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AWE 기반 룰에서의 전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그 동안 해 온 생각을 기반으로 살을 붙인 거. 아랫 글에서 니컬이 한 지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대답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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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스티스 월드를 플레이하는 법은, 전통적인 RPG와는 꽤 다릅니다. 전통적인 RPG에서는, 그것이 전투가 되었건 대화가 되었건 조사가 되었건 캐릭터가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대개 수치적인 데이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투에서 적에게 칼을 휘두를 때 한 손으로 쥐고 휘두르면 힘 수치만큼 베기 속성 피해를 주고 양 손으로 쥐고 휘두르면 다른 손에 방패나 다른 물건을 들지 못하는 대신 힘 수치+2만큼 베기 속성 피해를 준다는 식입니다. 상대에게 협박을 할 때도 HP처럼 수치가 정해진 정신력을 일정 이상 깎으면 의도가 관철됩니다. 숫자로써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규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참가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밸런스’를 맞추기 좋으며 룰의 해석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적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고, 최적화된 효율성을 추구하게 되는 폐해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수치적 데이터화 경향이 강한 RPG일수록 플레이 양상은 숫자 계산에 가까워집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방식은 아닙니다. 다량의 데이터에 기반해서 전략적 유불리를 판단하고 최적화된 전술을 짜는 것도 나름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이런 식으로 산수 계산을 반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의문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전 그간 RPG를 하며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선언을 하는 게 더 흥미진진할 테고, 캐릭터에게도 어울리는데’ 싶지만 그에 맞는 룰이 없거나 억지로 시도하려고 하면 룰 상의 불이익이 너무 커서 마지못해 포기한 적이 많습니다. 반대로 룰 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적당한 핑계를 갖다 붙여서 그 캐릭터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언을 한 적도 많습니다. 누가 더 룰로 규정된 범위 내에서 최적의 효율을 내는 캐릭터를 만드느냐를 두고 다른 참가자들과 은근히 경쟁한 적도 많습니다. 이야기 내에서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얻을 수 없는 유용한 능력을 얻기 위해 배경 설정 단계에서 억지로 그와 관련을 짓고, 정작 그 능력을 얻은 뒤에는 그 설정을 슬쩍 사장시켜 버린 적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플레이가 끝나고 난 뒤 그 플레이를 돌아봤을 때 흥미로운 사건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내 캐릭터가 한 방에 괴물에게 100점 넘는 피해를 줬다는 것만 떠오른 적도 많습니다. 


마스터링을 할 때에도 비슷하게 원하는 장면을 구현하기 위한 룰이 없거나 오히려 룰이 방해가 되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모두가 만족한다면 그런 것도 엄연히 RPG를 즐기는 한 방식이고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듯, 다른 방식으로 RPG를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그런 식의 수치적 데이터화가 잘 된 시스템일수록 필연적으로 그만큼 외워야 할 룰이 더 많고, 따라서 새로이 익히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 ‘다른 방식’에서는 숫자를 통해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숫자를 통해 캐릭터 간의 ‘강함(그것이 전투 능력이건, 다른 능력이건)’에 밸런스를 맞추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각자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눔으로써 장면을 공유하고, 그렇게 공유된 일련의 장면들과 장면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캐릭터가 말과 행동을 통해 주변 상황과 상호작용하면, 그 내용을 통해 상황이 바뀝니다. 밸런스는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 내에서 각 캐릭터들이 얼마나 비슷하게 비중을 갖고 활약했느냐에 따라 정의됩니다. 물론 이 방식에서도 숫자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말과 행동,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묘사에 있어서 참가자들이 장면을 공유하기 쉽게 돕는 느슨한 기준일 뿐입니다. 


전투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표적인 수치적 데이터화 위주의 시스템인 D&D에서는 캐릭터가 전투에서 얻어맞거나,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중독되거나 하여 HP를 잃어도 0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행동합니다. HP 10짜리 1레벨 파이터도, HP 200짜리 20레벨 파이터도 그렇습니다. HP는 실체가 없는 숫자일 뿐이고, 그 대신 HP를 깎는 수단의 종류를 다각화하고 룰로 일일이 효과를 규정함으로써 묘사의 재료로 삼습니다. 즉, D&D에서는 ‘HP를 깎는다’는 근본적 목적이 있고 그 수단이 검이냐 독이냐 마법이냐는 겉포장에 불과합니다(물론 마법이 거의 통하지 않고 대량의 물리적 피해로만 쓰러뜨릴 수 있는 괴물 등, 근본적 목적은 똑같이 HP를 깎는 것이되 전술적 상황에 따라 바꿔 씌울 수 있는 그 겉포장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게 D&D의 재미입니다). 


