?"

발가이르가 자신의 지식을 과시-보다는 그저 수다-하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한스는 그를 제지하고 단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잠겨있었다고 생각될정도로 허스키했다.

"아니, 난 그저 이 차가..."
"하아, 이거 난처하군. 한스 당신이 좀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귀족 심부름이야."
"혹시 라이너 백작아들입니까?"

빅터가 끼어들었다. 그는 제국 남부 출신의 검투사 챔피언으로, 검투 하나만으로 귀족과의 연줄을 만든 사람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몰랐다.

"그래, 당신도 아는구나? 그 라이너씨가 좀 개인적인 일로 요청해서 당신들이 좀 다녀와야겠어."
"보상은?" 한스의 낮은 목소리.
"매번 그렇잖아. 하는거 봐서."
"그렇군. 바로 출발하지."

일행들이 문으로 나가려 하자 단장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1층에 집사분 와있으니까, 따라가고."

솔직히 말해 백작아들이 사는 집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정도로 부조화스러웠다. 오히려 졸부의 집정도가 아닐까 싶을정도로 조잡하다는 말이 어울릴까? 저택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작은 크기에, 개척민이 산다기엔 층이 3층짜리 건물이었으며, 귀족이 사는 집치고 이곳저곳이 보수된 흔적이 커다랗게 남아서 우스꽝스러웠다.

"저, 저기...집사님? 여기 백작아드님댁 맞죠? 갈란트가는 굉장히 부자로 알고있었는데요. 세에상에 저 크랙, 저 구조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집은 원래 있던 집 두채를 허물지도 않고 그대로 이어붙이고 층을 쌓아서 그런것입니다."
"제가 아는 그 갈란트 백작이라면 아들이 이런 집에서 사는 걸 용납하지 않을것같소만."

빅터마저 끼어들 정도로 그 집이 귀족의 집답지 못했다는 것일까. 하지만 안에 들어서자 밖에서 본 것치고는 상당히 아늑하고 이것저것 신경쓴 느낌이 들었다.
카펫도 오래됐지만 고급스러운 재질이었고, 어디서 본듯한 칼과 방패, 창과 투구들도 장식되어있었다.

"집사님? 이 칼들은...?"
"크, 크흠!"

물론 검들은 사조와 디자인의 흐름이 맞지 않은채로 걸려있었고 이쪽에 걸린 방패와 저쪽에 걸린 칼이 합을 이루도록 장식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도련님, 스칼렛 피스트 용병단에서 파견온 분들이 도착했습니다."
"잠깐만!"

조금 앳된 느낌의 변성기가 거의 끝나려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우당탕하는 소음 뒤에 '아야야'하는 신음과 서류뭉치가 흐트러지는 소리와 '오, 이런'하는 등의 탄식이 흘러나온 뒤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문을 연 사람은 라이너 폰 갈란트 본인이었다.

"왔군요. 반갑습니다. 라이너 폰 갈란트입니다."

서른도 안되는 나이처럼 보이는 이 청년은 일부러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사교계에서 얕잡아보이지 않으려는 목적일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발가이릅니다. 이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흴 부르셨다구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단장님한테 알리지도 않고 부르셨어요?"
"아, 그거라면...음. 볼프강? 이분들께 음료를 대접하게. 손님들의 품위와, 내 격이 맞는 걸로."

옆에있던 사용인이 빠릿하게 움직여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 한달 후면 아버지 생신인데, 명색이 아들놈이 선물은 챙겨드려야겠다 싶어 여러분들을 불렀습니다."
"당신 애비가 생일인게 우리와 무슨 관계지?"
"하하, 형씨. 그러지 말구 얘기좀 들어보자구, 응? 아니, 우리도 귀족 따까리는 달갑잖지만, 설명도 안들어보고 적대적일 필욘 없잖아?"
"굉장히 수다스러운 분이군요. 이곳에서 머무는 것도 다 아버지의 재력덕이니, 이곳이 맞는 특산물을 선물로 드리는 것이 도리아니겠습니까? 단지 비싼거라면 그거야말로 돈낭비니까요."
"어지간한 선물로는 그렇겠죠."
"이곳, 레이븐스 마운드는 노덴슈타인 숲보다 더 북부로 가기위한 발판이죠. 그 눈덮인 평원에서만 사는 동물의 가죽이라면, 선물을 하는 저로서도 아주 만족스러울것 같네요."

