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블로그 홍보 겸 예전에 로키 마님이 쓴 글을 다시 올립니다. (원문은 여기)


2007년에 쓴 글이라 약간 낡은 느낌도 있지만(이후 RPG에 구현된 개념이라든지), "실패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다룬 글이라서 올립니다.


플레이어가 즐기는 건 게임의 가상현실인가, 서사인가? 라는 고민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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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승한님과 진행자의 필요성과 서술권 분배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인데, 많은 참가자가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서술권 분배 방식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RPG 역할 분배에서 진행자는 주변 세계와 조연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참가자는 그 참가자가 맡은 주인공이 하는 언행을 서술합니다. 주인공이 하는 판정은 참가자의 서술 영역과 진행자의 서술 영역 사이에서 일어나므로 판정 규칙은 성공 여부에 따라 참가자의 서술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살로 오크의 눈을 꿰뚫습니다.” 하는 참가자 선언과 그에 따른 판정을 생각해 보죠. 성공했을 때는 참가자의 서술이 진행자의 서술 없이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 외부에 작용하며, 참가자가 서술하는 목적인 극적, 게임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같은 극적 목적이나 오크를 쓰러뜨리는 게임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동이라는 제한적인 서술 영역에서마저 참가자의 서술을 관철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공보다 실패가 재미없어지고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게 됩니다.

물론 판정 실패가 판정 성공보다 불리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또한, 게임적 관점에서 보면 캐릭터 성장이나 전술적 판단을 통해 판정 성공률을 높이려는 노력 자체도 게임의 재미이지요. 그러나 그 점을 보존하면서도 판정 실패에도 극적 재미나 게임적 도전을 부여하면 참가자의 재미가 주사위 굴림에 의존하는 현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갈등 판정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판정에 무엇을 걸지 결정해서 성공과 실패가 둘 다 재미있도록 조절하는 것이죠. 판정에 성공하면 화살로 오크 눈을 맞추고 실패하면 헛손질로 끝이 아니라, 성공하면 휘황한 궁술을 본 오크들이 겁을 먹고 못 쫓아오고 실패하면 성난 오크들이 일제히 추적해 온다든가.

갈등 판정에서는 무엇을 걸지 않는지 하는 문제가 무엇을 거는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놀라운 궁술을 선보이는 건 같게 해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충족하되, 성공하면 오크 수장을 일격에 쓰러뜨려서 오크가 조직적인 저항을 못하게 하지만 실패하면 졸개를 쓰러뜨려서 괜히 이쪽이 숨은 위치만 들키고 오크들이 조직적으로 반격해 온다든지요.

갈등 판정의 승패에 거는 결과 결정에는 참가자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가자의 극적 욕구가 진행에 직접 반영되며, 실패도 참가자에게 재미있을 가능성이 더 커지니까요. 이것은 참가자의 서술권이 전통적인 참가자의 서술 영역보다 넓어지는 결과가 되므로 가상현실의 환상은 깨지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외부 가상현실이 있다면 활을 쏘는 행동의 극적 결과를 참가자가 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요.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재미가 중요하다면 갈등 판정의 결과는 진행자가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진행자의 권한이 강하고 가상현실 경험을 중시하는 RPG에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통해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그 실현이 판정 성공에 달렸다면 재미가 확률에 의존하는 데다, 진행자에게 극적 권한이 대부분 있으니 참가자가 원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도 안정적이지 않죠.

그래도 팀내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진행자가 활발하게 반영한다면 많이 보완할 수 있는 점이니까, 게임성과 가상현실 경험을 보존이 중요하다면 진행자 중심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사 소통의 활성화로 참가자의 극적 욕구 충족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에게 폭넓은 서술 권한을 주는 편이 참가자의 극적 욕구 실현에 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가상현실 경험보다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공통 서사와 극적 욕구 실현을 중시하는 제 취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문제라, 목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좋은 방법이란 없으니까요.

물론 특정 목적을 실현하는 데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 판정 개념 도입은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는 현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적에는 참가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상현실의 환상 유지라는 또 다른 목적이 중요하다면 진행자가 그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