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고어 있음)
사이퍼Cipher인 에이팍Apoc은 이제 막 디지털 웹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가 목 뒤에 꽂힌 뉴럴 넷 인터페이스 잭을 잡아뽑는다. 그의 거친 동작에 스파크가 일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잭을 정리한다. 그의 시선이 현실 세계에 맞는 인터페이스를 찾는 것 처럼 불안하게 여기 저기를 향하다가, 이내 웨더스 소령의 얼굴에 고정된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네."
그가 간결하게 대답하며 손에 들린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내려놓는다.
웨더스는 납득한다.
그가 놓친 사운드 엔지니어 네판디, 표트르가 사용했던 홀로그램을 역추적 하기 위해 바로 작업을 지시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 정도로 현실감 있는 홀로그램은 이미 증강현실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다. 홀로그램과 역장 프로젝터를 동기화 시켜 사용하여, 움직임에 따라 현실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홀로그램. 그것은 공식적으로 준간섭 증강 현실Quasi-intervention AR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지금 와서는 매우 생산이 어려운 데다가, 실질적인 쓸모는 별로 없기에 -기껏해야 지구 반대편에서 하는 회의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줄 뿐이었다- 사실상 단종된 상태. 오히려 소사이티 오브 에테르가 그것보다 훨씬 진보된 것으로 보이는 기술을 쓰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오곤 했다. 웨더스가 턱을 괸채 낡은 철제 의자에 앉는다.
이곳은 AP-25 아말감이 본거지로 쓰고 있는 컨스트럭트였다. 예산절감의 여파가 절실히 느껴지는 이곳은 한 유통업체의 중간 물류 지점으로 위장된 곳이었다. 몇년동안 감사반도 나오지 않았고 제대로된 지원도 없었기에 2000년 이전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 컨스트럭트 역시 자격 미달. 에이팍의 방에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혹사당한 넷 인터페이스, 수십가지의 통신기기, 드론, 나노머신 디셈블러 같은 값비싼 기기들이 기능을 잃은 채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작동하고 있는 기기들이 중요도 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쓸데 없이 각이 잡혀있는 방. 에이팍의 성격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방을 보며 웨더스는 가끔 고개를 젓곤 했다.
다행인 것은, 그 성격 덕에 에이팍과는 일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그는 명령이 옳다고 생각하면 따른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즉시 이의를 제기한다. 이의를 제기할 시간이 없을때는 간략하게 의사만을 표시하고 명령에 따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면 안다고 하고, 확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신뢰성이 있는지 항상 이야기 한다. 그런 그가 '5%의 신뢰구간내에서 못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가 아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표트르가 쓰고 있던 프로젝터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제길."
웨더스 소령이 주먹을 꽉 쥔다. 아마 에이팍이라면 홀로그램의 프로토콜을 분석해서 역추적하는 것은 기본이고 디지털 웹의 성역인 첩자의 종말Spy's Demise -물론 디멘셔널 아노말리로 박살나, 이곳도 2.0으로 새로 만들어졌다-에 들러 유타나토스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수상한 낌새가 없었는지 모두 물어보고 다녔을 것이다. 에이팍은 트래디션 쪽에도 '덜 위험한' 테크노크라트로 알려진 드문 케이스중 하나였다. 묘한 운인지 그는 항상 트래디션과 동일한 목표를 가진 임무를 맡아,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그들과 협력하는 일을 자주 겪어왔다. 웨더스 소령에게 있어서 에이팍은 귀중한 프로그래머, IT 전문가, 그리고 소식통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이 좀 더 친근했으면 더 훌륭한 소식통이었겠지만.
"남은 건 거머리놈들 뿐이군."
웨더스가 중얼거린다.
"수고했다."
웨더스가 철제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그 진동에 선반의 기기들이 흔들린다. 그러나 에이팍이 쓱, 하고 방을 둘러봄과 동시에 그 진동이 웬지 모르게 사그라든다. 잠시 후 다시 모든 기기들이 각잡힌 모양으로 정지했다. 쓰레기까지도. 그는 흡족한지 살짝 미소 짓고는 웨더스 소령의 하드 수트의 팔 부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된다는건가?"
