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놓고 말해서 WoD 뱀파이어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두 부류 중 하나다. 배후에서 뛰어난 정신지배술과 무한한 수명으로 인간세계를 조종하는 흑막정치물. 혹은 막강한 신체기능과 초자연적 힘으로 무장한 헬싱이나 월야환담류. 나도 처음 WoD 시작했을 때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도 그럴 게 WoD 내에서 어느 정도 그런 거 하라고 부추기고 뽕넣는 경향도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정치물이나 액션 활극'만' 하기에는 한계가 크다. 그 한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미덕(Virtues) 관련 판정들이다.
뱀파이어 시트를 보면 하단에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항목이 있다. 미덕이라고 쓰인 부분이랑, 그 아래 휴머니티라고 쓰인 부분. 이 중 휴머니티는 전에 쓴 글이 있으니까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문제는 미덕이다. 휴머니티 수치가 "아직 얘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인간에 가까운가"를 나타내는 척도라면, 미덕은 뱀파이어가 문제상황에서도 얼마나 제정신을 차리고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지다. 미덕은 모두 세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다. 양심(Conscience), 자제력(Self-Control), 용기(Courage). 이 패러미터들 또한 기본 능력치(Attributes)와 마찬가지로 1점에서 5점 사이로 존재한다. 이 중에 양심은 캐릭터가 얼마나 도덕적인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자제력은 얼마나 본성적 유혹에 굴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용기는 캐릭터고 겁에 질릴 만한 상황에서도 얼마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미덕 판정이라 하는 것은 이 세 개의 항목들이 사용되는 판정들이다. 이 판정들을 언제 실행하는지는 마스터가 스토리에 따라 적절한 대목에서 요구한다. 다만 여기서는 양심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시스템적으로 양심은 뱀파이어가 도덕성을 발휘해야 하는 장면에서 판정이 요구된다. 내 캐릭터가 몰래 뒷골목에서 아리랑치기하고 기절한 사람 피를 조금 빨아먹고 있었는데, 재수가 옴이라도 붙었는지 지나가던 여자한테 우연히 들켰다. 당연히 쫓아가서 존나게 일단 두들겨 패서 붙잡고 봤다. 그런데 이 목격자 애가 목숨구걸하는 얘기를 조금 들어보니 얘도 사연이 기구하다. 아빠는 몇 해 전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 엄마는 혼자 가정을 지탱하겠답시고 공장노동 뛰다가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됐다. 근데 집에 또 입은 오지게 많아서 초등학생 동생만 세 명이나 있다. 그래서 얘는 엄마 병원비 대고 동생들 먹여살리겠다고 학교도 그만두고 하루 두 끼 육개장 큰사발만 먹으며 닥치는대로 일하다, 이제는 빚에 허덕인 끝에 다 포기하고 보도방 3차까지 뛰게 된 불쌍한 애였다.
그래도 얘를 그냥 "불쌍하네 이번 한 번만 봐준다"하고 넘어가줄 수가 없다. 얘를 그냥 풀어두면 뱀파이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인 "뱀파이어의 존재를 드러내지 말 것"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냥 보내줬다가 나중에 다른 뱀파이어한테 꼬리 잡히면 어떻게 되냐고? 장로들한테 쿠사리 먹는 건 기본이고, 유사시에는 약점 잡히고 아주 오랫동안 남들 따까리가 되거나, 내 영역을 몰수 당하거나,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운이 없으면 살해될 수도 있다. 정신지배를 통한 기억소거? 뭐 그런 거 쓸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정신지배술을 상당히 잘 쓸 수 있을 때의 얘기다. 정신지배술 못익힌 뱀파이어들은 애초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쓴다고 해도 실패하거나 나중에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도 존재하고. 그러니 대개는 불쌍하고 안타까워도 죽인다는 선택지를 취하게 된다. 그래도 얘가 살아서 이상한 얘기하는 것보다는, 보도방 아가씨가 야밤에 뒷골목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는 게 마스커레이드 보호에 더 나은 판단일 테니까.