하지만 솔스티스 월드에 나오는 괴물은 수치가 별로 없고(있어도 D&D처럼 몇 백씩 되지 않고) 그 대신 ‘대집단’ ‘지능적’ ‘조직적’ ‘불로’ ‘바다 깊은 곳에 산다’ ‘물고기와 바다의 기상을 조종한다’ ‘은밀히 인류와 거래하고 교잡한다’ 등의, 단편적인 키워드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 구체적인 효과 설명 역시 빈약하거나 없습니다. 그럼 이 괴물은 어떤 존재일까요? 대집단이니까, 다수가 모여서 생활할 것이고 단독이나 소수로 활동할 때도 항상 멀지 않은 곳에 동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능적이니까, 어지간한 인간만큼 똑똑할 테고 나름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직적이니까, 명확한 사회적 위계 구조와 지휘 체계를 이루고서 서로 협력할 것입니다. 불로니까, 성체가 되면 더 이상 늙어서 약해지지도 죽지도 않을 겁니다. 바다 깊은 곳에 산다니까, 물론 물속에서 호흡도 가능하고 수영 솜씨도 좋고 수압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심해의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물고기와 바다의 기상을 조종한다니까, 바다에서 적과 싸울 때는 풍랑을 일으켜 배를 가라앉힌 뒤 상어나 거대 문어를 불러와 적을 공격하게 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키워드들을 조합하면 수백 년을 살며 바다 속에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기묘한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걸 교활하게 이용할 줄 알고 풍랑과 해일을 자유로이 일으키는, 실로 끔찍한 괴물이 나옵니다. 이러한 특성을 조합해봤을 때 이 괴물의 정체는 뭘까요? 네, 「인스머스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심해인입니다. 물론 저러한 키워드의 디테일한 해석은 플레이하는 팀마다 약간씩 다를 겁니다. 어떤 팀은 지능적이라는 키워드를 폭넓게 해석해서, 심해인은 인간의 과학 기술과 장비도 원리를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팀은 심해인은 어디까지나 인간과는 다른 생활환경과 사고방식을 가진 괴물이라는 데 중점을 둬서 심해인만의 고유한 기술과 장비가 있으며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대신 인간의 그것에 대해선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팀은 바다 깊은 곳에 산다는 키워드를 폭넓게 해석해서, 심해의 수압을 극복할 수 있는 막강한 신체를 줄 수도 있습니다(총도 어지간해선 안 통하겠죠). 그런가 하면 어떤 팀은 그건 그저 일종의 마법적 보호에 의한 것일 뿐 신체의 내구력 자체는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키워드들은 팀원들이 공통적으로 이 심해인이라는 괴물이 대략 어떤 놈인지 공통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도록 해주고, 피해나 HP, 장갑 등의 숫자는 게임 플레이를 위해 그 대략적 이미지를 구체화한 결과물입니다.     


이쯤 되면 D&D의 전투와 솔스티스 월드의 전투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솔스티스 월드의 전투는 D&D처럼 겉포장을 이것저것 바꿔가면서 HP를 잘 깎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저러한 키워드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전투 과정 자체를 무섭고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투로 예시를 들긴 했지만 크게 보자면 대화나 조사도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물론 이 방식도 결점은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위에서 이야기한, ‘데이터에 기반해 전략적 유불리를 판단하고 최적화된 전술을 짜는 재미’는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숫자의 해석 역시 임의적이고, 같은 숫자라도 플레이 내의 상황에 따라 의미가 바뀌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수치적 데이터화 위주의 시스템에서는 숫자의 의미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냐’ 같은 논쟁이 왕왕 벌어지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런 식으로 계속 장면을 상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과정 자체가 피곤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에서는 어떤 전투도 대화도 조사도 숫자 계산과 피상적인 묘사 한 줄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건은 디테일하게 벌어집니다. 효율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질 것 같은 방향으로 참가자들이 캐릭터와 사건을 이끌어나가는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간의 밸런스는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맞춰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