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일단 보통의 경우 마스터로서 플레이어를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스탠스는 '우리는 한 팀이며, 서로 의도를 숨겨가며 눈치싸움 같은 거 하지 말고 재미있게 플레이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라고 봄(물론 파라노이아 같은 거 할 때는 예외). 


내가 지금까지 나름 길다면 길게 rpg를 해오면서... 플레이어로서 가장 마스터에게 빡쳤을 때는, 마스터가 '자기가 원하는 루트'를 내부적으로 상정해 놓고서는 겉으로는 '나는 플레이어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막상 플레이어들이 그 '자기가 원하는 루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가차 없이 상황을 악화시켜 놓고는 자기는 강요한 적 없다고 입씻을 때였음. 당시 나와 다른 플레이어들은 주어진 정보 내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했단 말이야. 그랬는데도 마스터가 깔아놓은 복선을 눈치 못 채고 지나가는 바람에 상황이 꼬이는 경우가 허다했고. 


내가 좆같았던 게 바로 그 복선이 어쩌구였음. 그냥 지나가는 묘사 한 줄인지 아니면 나름의 의미가 담긴 복선인지 그걸 어떻게 하나 하나 다 캐치하냐고. 만일 캐치해내는 데 성공했어도 플레이어 입장에서 마스터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거든. 그런데 그 마스터놈은 '자긴 복선 충분히 뿌렸다' '전부 예상하는 게 좀 힘들었을 수는 있어도 너무 쉬우면 시시하잖냐' '온갖 난관과 시련이 있어야 그 뒤의 승리가 가치 있는 거고, 나는 그래서 난관과 시련을 줬을 뿐' '중요한 분기에서만 잘 선택했으면 배드 엔딩 안 뜬다, 물론 어떤 게 중요한 분기인지는 비밀' 이지랄을 했다고. 제일 빡치는 부분은 그래놓고서 '자신은 객관적으로 마스터링했을 뿐 아무 것도 강요한 적 없다'고 입 터는 거였고. 결국 그 캠페인은 배드 엔딩으로 끝났고, 나는 새벽에 나와서 술 퍼마셨음.


그 이후로 근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딥빡치는데... 나도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 보면 사실 그간 마스터링하면서 부지불식 간에 저런 식으로 캠페인을 운영해 온 경우가 많지 않나 싶더라고.


그래서 관점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고(마침 그 무렵 세션에서 '합의에 의한 플레이' 담론을 접했다) '마스터로서의 바람직한 태도'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얼추 정립한 상태. 그래서 그 태도가 어떤 거냐면 위에 쓴 대로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같은 목적을 가진 한 팀이라는 전제 하에


1)아무런 난관도 시련도 없으면 게임을 하는 의미가 없으니, 마스터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대리하여 '자신들' 앞에 그 난관과 시련을 배치하는 일을 한다, 플레이어들은 주로 자기 캐릭터의 관점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을 결정하지만 마스터는 난관과 시련(+보상)을 결정해 배치하고 전체 흐름을 조율한다는 역할 차이가 있을 뿐이다

2)구체적으로 무슨 난관과 시련을 배치했는지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다

3)룰 자체는 가능한 책에 씌어진 대로 적용하되, 그 난관과 시련의 클리어를 위해 최대한 플레이어 편의적 관점에서 조언을 계속 해줘야 한다. 낚시질 따위 하지 마라. 중요하니 두 번 말한다. 플레이어들을 낚으려 들지 마라 

4)나중에 복선드립 치지 마라. '그건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엉~' 해봤자 어차피 그건 어지간해선 나중에 끼워맞출 수 있는 거다

5)장면 연출을 위해서 어느 정도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가 흘러가는 게 재미있을지 사전에 대강 맞춰놓을 수도 있다

6)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가능성에 대해 너무 고민하지 마라. 어차피 주사위 눈은 바꿀 수 없다. 의외성은 룰과 주사위에 맡기는 걸로도 충분할 수 있다

7)그래도 주사위가 너무 괴이하게 나올까봐 걱정되면 그 때를 위해 윌파워나 행운 장점이나 운명점 같은 게 있는 거다

8)당연히 플레이어가 트롤링을 하려 든다 싶으면 그것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다. 플레이어가 방화에 환장했다거나 아무나 붙잡고 텍섹을 하려든다거나 하면 대놓고 "하지마, 그거 노잼"이라고 의사를 명확히 밝혀라  


대충 이 정도. 턀갤에서도 자주 한 이야기지만, 마스터와 플레이어 사이에 대립구도가 생기기 시작하면 온갖 몬스터와 환경적 장애와 적대적인 npc들을 투입할 수 있고 pc들의 데이터까지 죄다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스터에 비해 가진 자원이 각자의 캐릭터 뿐인 플레이어들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보면 '마스터가 적당히 져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갤럼들도 있던데 나는 거기 반대함. rpg는 승패 가르려고 하는 거 아니다. 다들 즐겼으면 그게 모두의 승리인 거임. 스포츠 경기나 보드게임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비현실적인 이상론이지만, rpg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이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