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에서“전투”는 절벽 등반이나 환자 간호, 운전과 같은 하나의 상황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드게임에서는 “전투”를 따로 말하지 않는데 RPG에서는 유독 그렇더라고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아마도 D&D에서 전투를 다른 부분과 분리된 특별한 것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D&D의 디자인 선택이지요. 다른 RPG들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웬만한 RPG에 전투는 있지만, 그것이 플레이에서 의미하는 바는 각각 다릅니다.

던전월드의 전투는 전투 외의 플레이와 시스템상 구별이 없습니다. 턴 순서조차 없지요. 전투에서의 승리가 캐릭터에게 이득이 되라는 법도 없습니다 (D&D는 최소한 경험치가 보장되고, 경험치의 누적과 레벨 상승은 D&D의 핵심 메카닉이죠).

겁스의 전투는 슬로우모션 세부 묘사입니다. 칼을 휘둘렀는가 내질렀는가, 총알을 정확히 몇 발 쐈는가, HP 손실이 몸에 어떤 효과를 주었으며, 그 중 얼마만큼이 직접적인 부상이고 얼마만큼이 출혈인가 등등등의 디테일이 원하는 만큼 나옵니다.

페이트의 전투는 이쪽은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긴장 상황에서 면모가 이야기에 실현되는 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박전도 공중전도 논쟁도 사교계의 루머 싸움도 다 같은 룰로 구현되지요. 디테일은 면모, 그리고 면모에서 연상되는 것들로 구성됩니다.

똑같이 총칼과 주먹이 맞부딪치는 것 같아도 시스템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거지요. 그래서 저는 “어떤 RPG가 전투가 재미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좀 헷갈립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대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