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 글을 쓸 정신적 여유가 오랜만에 생긴 관계로 쓴다. WoD 뱀파이어에서 하나의 챕터를 할당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이 휴머니티인데, 그 중요성에 비해 여기서는 잘 거론이 안되고 있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볼까 한다. 언제나처럼 퇴고는 안 할 것이고 사견도 섞일 것이므로 적당히 걸러 봐라.


 WoD 뱀파이어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수 있다. WoD 뱀파이어에서 핵심은 다른 게 아니라 휴머니티(Humanity; humanity가 아니라 Humanity)다. 못믿겠으면 룰북 봐라. 20주년 기념판 기준으로 309쪽 챕터 7 서문에서 명시된다. 물론 휴머니티 좆까라고 하고 해도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어느 팀에서 어떤 식으로 플레이를 하든, 룰의 기본 방향성은 휴머니티를 중시하는 쪽으로 프레임이 짜여있다.


 따라서 세부 장르를 뭐로 잡든 기본적으로 WoD 뱀파이어는 휴머니티라는 개념을 안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WoD 내에서의 휴머니티라는 개념은 "얼마나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고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라도)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다. 이 개념 자체는 매우 여러 장르에서 나올 수 있다. 뭐 정치병 걸린 놈들도 대부에서처럼 충분히 정치물 흉내내면서 휴머니티를 사용할 수 있고, 총 쏘고 칼부림하는 홍콩 느와르를 한다고 해도 휴머니티 개념은 사용할 수 있다. 하다못해 메칸더 V에서 메두사도 괴물이 되서 아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자폭하잖아. 도덕적 딜레마라는 건 어디에든 끼워넣을 수 있는 전통적인 물건이다. 그런데 뱀파이어에서 왜 휴머니티가 중요할까..?


1. 휴머니티

WoD에서는 이 휴머니티라는 개념을 뱀파이어의 본능을 뜻하는 비스트(Beast)와 대치시키고 있다. WoD 뱀파이어에서의 휴머니티는 비스트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다. 비스트는 말 그대로 뱀파이어를 야수처럼 만드는 원초적인 욕구다. 피를 마시고, 배타적인 영역을 소유하고, 일신의 안전을 챙기는 것 말이다. 이게 지켜지고 있을 때 뱀파이어는 별다른 문제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짐승적인 욕구가 위험에 처하면, 뱀파이어는 순간적으로 본능에 휘둘리고 날뛰게 된다. 굶주린 뱀파이어는 피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부모 자식 못알아보고 사람을 해친다. 불만 보면 순간적으로 놀라고 무서워서 쉭쉭거리며 도망친다. 겁을 먹거나, 화가 나거나, 영역의 소유권에 도전을 받으면, 미친 듯이 사납게 날뛰며 싸운다. 이처럼 뱀파이어의 본능인 비스트가 너무 강하게 발현되서 일시적으로 이성적 자기통제권을 잃고 날뛰게 되는 상황을 프렌지(Frenzy)라고 한다. 프렌지에 빠진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이성이 날아가고 비스트에 휘둘리는 상태이므로, 원치 않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쉽게 이해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생각해라.


 그래서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최대한 비스트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기 정체성과 이성, 판단능력을 잘 지키기 위해 애쓴다. 이를 테면 철저한 도덕적 감수성으로 야만적인 본성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정상으로도 꽤 많은 뱀파이어들이 비스트를 다스리기 위해서 철학, 신앙, 이념 등에 관심을 갖고, 일부는 일종의 신화적 해석에 기댄 뱀파이어 종파를 만들기도 한다. 함부로 살면 본성이 강해지면서 괴물이 되니까. 이처럼 뱀파이어가 얼마나 인간적인(뭐가 인간적이냐에 대해서는 게임 내외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다른 인간과 공감·소통할 수 있는" 것을 인간적이라고 칭하겠다) 속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바로 휴머니티 수치(Humanity rating)다.


