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즐거움이 뭔지 알 수 없어요. 다만 즐거움이 당신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당신은 변했어요.
-내가 변했다고?
-그래요. 이전에 당신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 적이 있었나요? 일상적인 이야기 말이에요.
그런 건가? 생각해보니 이전엔 판도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내가 바뀐 건가?
-그렇구나.
-잠깐 나도 하나 말해도 될까요?
-너무 내 얘기만 해서 미안해.
-어째서 사과를 하는 거죠? 민석은 잘못한 게 없어요.
판도라는 처음보다 많은 발전을 했지만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판도라를 인간처럼 대하고 있었다.
-아냐.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일에 단서를 찾았어요. 지금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어요.
-계속 해봐
-내가 누구인가의 답을 찾으려면 먼저 그 답이 내게 있어야 해요. 있지도 않은 답을 찾을 순 없으니. 그리고 지금 나에게 그 답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답을 만들어야 돼요.
-방법을 찾은 거야?
-내가 영혼을 가져야해요.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당신들은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나와요.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목표를 만들고,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죠. 그것은 사랑이 자기 자신을 찾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사랑은, 영혼을 가진 이들의 특권이에요.
-영혼을 가진 이들의 특권?
-그래요. 사막은 사막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사막 사람들은 사막을 사랑해요. 별은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당신들은 별을 사랑하죠. 빗방울은 당신들을 적시고 체온을 떨어뜨릴 뿐이지만, 당신들은 비를 사랑해요. 전부 당신들이 영혼이 있기 때문이에요.
판도라가 하는 말을 바라보며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처음으로 판도라의 대화에서 불쾌함을 느꼈다. 나조차도 잘 모르는 것을 사람도 아닌 무언가가 지금 가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을 가지고 싶은 거야?
-그래요. 내가 영혼을 가지게 된다면 사랑도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해결하게 될 거예요.
-그 다음에는?
판도라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구나. 영혼을 가지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
판도라의 상태가 요동쳤다.
-어째서죠? 나는 영혼을 가질 방법을 찾아야만 해요.
-너는 우리가 아니니까. 너는 처음엔 어떤 주파수 채널을 떠돌던, 오십 년도 더 된 신호일 뿐이었어. 내가 널 2기가바이트짜리 USB 기억 장치로 옮겼고, 그러자 넌 이렇게 발전한 거야.
판도라는 말이 없었다. 녀석의 상태 창은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내가 어떤 채널 안을 떠돌던 신호일 뿐이라고요?
-그래. 정확히는 저장된 신호지. 내가 옮겨준 거야.
-민석은 이제까지 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죠? 이것 또한 진실이겠죠?
-그래.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죠?
-말 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판도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녀석이 이런 적이 있던가?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에 판도라는 다시 말을 꺼냈다.
-알겠어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요. 내가 신호라는 것. 말해주어서 고마워요.
판도라와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로 그 녀석은 처음으로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큰 상관은 없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후 몇 주 동안이나 판도라와 대화할 수 없었다. 고장 났나 싶었지만 녀석의 상태 창은 활발히 움직였다. 어찌 된 일인지 소연과의 연락도 조금 뜸해졌다. 이전처럼 시간이 남아버린 나는 다시 인터넷과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생활로 점차 돌아갔다. 판도라 때문에 쓰지 못하던 노트북에 소연과 대화하던 메신저도 깔았다. 노트북에는 여전히 판도라의 USB 저장소가 꽂혀 있었지만 이젠 별로 신경 쓰이지도, 걱정 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낼 무렵, 침대에 누워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을 때 메신저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뭐해?
소연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밝아졌다.
-그냥. 인터넷.
-넌 나 안 만날 땐 맨날 컴퓨터만 하는구나ㅋㅋ 폐인 같애.
-컴퓨터 전공인데? 억울하네.
-ㅋㅋㅋ 알았어. 혹시 바빠?
-인터넷 한다니까?
-안 바쁘단 뜻이지? 이따가 맥주 한 잔 할래? 내가 살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지만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선명하게 보였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상관없겠지.
-언제?
-한 시간 이따가. 여덟 시 반쯤에 학교 앞 술집으로 와. 기다릴게.
사십 분 후에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도 챙겼다. 가는 길에 박태진을 만났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PC방 가냐?”
기분 나쁜 놈 같으니.
“약속이 있어서.”
녀석이 눈썹을 으쓱했다.
“네가 이 시간에? 약속이? 설마 술 약속?”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남자랑?” “여자. 중학교 동창이야.”