"네~"
언제나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프로제니터의 미친 의사, 소피아 라이언이었다. 본인의 신상 정보 보호 요청으로 나이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있는 그녀. 그러나 웨더스 소령은 자신의 멘토의 멘토에게서 그녀와 같이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지닌 그녀는 클론공학, 생체개조, 이종 생물학Xenobiology, 이종간 이식체Xenotransplant, 그리고 간이형 생화학 병기 제작 등 실험실, 수술실, 그리고 현장에서 동시에 뛸 수 있는 실력자였다. 조금 제정신이 아닌 것이 문제지만.
"자아, 이걸 보세용, 소령님."
그녀가 한쪽 눈은 웨더스를, 다른 한쪽 눈은 MRI 사진을 향하게 한 채로 노래하듯 말한다. 몇번이나 봐왔지만 사람의 눈이 각각 다른 곳을 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절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웨더스는 그것을 참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보이시죠?"
그들의 뇌에는 확실히 빈곳이 있었다.
"..."
웨더스가 잠자코 있자 그녀가 다시 쾌활하게 말을 이어간다.
"저렇게 싱싱한 뱀파이어 녀석들에게 쓸 수 있는 자백제로는 AR 13타입, 14타입, 그리고-"
그녀가 전문용어를 지껄여가며 말한다. 웨더스가 그녀의 방을 둘러본다. 에이팍과는 달리 그녀의 방은 좋게 말하면 활기 차고, 나쁘게 말하면 엉망진창이었다. 그녀가 침대로 쓰는 수술대 -물론, 본 용도로도 사용중이지만- 옆에는 하나로 열여섯가지의 수술 도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멀티툴이 튜브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배양되고 있는 새로운 타입의 의수가 있었고, 문 옆에는 그녀가 언제라도 갈아끼울 수 있는 스물 일곱개의 안구가 든 통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런 광경이 벽을 따라 쭉 계속 되고 있었다. 에이팍과는 달리 그녀의 방은 한 가족이 들어가 살아도 문제 없을 정도로 컸다. 이상한 점은, 이런 미친 의사의 방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핏자국, 고깃 덩어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의 자국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 크고 활기차며, 이상할 정도로 깔끔한 방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피와 체액으로 얼룩진 그녀의 흰색 가운뿐이었다.
"소령님!"
촤악, 하고 그녀의 왼팔이 보랏빛의 촉수로 변해 소령의 턱을 잡는다. 끝에 달린 기괴한 모양의 손가락 같은 것이 소령의 턱을 돌려 그녀를 향하게 했다. 아직도 두 눈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듣고 있네."
지휘체계에 있어선 분명히 웨더스가 높지만 테크노크랏으로 살아온 기간은 당연히 그녀가 길다. 이렇게 해도 넘어가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은, 자백제 같은건 안 통한다는 거에요. 자백제들이 작용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들이 다 제거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은 표트르가 혼자 활동하는게 아니라는 뜻이군. 놈은 이종 생명공학 전문가는 아니니까."
"뭐어, 저 같은 미녀 의사라도 데리고 있겠죠!"
그녀가 그 말을 하며 MRI 사진을 쓰레기통으로 처박는다.
"...최소한 추적의 단서는 있는 셈인데."
웨더스가 안주머니에서 홀로그램 통신기를 꺼낸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형상이 새파란 홀로그램이 되어 동그란 원반 모양의 통신기 위에 나타난다.
가운데 머리가 벗겨지고 통통한 볼살에 지쳐보이는 눈가, 그리고 멋없는 검은테 안경까지. 그는 AP-25 아말감의 행정 담당, 신디케이트의 멤버인 백종현이었다. 신입 테크노크랏이 신디케이트에 대해 갖는 '재수 없고 나이에 비해 쓸 데 없이 젊어보이는 사업가' 이미지와는 전혀 달리, 그는 일에 치여사는 만년 과장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현장에서 구르며 매일 늙어갈 것 같은 웨더스가 훨씬 더 젊어보였다.
"백 사장."
"아, 아이고. 대장님 오셨습니까."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자백제가 운송중입니다만, 또 필요한거라도 있으신지요? 아마 한시간 내면 도착할 것 같은데.."
"미안하네. 자백제는 필요 없게 됐어."
"아하, 그럼 반송시키죠."
"또 필요한게 있으면 연락하겠네."
"네, 네."
그렇게 통신이 종료된다.