2. 휴머니티 수치

휴머니티 수치는 일종의 멘탈리티 HP다. 10~0점까지 있고, 이는 게임 내에서 PC가 무슨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유동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휴머니티 수치가 0점이 되면 해당 PC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완전히 비스트에 잠식되서 정체성을 상실한 괴물이 되거나, 혹은 PC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미친 정신병자가 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휴머니티 수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다거나, 특수기술을 맞고 휴머니티가 깎이는 일은 없다. 또한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지는 과정은 게임 내에서 여러 효과를 통해 계속 내러티브되므로 플레이어도 자기 캐릭터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하고 추후 선언을 고민할 수 있다. 아래는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짐에 따라 PC가 겪을 수 있는 변화들이다.


*괴물처럼 보이게 됨: 일단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지면 척 봐도 괴물처럼 보이게 된다. 휴머니티 수치가 높은 뱀파이어는 그래도 사람처럼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기도 하고, 안색도 평범하고, 이상할 구석 없어보인다. 하지만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질수록 뱀파이어는 눈 아래가 어둡게 움푹 패이고, 안색은 창백해지며, 피부는 시체처럼 축축하고 뻣뻣해진다. 심지어는 자주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게 되기까지 한다. 대체로 휴머니티 수치 7~4까지는 내적인 변화는 커도 외적으로 눈에 띄는 문제는 없지만, 3점부터는 슬슬 걸어다니는 시체라는 티가 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아래 설명할 베어링(bearing) 패널티를 받는다.


*공감능력 저하: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들도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지 쉽게 계산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기 힘들어진다. 이들은 점점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해지고, 거리감을 느끼며, 냉담해진다. 마찬가지로 휴머니티 수치 3점부터는 이로 인해 베어링 패널티를 받는다.


*낮에 활동하기 힘들어짐: 영화 보면 뱀파이어들은 낮에 관 뚜껑 열어도 시체처럼 곱게 누워서 가만 있잖아? WoD에서도 그렇다. 뱀파이어들은 낮 동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깊게 잠들어서 외부의 자극에 쉽게 대응할 수 없다. 그런데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낮에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진다. 우선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휴머니티 수치가 높은 뱀파이어들에 비해 늦게 일어난다. 그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제한되고,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 시간은 길어진다.


 이는 실제 플레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낮이 되면 강제적으로 모든 뱀파이어들이 은신처에 들어가 자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리 진행에 있어서도 "지금이 몇 시인가"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휴머니티 수치가 낮으면 늦게 일어나니까 당연히 선언의 다양성이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는 낮에 긴급히 일어났을 때 힘이 매우 제한된다. WoD에서는 주 능력치인 Attribute에 기술 능력치인 Ability를 더한 값 만큼 주사위를 굴리는 식으로 판정한다. 일반인의 기준이 2이므로, 어지간한 인간이 판정 시 굴리는 주사위의 개수는 대개 3~4개 정도가 된다. 그런데 내 1000살 먹은 메두셀라 뱀파이어가 휴머니티 수치가 1인데, 낮에 갑자기 집에 불이 나서 긴급대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원래는 주사위 15개씩 굴리던 괴물이라도 낮에는 주사위 꼴랑 1개 굴리면서 빌빌대야 한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대개는 타죽겠지.


*와세일(Wassail): 게임 오버 단계다. 즉 휴머니티 수치가 1에서 0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할 때 해당 뱀파이어는 완전히 미치고 발광을 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정체성과 이성이 완전히 소실된다. 이렇게 게임 오버가 된 뱀파이어는 소위 와이트(Wight)라고 부른다. 와이트들은 오직 자고, 죽이고, 피 마시는 것 외에는 하는 생각이 없다. 모든 뱀파이어가 휴머니티 수치 1에서 0으로 떨어질 때 와세일을 겪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와세일을 겪는다. 참고로 와세일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쓰는 속어로, 원래는 "be healthful"이라는 뜻이다.


 물론 와이트가 된 뱀파이어는 심하게 마스커레이드(뱀파이어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뱀파이어 사회의 법칙)를 어기게 되므로, 대개의 경우 그 지역의 다른 뱀파이어들에 의해서 빠른 시일 내에 제거된다.