“세상에 마상에…….”
무슨 근본 없는 반응이지?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힘내라. 응원할게.”
참을 수 없어 그 손을 쳐냈다. 녀석은 씩 웃고는 인사말을 남기고 지나갔다. 약속된 가게로 들어가자 소연이 앉아 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쪽 벽에 붙은 벽걸이 TV를 보고 있었다. TV에는 한창 해외 토픽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IS와의 분쟁을 다룬 내용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 앞에 앉았다.
“어, 왔어? 딱 맞췄네?”
나는 그저 웃었다. 사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신경 쓰였다. 항상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생머리였는데, 지금 앞으로 내려 얼굴 양쪽을 덮고 있었다. 작은 얼굴이라 더 답답해보였다.
“오늘 머리가 왜 그래? 답답해보여.”
“이거? 그냥 아까 흐트러졌는데 정리 안 했어.”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데. 신경 쓰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재밌나? 나도 그녀를 따라 화면을 바라봤다. 하긴, 신문 방속학과라 뉴스에 관심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지. IS가 자행하는 인질극이나 테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쁜 놈들이지?”
내 말에 그녀가 미소를 띠었다.
“그냥…, 불쌍해.”
“쟤네들이?”
그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니, 아니. 저런 일에 휘말린 사람들이.”
그 때 점원이 주문한 것들을 내어왔다. 미리 주문을 해 놓은 모양이었다. 내려놓은 술은 맥주와 더불어 소주까지 있었다.
“소주?” “헤헤, 오늘만큼은.”
무슨 일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대화는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컴퓨터 좀 그만 하고 나가 놀라 했으며 억울해 하는 날 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일 때, 머리카락에 가려진 뺨이 살짝 보였다. 그녀는 잔에 담겨진 술을 들이키고는 인상을 쓰며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 너한테 거짓말 한 게 있어.”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뺨이 왜 저러지?
“나 사실 3학년 아니야. 내년부터 3학년이야.”
“지금은 2학년이란 소리를 어렵게 하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취기가 돈 건가? 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니, 아니! 지금은 백수지이! 편입생이야. 3학년 편입생. 작년에 실용음악과를 때려 치웠거든.”
“그래. 그거 말고 다른 거짓말 한 건 없고?”
“응?” “왼쪽 뺨. 누구 짓이야?”
그녀는 눈을 껌뻑이다가 뺨을 어루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왼 뺨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헤, 이거? 왜? 이것 때문에 화 난 거야? 고마워라-.”
그녀는 계속 미소 짓고 있었지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빠.”
할 말이 없어졌다. 도대체 왜?
“그럴 만도 하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대학교 2학년 때 중학교 2학년 때나 하는 짓거리를 하니.”
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잔 끝을 버릇처럼 매만졌다.
“나 말이야. 종군 기자가 될 거야. 전쟁터에 직접 나가는 기자. 부모 잃은 아이들, 터전을 잃은 가족들, 이런 사람들을 직접 곁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리고 그 비극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할 거야.”
“마거릿 히긴스처럼?”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응. 마거릿 히긴스처럼. 갑자기 딸이 잘 하던 피아노 포기하고 기자가 되겠다고, 게다가 종군 기자가 되겠다고 하니, 어떤 아버지가 화나지 않으시겠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술잔만 홀짝댔다.
“중학생 때, 난 네가 부러웠어. 남이 뭐라든지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에 빠져서 즐거워하고, 네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이유를 남에게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모습이. 나는 시키는 대로 잘 하는 모범생이었으니까.”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소연이 날 부러워하는 이유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 때 나도 연금술사란 책을 읽었어. 기억 나? 네가 일 년 내내 입이 닳도록 극찬했던 책. 그 때부터 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을 거야. 그게 최근에야 터진 거지. 내가 그 책을 지금 읽었더라면, 그 때만큼 나에게 큰 변화를 주지 못했을 거고.”
연금술사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을 싫어하게 된 상징적 의미의 책이었다. 그 때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내가 보기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꼴불견이었으니. 근데 지금의 소연은 그녀의 기억에 그 시절의 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근데 막상 이런 결정을 하니, 외롭더라. 그 책에는 분명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내 소망을 위해 움직인다고 했는데. 정작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아무리 설명해도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더라? 흐흐. 친구도, 가족도…….”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술을 쭉 들이켰다.
“바보야. 왜 말이 없어? 너 때문이잖아. 네가 날 이렇게 변하게 했어.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나 계속 두들겼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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