"하아, 그럼 어떻게 한다. 당장 옆 동네에게 요청하기에는 좀 껄끄러운데."
AP-25 아말감은 대다수의 심문 과정을 소피아가 선택하고, 백 사장이 어디에선가 공수해오는 자백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제일 좋은 방법은 숙련된 NWO 요원이 있는 아말감이나 상부로 옮겨 심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여유가 있는 곳이 있을까 의문이었고, 일단 넘겨주면 표트르 같은 중요한 표적을 추적하는 공을 채갈지도 몰랐다. 몇년간이나 심리전 요원을 요청했지만 거듭 돌아오는 대답은 "인원 부족" 이라는 말 뿐.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신입에게 맡겨보는게 어때요~?"
그녀가 말꼬리를 길게 뽑으며 제안한다. 가끔, 그녀가 -매우- 늙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오히려 저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웨더스에게 그 사실을 각인시켜주었다.
"노하은? 녀석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았어. 솔직히 의문이군. 포커 페이스도 제대로 못 지키는 블랙 수트 요원은 처음이야."
"흐으음... 왜애, 그래도. 나 때도 별로 교육과정이 충실하진 않았어요. 그땐... 앗, 내가 무슨 소리야."
'나 때'라는게 대체 언제적일까 고민하는 웨더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해보고, 라는 심정이었다.
찰칵.
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심문실의 문이 닫힌다. 한때 현실교란자들을 심문하는데 쓰인 MKU-3 다층심리 교란장비는 몇년 전 상부, 그것도 통제부Control가 직권으로 징발해버리는 바람에 그의 아말감은 더욱 애먹고 있는 참이었다. 디멘셔널 아노말리 이전에도 화려한 초과학 장비를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아껴가며 써야하진 않았다. 그 생각만 해도 그는 골치가 아파왔다. 덕분에 그의 아말감은 현장 경험이 제로인 요원에게 뱀파이어 둘의 심문을 맡겨야 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어떤 하이테크 장비도 없이 말이다.
"...뭐, 신세대가 어떻게 하는지 보도록 할까."
그가 심문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중거울 뒤에서 중얼거렸다. 소피아는 무엇이 즐거운지 웃고 있었고, 에이팍은 장비 수리를 하느라 참관조차 하지 않았다. 소령은 심문이 잘못되거나 하면 바로 개입할 심산이었다.
하은이 문을 닫고 그의 심문 대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검은색 가방이 들려있었다. 혈색이 창백한 20대의 남자. 머리는 엉망으로 염색되어 있고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버둥거린다. 그는 수술 의자를 닮은 심문대에 사지가 구속된채 묶여 있었다.
"하, 시팔. 이제야 오셨나?"
그러면서 소리친다.
"소용 없다고, 이 미친 새끼들아! 뭐라도 말할거 같아? 고문? 할테면 해봐!"
고래고래 소리질러대는 그를 하은이 바라본다.
"어떤 방법을 쓰겠나, 요원?"
차갑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그의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검은 양복, 검은 넥타이, 검은 선글라스.
짧은 흑발의 인종을 알 수 없는 남성이 그녀의 옆에 서있었다.
하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거나 그녀가 그와 소통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입을 움직이며 말해도 그것은 그녀에게만 있는 일.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무표정하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를 교관The Man이라고 불렀다.
그는 하은의 계몽의 순간부터 항상 그녀를 지도해왔다. 그 누가 봐도 NWO의 신입 중 제일 재능이 떨어지는 그녀가 어떻게든 교육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교관의 존재 덕분이었다. 하은이 포기하려는 순간마다 그는 그녀가 한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녀를 담담하게 설득하여 어떻게든 버텨나가게 했다. 수호천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웠으며, 악마의 속임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실했다.
"이 뱀파이어는 통각 기관이 완전히 마비되었다고 추측됩니다. 뱀파이어라도 극도의 고통에는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특정 지점에 고통을 가하면 인간을 고문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배운 것을 천천히 말한다.
아무도 그녀가 말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눈치채지도 못한다.
"저렇게 고문을 하라고 도발하는 것은 통각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수술한 이종 생명공학자의 수완이겠지요."
교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놈은 사운드 엔지니어의 추종자입니다. 분명히 청각은 민감하리라 생각됩니다. 스스로가 인간보다 강하다는 의식을 꺾어주고, 그 이후에 불쾌감을 일으키는 청각으로 자극을 주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지간에 효과가 있을겁니다."
