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RPG 디앤디는 워게임에서 탄생했음. 당연히 전투에 관련해 성공/실패를 가리는 룰을 갖고 왔고, 이게 게임 상의 확률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 속 세계"를 모사하는 역할도 갖게 되었지. 이후는 전투 외의 부분에도 능력치 판정이나 기능 판정 식으로 성공/실패를 도입하게 된 거고. 이렇게 판정 룰은 플레이 속 세계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캐릭터 간의 능력 차이를 반영하는 도구가 되었음. (이런 점에서 난 무룰 플레이는 좀 아니라고 봐)


근데 문제는 전투 외 장면의 행동 판정은 실패하면 진행이 막히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 이런 경우에, 고전적 마스터링(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에선 다른 방식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 시도하게 해서 어떻게든 성공을 만들게 했음. 결정적 단서를 못 얻었으면, 다른 장소나 NPC를 통해 얻게 한다든가. 아예 마스터가 NPC 동원해서 강제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정말 성공/실패를 가려야할 때가 아니면 판정을 시키면 안된다는 얘기가 나왔지. 진행상 꼭 성공을 해야할 상황이면 그냥 패스시키란 거야. (일부 입장에선 어떤 때는 룰을 쓰고 어떤 때는 안쓰니 일관성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음) 이게 발전해서 인디 RPG 쪽에선, 아예 극적인 전개상 중요한 것만 "갈등"으로 처리해서 승부를 보고, 나머지는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대로 넘기자...고 하게 됐지. 포도원의 파수견의 Say yes or Roll dice가 이 말임.


이런 식으로 판정의 의미가 원래 "플레이 속 세계를 모사하는 것"에서 "극적인 흐름의 분기/변화를 만드는 것"으로 바뀌게 됐음. 즉 TRPG에서 판정은 RPG를 게임으로 만들거나 현실의 시뮬레이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플레이 진행 가운데 변수를 넣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거야. 이런 관점에서 판정을 보면, 판정 자체가 현실을 세세하게 모사하는 것보다, 그에 따라 이후의 전개가 어떻게 달라지냐가 더 중요해짐. '실패해도 전진하라'는 판정 결과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전개를 만드는데 쓰라는 얘기야. 그래서 "문을 부수는데 실패했어요? 그럼 문 뒤의 오우거가 갑자기 뛰쳐나와 기습해요!"가 가능한 거고.


기존의 모사주의 입장에서 보면, 문 부수는 판정에 실패했는데 없던 오우거가 생겨난다고 어색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조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논리를 지어낼 수 있음. 원래부터 문 뒤에 괴물들이 잠복하고 있었고, 문을 부수는데 성공하면 PC들이 기습에 성공했겠지만, 전사가 한번에 못 부수고 삽질을 하면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적들이 그 기회를 이용해 기습을 해온 거라든가... 게임주의 방식에선 이걸 일일히 미리 생각해서 짜야하지만, 서사주의 방식에선 그냥 판정 성공/실패를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런 전개를 만들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든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니까 진행이 막힐 이유가 없고.


여튼 내가 볼 때 TRPG 룰의 판정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변화해왔다고 보지만...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각 팀의 취향과 선택이고.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되겠음.



@ 이런 AWE식 전개에서 계속 떡밥이 풀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결하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탁상예능] 몽테님의 던전월드 강좌를 빌자면, "모아서 터뜨리면 된다"는 답도 있었음. [고대해!] 같은 룰은 소동 레벨을 올려서 해결을 유도하는 식인 듯 하고... 플레이어들도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되지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