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파인더 플레이를 했다. 다키아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지난 2세기경의 다키아 속주를 무대로 삼은 플레이었다. 파티는 누마 제국에 소속감을 가진 네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여러 번에 걸친 모험에 의해 험한 꼴을 겪으며 2레벨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파티는 마물 사냥을 나서기로 했다. 해수구제 겸 거점도시의 치안에 도움을 줌으로써 한참 준동하는 반란세력 소탕을 촉발하기 위함이었다. 현상금 또한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파티는 전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마차를 몰며 겨울의 산길을 올랐다.

도시의 관계자에게 듣기를, 이 근방에는 다이어 울프나 아울베어 따위의 위험한 맹수들이 있다고 했다. 인카운터 주사위는 굴려졌고, 숫자가 높았다. 그래도 파티는 전에 오우거도 때려잡았던 만큼 어지간한 놈들이 튀어나와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존엄하신 마스터는 트롤의 일종인 스크래그를 내보냈다.

파티는 패닉에 휩싸였다. 풀어택을 후려갈긴다면 당시 파티에서 가장 HP가 높았던 파이터도 깔끔하게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릴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위저드의 주문 목록과 파티의 화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에 모두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싸움의 시작은 레인저의 활 사격과 파이터의 투창으로 열렸다. 시간대가 밤이었기에 정밀한 공격이 되지 않아, 파티의 원거리 공격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대신, 스크래그가 던진 돌덩이가 레인저에게 착탄해 큰 피해를 남겼다. 돌무더기에 숨은 스크래그를 사냥하기 위해선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파티의 근접 딜러였던 파이터와 클레릭이 인라지 주문을 받은 채 글레이브와 창을 들고 접근했다. 레인저는 앙상한 나무 밑에서 사격지원을 하기로 했다. 위저드는 다가오는 스크래그에게 그리스 주문을 사용해 넘어뜨렸지만, 생각보다 날랜 스크래그는 균형을 잘 잡은 채 주문 범위를 넘어 마차에 접근했다. 말이 스크래그에게 한 대 호쾌하게 얻어맞았고, 이내 혼비백산해 통제를 벗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티는 이동속도와 사정거리의 이점을 살려 스크래그를 줘팸했고, 큰 상처를 입은 스크래그는 도주를 시도했다. 파티는 위협적인 스크래그보다는 마차를 끌고 도망친 말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마차의 바퀴자국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귀신같이 추적판정에 실패한 파티는 저 절벽 너머로 말의 비명과 마차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지치고 상처입은, 게다가 야영 장비조차 말과 함께 보내버린 파티는 밤을 안전하게 보낼 장소를 찾고자 했다. 서바이벌 판정이 굴려졌고, 어쩐지 펌블이 뜨는 바람에 레인저는 구릉에서 굴러 낙뎀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서슬에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웬 토굴이 하나 발견되었다.

여기서 인카운터 주사위가 한번 더 굴러갔다. 10면체 주사위로 한 굴림이었는데, 이 날 누구 하나 죽는 꼴을 보고 싶으셨던 다이스갓은 9를 선언하시었다. 토굴 안을 한번 비춰보고자 라이트 주문이 걸린 지팡이를 밀어넣었던 위저드는 산성의 체액을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HD 3의 개미귀신 괴물, 안크헤그의 등장이었다.

물론, 2레벨 넷이 다구리를 치니 안크헤그는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슬립을 쳐맞고서 잠에 빠진 안크헤그를 레인저가 도끼로 사정없이 내려쳤고, 그대로 속절없이 안크헤그의 모가지가 동강이 났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감상을 가지고 파티는 토굴 안으로, 안크헤그의 둥지로 향했다.

안크헤그는 겨울잠을 자는 마물로, 아직 숨이 붙어있는 두 마리의 안크헤그가 수많은 짐승들과 사람의 유해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잠자는 이들을 쿠 데 그라 했던 파티는, 어차피 야영할 데도 없겠다 이 놈들을 자는 사이 조지고 여기서 자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가장 은신능력이 뛰어난 레인저가 홀로 도끼를 들고 안크헤그 한 마리의 목을 따기 위해 접근했다. 판정 주사위가 굴려졌다.

레인저가 지척까지 다가갔을 때,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개미귀신의 턱에 물린 레인저는 이전까지 입었던 상처까지 더해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고, 허겁지겁 파티의 후열로 도망쳐나왔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토굴의 통로에서 위저드와 레인저를 지키기 위해 파이터와 클레릭이 앞으로 나섰다.

딱히 소용은 없었다. 안크헤그의 산성물질 퍼붓기는 일직선상의 모든 적들에게 퍼부어질 수 있었고, 두 마리가 연사한 공격은 파이터를 넘어 레인저까지 덮쳤다.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파이터와, 비명을 지르며 한 줌 핏물로 녹아내린 레인저가 그 결과였다.

그 후 전개는 일사천리였다. 한 마리는 파이터를 공격해 물어뜯은 채 붙잡았고, 파이터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한채 토굴 안으로 끌려들어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클레릭은 위저드의 사격지원을 받아 바스타드 소드를 용맹하게 휘두르며 적을 몰아부쳤지만 중과부적으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위저드가 모든 기지를 발휘해 안크헤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마찬가지로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파티의 절반은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다.

그 날 플레이를 마치고 시트를 찢으며 나는 결심했다. 시발 앞으로는 존나 쫄보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