교관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하은이 천천히 뱀파이어에게 다가간다. 수술대에 검은 가방을 내려 놓는다. 그녀가 그 안에서 까만색 마스크를 꺼내 쓴다. 무엇인가 꺼내들고는 뱀파이어의 머리쪽으로 움직이는 그녀.
"하, 뭐야. 겁주려고? 미친거 아냐? 난 뱀파이어라고! 이 좆같은 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가죽 스트랩이 놈의 이마에 둘러져 머리를 고정시킨다.. 순식간에 목에도 스트랩이 둘러져, 간신히 쌕쌕거리는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성대를 압박한다. 그녀가 다시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씨, 컥, 컥. 제기랄, 이것만 풀리...컥..."
마약에 취해있는 듯, 연신 버둥거리는 뱀파이어. 그러나 아까와 같이 소리를 지르지는 못한다.
"풀어ㅈ-"
입을 크게 벌린 순간 하은이 놈의 입 안에 바이스를 꽂아넣는다. 끼릭,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사를 몇번 돌리자 입을 벌릴 수도, 다물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그의 눈 앞에, 하은이 조용히 선다. 한손으로 놈의 이마를 고정시킨 그녀의 다른 손에는 플라이어가 들려있다.
놈이 비명지르듯 소리를 내지만 발음할 수 없는 탓에 쌕쌕거리는 소리만이 흘러나온다. 흰 조명 아래서 빛나는 은색 플라이어가 놈의 송곳니를 잡는다.
까드득, 까드득-
그녀가 송곳니를 물고 있는 플라이어를 조금 움직이자, 이빨을 갉아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놈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린듯 눈을 크게 뜬다.
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송곳니를 잡아빼는 그녀. 이미 죽어버린 잇몸에서 시퍼런 피가 흘러나온다. 다른 쪽의 송곳니는 좀 더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잡아빼는 그녀. 이번에는 좀 더 많이 뒤틀어서 소리가 두개골의 진동을 통해 확실히 전달되도록 한다.
"으어, 으아아! 으어!"
놈이 뭐라 소리치지만 하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입 안에 송곳니를 던져넣는다. 이제 그 꼴불견인 소리를 낼 때도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송곳니를 삼키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다. 뱀파이어의 기도를 막으려 하는 두개의 송곳니가 달그닥거리며 입안에서 미칠듯이 춤춘다. 하은이 다시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
놈은 소리를 치지는 못하지만 눈을 크게 뜬다. 아까처럼 하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알에 날카로운 쇠막대기 같은 것을 박아넣는다. 녀석의 눈동자가 회백색으로, 각막이 시뻘건색으로 물들어간다. 놈이 눈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날카로운 막대에 의해 유리체 자체가 찢겨나간다. 그녀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막대기를 기울인다.
그 끝이 안구와 그것을 지탱하는 근육을 찢어버리고 뼈에 닿는다.
까드득-
그녀가 막대의 날카로운 끝을 가볍게 움직이자 형언할 수 없이 기분 나쁜 금속성의 소리가 두개골을 울린다.
까드득-
한번 더 움직인다.
'살아 있는 느낌'을 느끼기 위해 네판디에게 개조 받은 청각. 그것으로 음악을 즐기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일 수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증폭된 감각이 고통을 살려내는 매개체가 되었다. 금속성의 무언가가 자기의 안쪽을 파내고 있다는 것이 두개골을 울리며 청각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것은 다시 몇배나 현실적인 감각으로 증폭되어 뇌리에 박힌다. 꽤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괴로움'이 기묘한 형태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까드득-
또 한 번 긁어내는 소리. 근육과 부패해가는 살점을 찢어내는 소리.
하은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수술대 위쪽에 무엇인가를 설치한다. 그것은 20년은 더 된, 작은 기계팔들이 잔뜩 달린 구형 수술 보조 장비였다. 방금 전 소피아에게 부탁해 빌려온 것이었다. 정밀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기에 수술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이런 단순한 작업을 반복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놈의 두개골을 안쪽에서부터 파내는 단순한 동작을 기계에게 맡기고 하은은 이번에는 귀로 옮겨간다. 그녀의 손에 역시 수술용으로 쓰는 작은 드릴이 들려 있었다.