3. 베어링

이상의 변화들은 모두 해당하는 게임 규칙들에 따라 처리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바로 베어링(bearing)이다. 베어링은 쉽게 얘기하면 휴머니티 수치에 따라 뱀파이어가 두르고 다니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해보자. 딱 봐도 숨도 안 쉬고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생긴데다 조금만 자극 받아도 짐승처럼 눈 부라리는 사람이 있다. 주변에는 기분 나쁜 긴장감과 위험함이 감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대하기 존나 껄끄럽고 피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뱀파이어가 비스트의 잠식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도덕적인 태도를 뼛속 깊이 새겼다고 하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뭘 해도 조금 더 호감이 갈 거다. 베어링은 이처럼 휴머니티 수치에 따라 풍기는 분위기에 따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규정한다. 사실 말은 복잡하지만 효과는 단순하다. 휴머니티 수치가 8점 이상이면 여러 종류의 사회 판정 난이도가 1~2 정도 떨어지고, 4점 이하면 1~2점 높아진다. 즉 휴머니티 수치가 낮을수록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뭔가 하기가 힘들어지게 해주는 규칙인 셈이다.


 베어링은 캐릭터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와는 무관하게 작용한다. 아무리 열심히 인간인 척해도 작용한다. 사소한 움직임, 말투, 태도에서 드러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휴머니티 수치가 낮은 뱀파이어가 있다고 하자. 이 뱀파이어는 아주 노회하고, 어떻게 해야 인간처럼 보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도 위장을 잘한다. 그래도 이 뱀파이어는 베어링 때문에 묘한 거부감을 유발한다. 모 소설의 묘사를 빌리자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아주 잘 숨겨서 나이든 뱀파이어들 특유의 영묘한 느낌도, 사람을 유혹하는 매력도 없었다. 얼핏 본다면 그냥 인간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인간을 흉내내는 거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그는 모든 점에서 거의 완벽했다. 심지어는 심장도 뛰,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하지만 웃는 모습은 살짝 어색했다. 그는 너무 늦거나 또는 너무 일찍 웃었다. 게다가 그의 보폭은 언제나 일정했다그는 사람 흉내를 놀랄 정도로 잘 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섬뜩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을 보아줄 사람들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전혀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과 잘 공감하지도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하기 힘들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휴머니티 수치가 낮아질수록 뱀파이어는 점점 더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외롭고 고통스러워지겠지.


4. 퇴락

그렇기에 휴머니티 수치는 서사적으로도 캐릭터의 변질 정도를 나타내주는 동시에, 게임적으로도 꽤 신경써서 관리해야 할 중요한 패러미터가 된다. 그러면 휴머니티 수치는 어떻게 해야 떨어질까? 간단하다. 죄책감을 느끼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나쁜 짓"을 하면 떨어진다. 이 "나쁜 짓"의 정도는 현재 휴머니티 수치에 따라 달라진다. 휴머니티 10점인 뱀파이어는 이기적인 생각만 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그래서 휴머니티 10점짜리 뱀파이어는 거의 볼 일이 없다). 하지만 일반인 수준인 7~6점이면 절도나 우발적 폭행 정도는 해야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싸이코 수준인 3점까지 떨어지면 적어도 계획살인은 해야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따라서 휴머니티 수치는 높을 때는 쉽게 떨어지고, 낮을 때는 잘 안 떨어진다. 간혹 "제 캐릭터는 워낙 쿨하고 시크해서 휴머니티 6점이지만 살인하고도 흔들리지 않아요"하는 새끼들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WoD에서는 그런 건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 휴머니티면 살인을 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이 든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나쁜 짓"을 했다고 마스터가 그냥 PC 시트 뺏어서 휴머니티 수치를 지워버리는 건 아니다. 대신 마스터는 PC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상황에서 표준 난이도 8(마스터 판단에 따라 변동 가능)로 양심을 굴리게 시킨다. 양심이 뭐냐고? 시트에 보면 하단 우측에 큰 글씨로 Conscience라고 써진 부분이 있다. 그 수치 만큼의 10면체 주사위를 굴리고, 8 이상의 눈이 나온 주사위가 있나 없나를 보는 거다. 이렇게 PC의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질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양심 굴림을 하는 판정을 퇴락(degeneration) 판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퇴락 판정할 때는 의지력 소모해서 자동 성공수 못낸다. 그냥 주사위를 믿고 굴려야 한다.


