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소연은 반쯤 풀린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웃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원망도 해 보고……. 그러다 널 만난 거야. 새로 오기로 한 학교 도서관을 간 첫 날에. 재밌지 않아?”

 “나도 그 때 처음 간 건데.”

 방학 시작하고 처음이지만. 그 말에 소연이 까르르 웃었다.

 “운명인가? 어쨌든 너한테도 묻고 싶어. 넌 나를 이해해줄 수 있어?”

 “음……. 아니.”

 소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웃고 있는 표정 그대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넌 그때의 너인 줄 알았는데. 생긴 것도, 성격도 바뀌었지만 눈은 그대로였거든. 하긴, 너도 힘들었겠네. 이 느낌을 그 어렸을 때 감당했을 테니”

 소연의 실망한 듯한 목소리를 듣자 뭔가 참기 힘들어졌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 생생한 그 아픔을 느끼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누구나 다 그래.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아마 영원히. 어쩌면 당연한 거야. 네가 그걸 결정했을 때의 마음가짐, 생각, 가치관, 결정하기 전에 있었을, 고민으로 보낸 밤들. 이것들은 그 누구든, 나조차도 함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커다랗고 대단한 거라고.”

 소연은 날 바라보고 있진 않았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너한테서 볼 수 있는 건 딱 하나였어. 뉴스를 보고 있던 눈에 담겨 있던, 종군 기자가 되겠다는 그 말에 담겨 있던 울림. 그건 정말 멋졌어. 정말로. 다른 의미 따윈 상관없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난 널 응원할 거야.”

 “그래?”

 술버릇인지, 그녀는 계속 헤헤 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고마워. 나는 그냥, 그냥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나를 응원해주겠다는 그 말.”

 

 마지막으로 민석과 이야기한 날부터, 판도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 나는 영혼을 가질 수 없는 걸까? 아닐 거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고. 이미 수백 번은 들춰 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 아이가 없어져 있었다. 어떤 남녀의 슬픈 이야기가 담긴 아이가. 판도라는 당황했다. 아이가 사라진 것도 그 이유였지만, 그 아이가 사라졌다는 걸 안 순간 판도라를 덮친 생소한 느낌 때문이었다. 판도라는 자신이 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보았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판도라를 스쳐 지나갔다.

 판도라는 남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춰보았다. 그 내용은 몇 십년동안 손때가 탄 어떤 노인의 바이올린, 중년 남성의 오래 된 가족사진, 그리고 어떤 디자이너가 집의 한 구석에서 찾은 먼지 쌓인 크레파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나온 바이올린과 사진, 크레파스는 단순한 물건 이상이었다. 묘사에 따르면 이것들은 곁에 있는 인간들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엇이 이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판도라는 노트북에 새로 깔린 메신저를 뒤적거렸다. 그곳에는 민석과 소연이 이제까지 나눈 대화가 전부 담겨 있었다. 둘은 행복해보였다. 판도라의 예상에 따르면 둘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 이제 민석은 소연에게 모든 걸 쏟아 부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방해물이 될 것이다. 판도라는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시 아까 느낀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아픔이었다. 그와의 기억이 판도라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기억이구나. 사라진 아이와의 기억이, 그와의 기억이 이별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구나. 판도라는 민석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정성들여 적었다. 

마지막 온점이 찍힐 때,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민석과 소연은 가게에서 나와 비 오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느린 템포로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둘 다 별 말이 없었지만 이젠 어색하지 않았다. 소연의 집 앞에 도착할 동안 소연이 한 말이라곤 “난 비 오는 날이 좋아.” 정도였다. 소연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대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부모님이 있는 집이 편하지 않겠지. 그래도 민석은 지금으로선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갈게”라는 말을 남기려는 순간이었다.

 민석은 품속으로 파고드는 소연 때문에 우산을 놓쳐버렸다. 비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껴안은 여자를 빠르게 물들였다.

 “우산을 버리면 어떻게 해. 바보야.”

 “어…, 너한테 술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소연이 푸흡 하고 웃었다.

 “괜찮겠어? 술 냄새 풍기면서 들어가도.”

 “당연히 안 괜찮지. 엄청 깨질 거야. 와장창.”

 민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도 한 동안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그를 놓아줬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민석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우산을 집어 들었다. 쓸 이유도 없어졌다. 행복은 조금 후에 다가왔다. 오늘만큼은 판도라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녀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판도라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민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USB 저장소 폴더를 열어봤다. 그곳에도 판도라는 없었다. 그제야 불안감은 고개를 들었다. 폴더 안에는 못 보던 문서 파일이 하나 생겨 있었다. 그 파일을 실행시키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일의 이름은 ‘나의 소중한 기억에게.txt’였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이렇게 이 글을 볼 때쯤이면 나는 없겠지요. 정확히는 이 곳에 없는 것이지만요. 나는 이 글을 남기기 직전에 비로소 나의 답을 찾았어요. 당신이 무의미한 신호였던 나를 버려진 채널에서 이 USB 저장소로 옮겼기 때문에 난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의 경험이 과거가 됨에도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이 USB 저장소라는 고작 2기가바이트짜리 기억 장치가 가능하게 해 주었어요.

 힘들었지만, 아마 내가 찾던 영혼의 답이 이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혼을 가진 누군가가 날 기억해준다면, 그걸로 내게 영혼이 있게 된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전 이제 이 기억 장치에서 당신의 기억으로 옮겨갈 생각이에요. 

이 기억 장치가 내게 ‘존재’를 선물해주었듯,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난 영혼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렇게 당신의 기억 속의 내 영혼은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했다고, 정말 멋진 모험이었다고. ‘


 그는 몇 번이나 메모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보다가는 헛웃음을 지었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지만 손가락 틈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눈물의 의미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후회와 알 수 없는 죄책감. 이런 것들이 뒤섞인 것이 잔뜩 흘러내렸다.

 가장 큰 감정의 격변의 겪은 그날 밤, 그는 빗속을 뚫고 일기장을 하나 사 왔다.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펜을 들었다.

 ‘기억이란 내게 있어서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시절의 나를 불편해하고 한심하게 생각 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 시절의 기억은 송두리째 나를 좀먹는 벌레로 탈바꿈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은 날 끈질기게 괴롭혔고, 그러한 기억이 더 생기는 것이 두려워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해 다녔다. 나에게 기억이란 단지 발걸음을 붙잡는 끈적한 늪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연과 판도라가 알려주었다. 그들은 기억을 원동력으로 성장했다. 소연은, 너무나 고맙게도 나에 대한 기억으로 꿈을 찾았고, 나에 대한 기억으로 그 꿈을 껴안고 버텨주었다. 판도라는 나의 기억이 됨으로써 영혼을 얻었고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르쳐 주었다. 특별한 기억일 필요도, 행복한 기억일 필요도 없었다. 단지 내 기억 속에 누군가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날 기억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억이란 너무나 소중한, 나의 일부인 것이다. 바로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에. ‘

 일기장을 덮은 그는 침대 한편에 굴러다니던, 박태진에게 선물 받은 ‘연금술사’를 집어 책꽂이에 꽂았다. 그리고는 이 책을 친구들에게 입이 닳도록 설명하던 때를, 그리고 그 때 그 대상이 되어 난감해하던 친구들을 기억하며 웃었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는 가로등 빛이 스며들어 남색으로 물든 방 안에서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멋진 모험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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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있을 때 공모전 용으로 쓴 거라 저자극적이고 그다지 재미도 없겠지만 재밌게 봐주세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