위잉-
그것이 회전하며 또 다른 청각을 선사해줄 준비를 한다.
"으..으안... 으아안!!"
놈의 입 안에서 뽑힌 송곳니가 달그락 거리며 소리치는 그를 방해한다. 하은이 천천히 드릴을 그의 턱관절 쪽으로 가져갔다.
찰칵.
옆방으로 하은이 들어선다.
똑같은 심문대에, 이번에는 여성 뱀파이어가 묶여 있었다. 하은이 그녀에게 다가선다. 그녀의 눈 양쪽으로 눈물 자국, 아니, 눈물 대신 흘린 핏자국이 나있었다. 버둥거린 흔적도 별로 없다. 표정과 반응을 보건대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하은을 웨더스 소령이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하은은 천천히 심문대에 묶인 뱀파이어를 풀어주고 있었다.
"하.. 하아.. 고.. 고맙습니다..."
뱀파이어가 훌쩍이며 말한다. 하은이 배운 바에 따르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는 흡혈종Homo Sapiens Mortis은 이렇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개체, 또는 누구라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한 개체,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후자였다면 애초에 여기에 잡혀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가 부족한 것인지, 그녀의 시선이 연신 하은의 목덜미를 향한다. 그리고서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선, 끝모를 자괴감에 빠져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하은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다.. 당신들은 누군가요..?"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조직입니다. 걱정마세요.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습니다."
"그... 그게..."
뱀파이어가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린다.
"괜찮습니다. 곧 수혈팩을 가져올게요. 시간만 들이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하은.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저...정말인가요?"
"네. 이렇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기.. 기껏해야 한달..."
하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추측대로였다. 아마 네판디가 수족으로 부려먹기 위해 수하의 뱀파이어들을 시켜 적당한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든 경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용해먹기 쉽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테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테니까.
"알겠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레.. 레베카요.."
그녀가 조금 진정한 듯 대답한다.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 어느날 일어나보니 납치되어 있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살아나는 불쾌함을 경험한다. 그 후 미친 놈들의 파티에 마약-물론, 당연히 마법적인-을 투여받으며 끌려다녔을 것이다. 광란의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 파티가 시작된다. 그것을 몇번이나 경험한 그녀는 거의 미칠지경이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구원이 찾아온 것이다.
"레베카, 당신은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은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말한다.
"당신이 저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저희도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이 목격한 것을 빠짐없이 저희에게 이야기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아.. 알겠어요. 그 놈들을 잡기 위해서라면 다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은이 살짝 미소짓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흥미로운데."
심문실을 나서는 하은에게 말을 거는 웨더스.
"아, 소령님. 그... 죄송합니다. 조금 비정규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그것 이외엔 생각이 나지 않아서..."
웨더스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뭐, 됐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야."
"예?"
웨더스가 심문실 문을 엄지로 가리키며 묻는다.
"어떻게 할거지? 정보를 다 얻고나면?"
"그야 표준절차에 따라서 프로제니터 측에 샘플로 제공해야하겠지만, 솔직히 전 소각처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딱 잘라 말하는 그녀. 웨더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소피아 박사, 수혈팩을 준비해주도록."
"어머나, 우리 웨더스 소령님이 웬일이실까~? 자아, 이리와요 하은양~"
그렇게 말하며 하은의 손을 잡고 즐겁게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소피아. 그 뒤를 바라보며 웨더스가 한숨을 내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노하은: NWO 블랙수트, 계몽2, 정신2, 토템(The Man)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룰적 설명
토템 백그라운드는 메이지가 정령과의 유대를 형성하여 관련 능력에 보너스 주사위를 준다. 당연하게도 테크노크라트는 이를 찍을 수 없지만, 사회질서의 정령이라 할 수 있는 The Man과 기계와 관련된 The Machine은 예외다. The Man은 협박, 밀리, 그리고 리더십에 보너스를 제공한다.
생각외로 본격적이고 잘써서 당황
pbp갤에서 솔플로 돌려도 되겠는데...? 계속 소설로 쓸거라면야 뭐 알아서 하는거지만
어쩌면 메이지는 플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훨씬...
소영아 뻘글좀써죠
더맨이랑 더 머신 설명좀 해주셈 뭐하는 애들인지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