하지만 그 사정을 눈 앞의 광경으로 다 알게 됐고, 이 불쌍한 애의 목숨이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린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을까? 아저씨 말 안 할테니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무릎 꿇고 손 싹싹 빌며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기껏해야 10대 후반인 어린 애를? 정작 그 상황에 처하면 갈등이 들 거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고뇌를 피할 수 없지. 그래도 죽였다. 내가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피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밤에만 돌아다니는 산송장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다. 나도 장로들 눈치 보면서 아무한테도 이 미칠 듯한 처지의 심정을 말 못하고 살았다. 내 목숨도 위태로운 마당에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여자 애를 목 졸라 죽이고 나서도, 자꾸 생각이 난다. 마스터는 이럴 때 표준 난이도 8로 양심 판정을 요구한다. 만약 양심이 3인 캐릭터면 10면체 세 개를 굴리고, 이 중 8 이상의 눈이 나온 주사위의 개수를 센다. 이 때 자동 성공수를 하나 확보해주는 의지력 점수는 사용할 수 없다. 즉 철저히 주사위 굴림만으로 결과를 내야한다. 만약 여기서 성공수가 하나라도 나온다면 캐릭터는 어떻게든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고, 대신 자기 죄값을 치를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자기 정체를 숨긴 채 유가족한테 돈을 보내준다거나. 하지만 실패하면 캐릭터는 서서히 인간 쓰레기가 되기 시작한다. 도덕적 규범 내에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지도 못한 채, 점점 더 무규범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만약에 운이 없다면 정신병이 생길 수도 있다.
이 얘기는 때때로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함부로 쿨하게 굴릴 수 없다는 뜻이 될 때도 한다. "저는 영애의 배를 단도로 가르고 내장을 꺼내서 먹어요." 같은 선언을 하면 일단 마스터가 받아줬다 치더라도 양심 판정을 해야하고, 그런 게 계속 반복하다보면 곧 게임 오버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방금 위에서는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꼭 변태적인 살인행위가 아니어도 양심 판정이 요구되는 방면은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를 명백히 속여서 함정에 빠뜨리거나, 배신하거나, 괴롭히거나, 착취하는 등.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악행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행위자인 자신에게 피드백이 되는가다. 뭐 따지고 보면 우리의 풍요로운 삶의 일부는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착취되는 사람들 덕분 아니겠어? 그런 눈에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것까지 일일이 따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어디까지나 내 행위로 인해 야기된 결과 중에서도 나한테 감정적으로 자극이 되는 게 양심 판정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기준이다.
그러면 이걸 왜 하냐고? 당연히 뱀파이어 이능액션 하고 싶거나, 뒤에서 남들 속여먹고 배신하고 이용하는 쌈마이한 정치물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규칙에 대해 납득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나 프랜시스 코폴라 드라큘라, 비잔티움 같은 뱀파이어 영화 보면 이런 드라마는 자주 나온다. 거기까지 안 가도 갱스터물에서도 자주 나온 구도잖아? 괴물의 고뇌와 내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드라마에 중점을 두고 하기로 했다면 양심 판정은 주어진 상황에서 흥미로운 전개 방향을 제시해준다. D&D에서는 전투가 중요하니까 극적인 명중이나 회피 등 전투활동에 대한 여러 판정 방식이 존재하지? WoD에서는 캐릭터 드라마 전개의 갈림길에서 판정을 통해 비슷한 재미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휴머니티 수치 및 다른 양심 항목 판정들과 함께 사용할 경우 이러한 캐릭터 드라마 전개의 긴장과 재미는 조금 더 배가될 수 있다. 어떤 느낌이냐면... 다키스트 던전에서 스트레스 차오르다 Affliction 터지는 캐릭터들을 RP하는 느낌이다. 물론 취향이 엄청 갈린다는 건 안다.
물론 그게 WoD 뱀파이어에서 액션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날 죽이겠다고 뛰어드는 놈을 막을 때도 양심 판정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WoD 뱀파이어는 여전히 생각보다 액션을 시원시원하게 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함부로 움직일라고 치면 nPC들이 지랄하는 건 둘째 치고 캐릭터 내면에서도 온갖 트러블이 올라온다.
이래도 할래..? 할 사람 없을 거 같지만 의외로 이런 방식의 드라마 전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본인이 생각할 때 이런 게 재밌겠다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뭐.
글 쓰니까 중간에 잘리던데. 일단 쓰고 나서 수정하니까 잘 올라가네.
모든 룰에 있어야 할 장치다
특이하네. nwod에서는 양심=인간성인데.
좋네요!
휴머니티는 높은데 미덕은 낮을 수 있나?
SJW??
휴머니티는 높은데 미덕은 낮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휴머니티는 낮은데 미덕은 높을 수도 있음.
겁스에서는 평화주의가 이걸 대체할 수 있을지도. 실제로 사실주의적인 캠페인에서는 평화주의를 반강제하니까.
참고로 양심 판정은 해당 캐릭터의 휴머니티 수치에 따라 판정 기준이 달라지고(휴머니티 1이 누구 좀 패고 괴롭힌 거 가지고 양심 판정 하지는 않음), 블러드 풀에 따라 보정치가 들어가기도 한다(피가 부족하면 제정신이 아니어서 양심 판정 주사위가 제한됨).
양심판정을 치르더라도 캐릭터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잔혹한 행동을 하는 전개가 떠오름. 원수의 심장을 빼서 씹은 다음에 '내가 아무리 원수라도 그런 짓을 하다니!' 하는 느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