그 말에 신음을 울린것은 한스였다. 빅터는 그의 낌새가 좋지 않음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개인적인 선물을 위해 우릴 그 북부로 내몬다면, 사람 잘못봤소. 우린 밀렵꾼이 아니라 용병이니 말이오."
"난처하군요."
"난처하다?"
"거참, 이건 말씀을 드려야하나, 아닌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만."

그때 문을 열고 다과가 담긴 트레이가 들어왔다. 볼프강은 문을 열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우린 차를 잔에 따라 모두에게 한잔씩 내었다.
볼프강이 들어와서인지, 실내는 잠시 다기 부딛히는 소리를 제외하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거 상당히 고급품이군요?"
"여느 귀족이든 사치품엔 죽고 못사는 법이죠."
"그런 분치고 그런 말을 내뱉는 분도 없는 법인데요?"
"볼프강? 빨리 나가."

볼프강이 나가자마자 일얘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이곳 레이븐스 마운드는 후작가의 손이 닿아있는 곳이죠. 그런데 이곳이 계속 개척되다보면 후작가의 입김이 중앙에 과하게 작용을 할것 같아서요."
"그래서 남부 출신인 당신이 이곳에 새 둥지를 트겠다, 그런 말인가?"

끼어든 것은 빅터였다. 출신성분치고는 귀족들을 간혹 만난 탓에, 그들의 세력도는 어느정도 알고있었다.

"둥지를 튼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요. 빅터 스쿠투스 아들러만."
"스쿠투스? 내가 그 호칭을 이 개척도시 이곳저곳에 떠벌리고 다닌것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아는거요?"
"당신이 벨트를 차지하는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봤으니까."
"이거, 나를 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용병단 단장과 상의없이 한쪽 정치세력을 일방적으로 돕는건 우리 용병단의 분열조장밖에 안되니 돌아가도록 하지."
"잠깐, 얘기나 들어보는건 어떠신지? 빅터 형씨도 너무 그렇게 날세우지 말고. 한스도 좀 앉아봐요. 아직 중요한 얘기는 나오지도 않은것 같은데. 아니, 게다가 후작가의 세력이 커져봐야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우리가 멍멍이처럼 거기 붙어서 단물이 언제나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기만 할 순 없겠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얘기나 좀 더 들어보자구요?"
"너무 정치 얘기만 해서 여러분들에게 제안을 하지는 않았군요."
"저거만 들어봅시다. 어허! 거기 의자에 엉덩이 딱 붙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하는 제안은 뭔데요?"
"윈터울프, 그 가죽을 내게 가져다주면 충분한 금액은 물론이고, 중앙 귀족들에 당신들 용병단의 이름을 널리 알리도록 하죠."

발가이르는 눈썹을 ㅅ자로 모으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건 곤란한데요?"
"곤란하다고? 뭐가 곤란하죠?"
"우리 이름이 알려지는건 좋은 일이지만 당신을 통해서 알려져봐야 후작님께 쿠사리먹을 수도 있걸랑요. 우리 어엿브신 단장님도 그 후작님과 일한적이 있어서 덜컥 맡아버리긴 곤란해요."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들리는 것은 차 한모금이 넘어가는 목넘김 소리뿐. 꿀꺽.

"우리의 이름은 필요없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걸 구하는 루트. 그게 필요하지."

정적을 깬건 한스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어차피 이곳에 필요한 물자는 어지간히 번영하지 않는 이상 물량이 부족하다. 그러나 귀족의 주문이라면 제국 그 어디서라도 구할 수 있다. 그러니 질좋은 물건을 주문하는 통로가 되어달라는 것. 그리고 이름은 알리지 말것.

"그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은 하지만....좀 아쉽군요. 좋습니다. 명성이 필요없다니 그렇게 해드릴 순 있겠네요. 그러면 좀 미안한 감이 있고하니 식사는 같이 합시다."
"좋죠!"

