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0% 확률을 뚫고 야만세계를 얻게 됐으니 간략한 후기. 

나는 오히려 V20보다 저게 더 만족스러우니 2위가 더 만족스럽다.


제작 동기

그러면 일단 이걸 만들게 된 유래부터 설명하자면, 원래는 크툴루 신화 계열 물건에서 기존 게임과는 반대로 뭔 내용인지 못 알아듣겠는 신격체들의 계시와 주변의 악평, 공권력의 위협 등에 고통받는 사교도들을 플레이하는 막장스러운 AWE 기반 물건을 만들고 있었는데(물론 저작권을 위해 신격체 이름 등은 그대로 안 사용하고, 세계관의 흐름도 좀 덜 암울하게 바꿔놓고), 도저히 이걸로는 기일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일주일만에 본격 약빠는 물건 = 이거를 날림으로 만들고, 한두 번 테스트하고 치운 물건임.  


심상의 구현

나는 원래 AWE는 누군가가 약을 빨려고 작정하면 다 같이 거기에 끌려가거나 분위기가 묘해지기 딱 좋은 물건이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이쪽에서 먼저 모두에게 투약을 권장해보기로 했음. 그리고 약빠는 걸 가장 합리화하기 좋은 방법은 역시 누가 뭐래도 "미친 놈들"을 내놓는 거지. 그 다음에 든 질문은 두 개였다. "어떻게 이 미친 놈들이 어쩌다 미쳤는지 알려줘야 하지?" 하고 "플레이 중에 어떻게 쟤들이 미쳤다는 걸 어떻게 확인시키지?" 그리고 이 질문들을 처리할 아이디어를 줄 고전 명작이 두 개 떠올랐다. 하나는 존 윈덤의 "트리피드의 날"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전에 EBS에서 본 독일 고전 호러영화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그럼 둘에서 각각 뭘 따왔냐....


일단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사실 '악당'은 멀쩡하고 착한 사람이고 화자가 미친 놈"인 반전영화의 시초이자 호러 영화의 시초 중 하나임. 더 말할 필요 없지? 한편 "트리피드의 날"에서는 "어쩌다 얘들이 미쳤을까"라는 동기를 따왔다. 원작은 인류 대다수가 장님이 된 사이에 지능을 갖고 걸어다니는 육식 식물인 트리피드가 착취당하다 이 기회에 봉기해서 인류 사회가 반쯤 망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인데... 그럼 어디서 동기를 따 왔냐고? 이 작품에서 인류 대다수가 장님이 된 원인이 "녹색 유성우"를 본 여파였거든 ^^ 물론 작중에는 다른 가설도 나오지만 패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두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서 녹색 유성우를 보고 "이상해진" 사람들을 다루는 물건을 진행하기로 했음. 다만 얘들이 미친 게 아니라 반대로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서술해 놨고, 일단 플레이하는 사람이 한 쪽 뿐이고 반대쪽으로는 진행하지 않는다면 그쪽의 관점이 진짜인 거야. 반대쪽 관점에서 믿기는 어렵겠지만.


메카닉의 체계화

그래서 "이상한 놈들"과 "보통 사람들"을 대조시키는 것까지 진행했고, 여기서 매우 신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차피 AWE를 사용하면 마스터 액션도 좀 만들어야 할텐데 그냥 아예 정상인과 이상한 놈들을 둘 다 플레이 선택지로 풀어놓고 서로의 액션이 대응되게 만들어서 마스터 액션을 대체하게 해 본 거지.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이상한 놈들 쪽이면 마스터는 정상인들의 액션으로 대응하고, 정상인들 쪽이면 그 반대로 하면 되고. 다만 이 방식의 다른 점은 마스터가 얼마나 약을 빨아야 하는가... 가 됨. 예를 들어서 여자 직원이 일주일간 씻기를 거부하는 중인 소년 환자를 강제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려는 것은 반대 쪽에서 보자면 악의 하수인인 색녀가 마법소년의 의상을 찢고 능욕하려는 뭐 그런 걸로 보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걸 서로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잘 묘사해야 하거든.

도중에 웃지 말고 말이지. 


한편 능력치 같은 건 어떻게 사용할까도 고민해 봤는데, 일단 이런 물건은 장기간 돌리긴 좀 애매한... 한두번 낄낄거리며 돌리고 접는 그런 물건이잖아? 그래서 복잡하게 안 가기로 하고 모든 능력치 설명을 싹 제거함. 그냥 순수히 주사위 판정 빨로만 처리한다 이거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좀 더 복잡한 버전을 내놓을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 부분은 맨 처음부터 보정을 거의 안 주기로 결정했었음. 그래서 그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인 태그도 안 쓰고, 설정도 양 쪽 다 "아이고 의미 없다"에 가깝게 설명해 놓은 거임. 초인들은 능력이 있다는 설정이지만 "정말로 그럴지는" 잘 모르겠고. 직원들은... 잘 생각해 봐라. 취미라든가 뭐 그런 개성적인 게 있어도 그걸 굳이 직원복 입고 일하는 요양소 내에서 어필할 필요가 없잖아? 활동에 도움이 되는 설정이래도 어차피 그냥 패스시킬 생각이었고.  


마지막으로는 결말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도 생각해 봤다. 단편이라면 그냥 일상물이니까 하루 일과가 끝났다는 식으로 처리하면서 가볍게 끝내면 되는 건데 그냥 그러기만 하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점수"를 쌓거나 깎으면서 다른 결말에도 도달할 수 있게 해 놓음. 그리고 어느 쪽이 진실이냐를 정했다면 그쪽에 따라서 묘사가 달라질 거고. 그렇지 않다면 역시 두 관점을 병행해서 묘사해야겠지.


분량 조절

예전에 양놈들은 2페이지 RPG 대회 그런 걸 했었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2페이지를 초과하지 않기로 결정. 굳이 내가 이걸 3페이지로 한다고 뭐 1등할 것도 아닌 거 같았고. 물론 AWE의 메카닉 자체를 버리고 좀 더 날로 먹는 체계로 갔다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좀 익숙한 게 그래도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그대로 가기로 결정함. 대신 저작권이나 이런 거 안 해 본 놈에게 개요를 설명하는 부분 등을 추가하느냐 분량 조절이 좀 힘들었다. 특히 본문 폰트를 8pt로 줄일까 말까 꽤 고민함. 


3줄 요약

원래 내려던 거는 기한을 못 맞출 거 같아서 그 대신에 대충 일주일만에 날림으로 만들어서 낸 물건.

작정하고 약빨려고 하니 대조되는 관점이 나오는 컨셉이 나와서 대놓고 그에 맞춘 메카닉을 구성해 봄.

2페이지 분량 내로 완성할 생각이어서 능력치 그딴 보정요소는 처음부터 최대한 안 쓸 생각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