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 4판은 흔히 도는 이야기들 만큼 나쁜 규칙은 아니다. 나도 4판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4판에 대한 비판 중 많은 부분은 결국 AD&D부터 3.X판까지 지속되던 'd20을 이용한 현실 모사'라는 방향성에서 너무 크게 선회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화충격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게임 구조적으로 보면 4판은 상당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물론 4판이 WoW처럼 너무나 틀에 박힌 게임 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점이라기 보다는 특징이었다. 4판에서 기본적인 전투 규칙에 대한 직관적 이해는 전작들에 비해 훨씬 쉬웠었고, 최소한의 재미도 더욱 쉽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4판은 RPG에서 전투만으로 재미를 주는 규칙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4판이 문제가 없던 건 아니다. 문제도 많았다. 나는 특히 큰 문제를 두 가지로 꼽는다: 전투 외 게임 진행에 대한 규칙 미흡, 그리고 DM에게 집중되는 게임 기획 부담.
이 중 전자에 대한 방안으로 4판에서는 소위 기술 도전(Skill Challenge)이라고 하는 방식이 제시됐었다. 기술 도전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속되는 라운드제 기술 판정에서 X 번의 실패 회수가 쌓이기 전에 Y 번 이상의 성공 회수를 쌓을 것 - 실패할 경우 진행이 막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중요 전투에서 불이익이 부과됨]이라는 개념이었다. 다만 정작 4판 규칙서에는 기술 도전을 설계하는 데 매우 애매모호한 지침만 제시됐다. 물론 기획능력이 뛰어나거나 경험이 많은 DM은 나름대로 기술 도전으로도 유의미한 게임 과정을 만들 수도 있었다(예시: 제르디온의 수성전을 복합 기술 도전으로 구성한 조우; http://cafe.naver.com/trpgdnd/10318). 하지만 좋은 규칙이라는 것은 책만 봐도 개념이 잡히고 실제로도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진 물건 아니던가? 실전에서 기술 도전을 전투와 전투 사이에 그럴 듯하게 끼워넣으면서도 그 과정을 게임 규칙으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제시해서 판정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술 도전은 구현의 구체성에 있어서 미흡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기초적인 예시 기술 도전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공식 시나리오에 나오는 기술 도전이다.
[터널에서 길을 잃다: LV17 기술 도전(XP 1,600)]
설명: 당신들이 걷고 있는 으스스한 터널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있다. 어떤 터널은 건조하지만, 다른 터널을 따라서는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으며, 또 다른 터널은 아예 침수되어있기도 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걸은 후에야 당신들은 더 이상 스스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PC들은 이 혼란스럽게 엉키고 일부는 침수되기까지 한 터널들의 망 속에서 길을 찾아야만 한다. PC들은 각 PC들은 Dungeoneering이나 Perception 판정을 한 시간에 한 번 시도할 수 있다. 또한 한 시간에 한 번씩 Endurance 판정을 해야만 한다.
난이도: 3(3개의 실패 회수가 누적되기 전에 8번의 성공 회수를 누적할 것)
주요 기술: Dungeoneering, Endurance, Perception
승리: PC들은 사고 없이 터널을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패배: 성공 회수를 한 번도 누적하지 못한 채 패배할 경우, PC들은 세 마리의 아볼레스 거대괴수들에게 습격 당한 후 다시 기술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실패할 경우 PC들은 아볼레스 알 주머니(egg cyst)가 위치한 동굴로 진입하게 된다.
● Dungeoneering DC 25(최대 3개까지의 성공 회수 누적 가능, 일반 행동으로 시도):
판정에 성공할 경우 PC는 터널 암반에 묻은 점액질이 특별히 두터운 곳들을 확인해낸다. 이것은 잠들지 않고 활동 중인 아볼레스가 남기고 간 흔적이다. PC는 이 흔적을 피해 괴물이 없을 만한 터널로 일행을 인도한다.
● Endurance DC 25(최대 2개까지의 성공 회수 누적 가능, 일반 행동으로 시도):
이 터널의 추위는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몇 가지 준비를 통해 터널의 축축한 습기와 한기를 막아낼 수도 있다. 최소한 두 캐릭터는 매 시간마다 동굴의 쇠약하게 만드는 한기로부터 나머지 일행을 보호해주어야만 한다. 만약 실패할 경우 기술 도전에서 실패 회수가 한 번 누적되는 것에 더해서 모든 캐릭터가 1개씩의 healing surge를 잃는다.