남부 귀족의 식탁다웠다는 말이 어울렸다. 비록 보존마법이 걸려 이곳에 도달했겠지만, 상태는 제법 괜찮았던 해산물과 마늘 요리. 북부에서 많이 자라는 값비싼 버섯요리. 게다가 맥주로 유명한 서부에서 들여온 술들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빅터가 굉장히 반가움을 느낀 '가룸'이란 발효음식-한스는 딱 한번 먹고는 더이상 손대지 않았으며, 발가이르조차 이것은 버겁다는 표정을 지었다-은 북부에 올라온지 5년째인 그에게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발가이르씨, 맥주도 드셔보시죠? 테이네로인 가에서도 자주 배달시킨다는 곳에서 어렵사리 이곳까지 주문한겁니다."

테이네로인이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윽'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래들린듯 기침을 몇번 하더니. 발가이르는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얼굴이 금세 밝아져 반갑다는 표정이었지만 곧 착잡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굉장히...맛좋군요."
"뭔가 사정이 있는가보군요. 굳이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입에 맞으신지요?"
"대단하오."
"예?"
"이 마늘향, 진한 포도주와 어울리는 새우요리에, 심지어 포도주까지. 이런 식사는 굉장히 맘에 드는군. 매일 일이 끝나고 먹었던 '가룸'은 북부에 올라오고는 통 먹지 못했던 것이라 감동까지 했고 말이오."
"과찬입니다. 그저 제 손님에게는 제 격에 맞는 식사를 제공해드리는게 맞다고 생각할 따름이지요."

그러나 한스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음식은 맛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먹는 것. 맛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 즐거움도 다른이에겐 필요없는 것일 수 있다는건 잘 알고있습니다. 자, 그럼 식사도 어느정도 끝났으니 객실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볼프강? 이분들을 객실로 안내해드려라."

집사와 갈란트 백작아들의 배웅을 받으며 일행은 북으로 향했다. 북문엔 경비병 에반스가 탐탁찮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또 무슨 일로 나가는건가?"
"알거 없다."
"이봐, 사냥꾼 양반. 당신 목적이 뭔지 알려줘야 문을 열든 말든 할것 아닌가? 이 목책이 별거 아니더라도 여긴 내 구역이다."
"아하하하 너무 그렇게 다투지 마시죠? 버나드씨, 아저씨도 딱히 나가는걸 막을 필요는 없잖아요? 저희는 늑대사냥 나가는 거니까 막으실 필요도 없다구요!"
"늑대에 물려 죽지나 마시지!"

목책문이 열리고 일행은 북부의 노덴슈타인으로 쭉 뻗은 길이 보였다. 구 요정제국의 도시가 있던 터의 근방이라 인적이 드문데 비해 길은 아주 잘 나있었다. 요정의 토목술이 좋은 탓일까? 수천년이 흘렀겠지만 도로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이세니아의 가호가 통한 탓인지, 이들의 운이 좋았던 건지. 숲은 이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단 한순간, 딴청을 피우다 함정에 빠진 발가이르와 그를 도와주기 위해 구덩이로 뛰어든 빅터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숲의 나무에 놀의 영역표시라는 뜻의 거죽들과 천조각이 늘어져있었다. 한스는 일행에게 이를 알렸지만 아주 애매하게 빠르게 이동한다면 놀 정찰대와 마주치지 않고도 평원으로 갈 수 있을것같았다.

"놀은 자기보다 강한 놈들에게는 잘 덤비지 않소. 우리 셋이 정찰대보다 강하다면 마주치더라도 다짜고짜 달려들진 않을거요."
"어, 빅터형씨. 형씨가 그....술파?술파 검투장에서 오크를 많이 가르쳤다는건 알겠는데. 놀은 그정도로 많이 다루진 않았잖아요? 이왕이면 한스말 듣죠?"
"아니, 나도 이대로 돌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에에엥? 뭐? 왜?왜왜왜?"
"도륙내는데 얼마 안걸리니까."

그런 말을 하고는 가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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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전투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