 만약 성공수가 하나라도 나오면 PC는 깊은 후회를 느끼고 반성을 하든, 자기가 그런 짓을 저질러야만 했던 타당한 이유를 찾아 합리화를 하든, 지금까지의 도덕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쉽게 얘기하면 "속죄를 하든 정당화를 하든 지금의 도덕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흔한 거 있잖아. "비록 내가 피가 고파서 의도치 않게 야근 끝나고 퇴근하던 홀아비를 붙잡고 피를 너무 많이 빨아먹어서 죽였지만, 나는 이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정체는 드러내지 않은 채 홀로 남은 희생자의 딸 아이의 생활과 학업 후원을 책임지기로 했다"라거나. "먼저 안 죽였으면 이 새끼가 날 죽였을 거야" 등.


 그런데 만약 성공수가 안 나오면? 판정은 실패하고 휴머니티 수치가 1점 떨어진다. PC는 지금까지 "이 정도는 지키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던 부분 중 일부를 포기한다. 자기가 피에 미친 괴물이 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냥 이렇게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괴물인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괜찮지만 퇴락이 오랜 세월 반복되다보면 점점 인간적인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비스트만 강해진다.


 만약 대실패가 나오면? 휴머니티와 양심이 각각 1점씩 떨어지고, 덤으로 정신병까지 얻는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와 자신의 괴물된 본성에 의한 충격이 너무 커서 맛이 크게 간 거다.


5. RP의 강제

이상을 보면 알겠지만 휴머니티라는 건 결국 RP를 강제하는 장치다. 좆같이 굴면 퇴락 판정을 하고, 성공하면 후회하거나 애써 정당화하는 RP를 해야한다. 실패하면 흥분 속에서 혼란에 빠지고 무규범한 악한이 되어가는 과정을 RP해야 한다. 휴머니티 수치가 떨어지면 PC는 감정적으로 말라붙은 냉담한 언데드 괴물이 되어야 한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짜증스러운 제약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디시플린 막 써서 사람 죽이고 강간하는 선언하고 싶은데 왜 후회하라고 해요?" 뭐... 답은 간단하다. WoD 뱀파이어는 PC가 자기 통제권을 두고 마음만은 인간으로 남느냐, 정진정명 괴물이 되느냐를 내적으로 줄다리기 하는 내용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면 힘을 쓰지 말라고 하면서 왜 힘을 줬냐고? 힘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 반대로 WoD 뱀파이어는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주 강제로 제시한다. 다만 지금 힘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힘을 쓴 대가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오는 딜레마까지 다루라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지닌 힘은 괴물의 힘이다. 그리고 만약 괴물의 힘은 의도치 않게 PC의 가족과 친구와 애인에게 투사될 수 있고, 지금까지 세심하게 쌓아올린 사회적 위신과 재산까지 한 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물론 브루하 클랜이 가장 이 주제에 어울리는 애들이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뱀파이어가 다 그렇다.


 그렇다고 WoD 뱀파이어가 "착하게 안 살면 좆되니까 착하게 살아 시발놈들아"라는 권선징악적인 내용은 아니다. 왜냐면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착하게 살기가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지 않으면 미치는 괴물들이 퍽이나 착하게 살 수 있겠다. 뱀파이어는 자기 정체를 숨기고, 인간을 속이고, 조종하고, 이용하고, 해치며 사는 괴물들이다. 그렇기에 플레이 중에 도덕군자인 척 하며 휴머니티 수치를 올릴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착하게 살기 힘들다고 아예 포기해버리면 완전히 괴물이 된다. 그러면 그나마 남은 것들도 모조리 잃어버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부 트릴로지가 이 주제를 비슷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마이클 콜레오네도 비록 가족을 위해서라고 해도 극악무도한 범죄를 일삼다보니, 결국 지나치게 냉혹무비한 자가 되서 자기 가족과 친구마저 죽이게 됐잖아? WoD 뱀파이어는 PC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야기한 결과로부터 태연할 수는 없고, 지속적인 고통과 위협을 받게 된다는 데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RP 강제가 보편적으로 얼마나 재미를 줄 수 있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WoD에서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정해진 틀일 뿐이다. 그 후 앞서 제시된 딜레마에서 어떤 종류의 이야기와 결말을 만드냐는 팀의 취향 문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나 드라큘라: 디 언톨드 레전드 마냥, 딜레마에 찌질대다가도 결국에는 선택을 내리고 다 불지르고 패 죽이는 이야기도 얼마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도 PC가 감당하거나,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수용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