● Perception DC 25(최대 3개까지의 성공 회수 누적 가능, 일반 행동으로 시도):
PC는 다른 터널로 이어지는 사소한 흔적이나 징후들을 포착해서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 덕분에 PC는 터널을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오거나 막다른 길을 도달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보면 알겠지만 상황에 따라 스토리텔링을 해주고, 이 기술 도전의 목적, 성공시 이득(이 경우에는 없다), 실패시 손해를 이야기해준 후, 어떤 식으로 기술 도전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런데 해보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술들이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 성공시에는 뭐가 주어지고 실패시에는 어떤 위험이 추가로 부담되는지 매회 짜둔다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드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저러하니 일행이 여차저차한 타개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너희는 가진 기술들을 이러저러하게 사용해야 해"라는 것을 DM이 매회 최소 하나씩은 짜와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구조만 짜면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구조 자체는 그냥 연속적으로 기술 판정을 굴리는 것에 불과하므로, DM은 주어진 상황에서 이 판정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판정 결과 PC들이 처한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연출해줘야 했다. 연출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냥 패널티 피하기 위해 굴리라는 거 굴리는 게 전부인 규칙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4판에서의 전투는 꽤나 큰 전술성을 요구했다. 옛날 판본들이야 악명이 높은 Save or Die식의 기술을 구사하는 괴물들이 많았고, 특히 저레벨에서는 턱 하면 억 하고 죽어버릴 정도로 캐릭터들이 종이장 맷집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4판에서는 주사위 판정 한 번에 PC가 무력화되고 플레이어는 손가락만 빠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즉사기 및 무력화 기술의 등장 빈도를 예전에 비해 많이 줄였다. 이는 4판에서는 한 방 한 방이 살떨리던 예전 판본들 방식의 전투를 재연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신에 4판의 전투는 캐릭터들(아군이든 적이든) 사이의 유기적 합동을 통해서만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소위 이야기하는 전술적 게임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은 플레이어들에게도 더 많은 대화와 합의를 요구했지만, DM에게는 더욱 큰 조우 설계의 부담을 주었다. PC들이 서로 역할군에 따라 합동하는 것처럼, 괴물들도 여러 마리가 나와서 역할군에 따라 합동을 해서 PC들을 압박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4판 DM은 여러 괴물들이 각자 다른 능력들도 서로의 결점을 상호보완해 싸우는 전투를 한 회에 보통 두 개씩은 기획해야 했다. 이는 DM에게 더 많은 데이터 마이닝을 요구했고, 더 많은 차회 준비 시간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부담은 분명히 점차 4판 DM 역할이 기피되게 할 만한 문제였다.
기술 도전 보니까 좀 전에 먹은 다이제가 올라오려고 해
스챌은 지원이 정말 너무 부실했어...
스킬 챌린지의 경우엔 좀 애매한 것이, 사실 스킬 챌린지가 '이렇게 제시되는데 막상 쓰기가 애매하다'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이전 판본들과 비교해서 4판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보거든. 그러니까 명중굴림이 아니라 스킬 판정을 이용하는 인카운터를 만들려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함
몬스터 간의 유기적 전투는... 부담이긴 하지만, 몬매에 몬스터마다 달린 행동 가이드와 샘플 인카운터로 지원은 충실했다고 생각함
그래서 단점이었다고 하긴 좀 그렇고 그냥 되게 아쉬운 부분이라고 느꼈음. 전투 상황을 재미있게 만들기 어려웠던 건 좀 심각한 문제였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쉬운 점은 '야 이거 전투에서 써먹기 힘든데 걍 다 리추얼로 빼자'였던 것 같음
4판 후기에는 내가 관심을 끊어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사이더 시스템이 정착한 중기 시점에서 기술 도전은 아예 쓰이지 않거나, 전투와 병행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투와 병행되는 방식은 아주 괜찮았다. 그러나 DM 입장에서는 머리를 두 배로 쥐어짜야 했으므로 결국 DM을 갈아넣는 규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술 도전이 이전 판본들이랑 비슷하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많이 달라진 게 있다고 생각함. 예전 판본들은 그나마 기술 도전이라는 구조적 틀이 없어서 선언이 4판보다는 자유로웠지. 주문이나 여러 소도구들을 사용해서 상황을 타개하기도 하고. 그런데 4판부터는 전투 외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들의 폭이 대폭 줄어들고, 판정도 기술 도전이라는 틀 안에서 시켜서 선택지가 지나치게 제한된다는 느낌이 강했음.
괴물들은 물론 예제가 꽤 있기는 했는데. 기본적으로 짜인 구성을 안 쓰면 예전에 비하면 커스터마이즈 규칙이 사라지면서 결국 인사이더 졸라 뒤지면서 특정 능력들 가진 거 찾아야 하는 부담이 좀 있었음. 결국 그래서 우리 팀에서도 한 명이 인사이더 결제해서 돌려썼었지.
ㅇㅇ 모든 클래스를 규격화하는 과정에서 그 틀에 맞추기 어려운 애들(결국 캐스터들)의 특성을 깎아냄 -> 전투 자원과 별도로 존재하는 리추얼 제작 + 비전투 상황을 스킬 챌린지로 처리하려고 시도함 -> 비전투 상황이 더더욱 한정화됨 의 코스를 밟아간 게 아닐까 싶음. 그리고 에센셜에 대한 반 같은 거 보면 '사람들은 불평등한 거 좋아해'라는 걸 알 수 있고
반 같은 거 -> 반응 같은 거
하지만 그런 거랑 별개로 전투는 상당히 재미있었음. 난 움버 헐크를 참 좋아했는데...
전투 관련해서는 불만이 둘... 패치 너무 잦아서 짜증났던 거랑 솔로 몬스터와의 싸움이 매번 시시했던 거..
음. 확실히 에라타..도 아니고 거의 패치였지. 패치 너무 많아서 룰북이 다 쓰레기화하고 인사이더 써야했던 건 정말 불만이었음. 나도 솔로보다는 적당히 미니언+노말+엘리트 섞는 걸 선호했는데, 미니언+솔로+기술 도전도 의외로 재밌긴 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