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스 PBP 하면서 문득 떠오른 옛 기억.
당시 나는 쨍 워울프 플레이에 플레이어로 참가하고 있었다(갤에서도 몇 번 썰 푼 그 플레이다). 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그 플레이만 떠올리면 이를 가는 이유가... 그 때의 텔러는 철저하게
1)나는 해피엔딩이 좋아! PC들이 악에 맞서 빛과 정의의 승리를 이뤄내는 걸 보고 싶어! 그런데 그런 해피엔딩이 가치 있으려면 중간에 그만큼 PC들이 굴러야 해! 그러니까, 텔러인 내가 PC들을 혹독하게 굴리자!
2)그 '구름'이 가치가 있으려면(즉, PC들이 현시창에서 구르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한 끝에 승리하는 게 가치 있으려면) 플레이어들도 PC에게 몰입하고 동질감을 강하게 느껴야 해!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의 관점을 철저하게 PC에게 종속시키자! 플레이 외적 정보는 절대 안 주고!
3)물론 나는 빛과 정의의 승리를 보고 싶지만 PC들이(=PC와 같은 층위에서 판단하는 플레이어들이) 잘못 판단해서 배드 엔딩 플래그 띄우면 어쩔 수 없지 씁. 나는 플레이어들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텔러니까!
이라는 논리에 입각해서 캠페인을 운영했음. 플레이어 입장에서 저게 좆같았던 이유가... 그 텔러는, 플레이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부논리(컴퓨터 게임으로 치자면 '분기 조건')에 따라서 어떤 결정을 하면 굿 엔딩 루트고 어떤 결정을 하면 배드 엔딩 루트로 가는지 정해놓고 있었거든. 힌트? 주긴 줌. 그런데 문제는, 그 힌트라는 게 무슨 추리소설의 복선 차원으로 굉장히 교묘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그 당시에는 그게 힌트라는 걸 알아볼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는 거야. 쓰면서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새삼 빡치네 아오. 야 니네 같으면 플레이 끝나고 잡담하고 있는데 텔러가 드립처럼 가볍게 한 마디한 게 진짜 중요한 힌트일 거라는 걸 눈치깔 수 있겠냐?
워울프가 됐건 뱀파이어가 됐건 메이지가 됐건 쨍은 원래 괴물 입장에서 비극을 즐겨보자는 취지로 플레이하는 거고(걍 인류를 수호하는, 가장 정의롭고 가장 강한 테키가 되어 킬제노를 하고 싶다는 새퀴들도 자주 보이긴 하지만) 플레이 내에서 어렵거나 더러운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어떤 결정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임임(예를 들어서... 웜테인트 냄새가 나지만 확실히 타락했는지는 불명확한+꽤 강하고 이래저래 도움도 되는 NPC를 기습해서 죽일까 말까). 그거야 그 때의 나도 알고 있었고,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고 플레이에 임했었음. 하지만
텔러가 PC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을 상대로까지 낚시질할 줄은 몰랐지 씨발
위에서 정리한 저 1) 2) 3)에 따라서(당연히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그 플레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아 텔러놈이 저런 식으로 행동했구나 라는 걸 추인할 수 있었던 거) 그 텔러는 플레이어들이 어떤 의사 결정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바로 '하지 말라' '좋은 생각 같지 않다'고 토를 달지 않았음. 왜냐? '나는 플레이어들의 의사 결정을 존중하는 착한 텔러니까.' 하지만 그 의사 결정이 나름 합리적이었건 말건, 올바른 선택이었건 말건 자기가 사전에 결정해 둔 모범답안에 맞거나 최소한 비슷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뒤틀어놓음. 왜냐? '해피 엔딩이 가치 있으려면 그만큼 중간이 빡세야 하니까.'
그 잘난 모범답안이 뭔지 플레이어들로선 미리 판단하는 게 극도로 어려웠고, 막말로 천운이 따라주고 주사위도 잘 나오고 해서 모범답안을 맞췄다고 해도...
내가 보기에 그 텔러는, '해피 엔딩이 가치 있으려면 그만큼 중간이 빡세야 한다'는 예의 그 논리로 얼마든지 플레이 내에서 그럴싸한 핑계를 붙여서는 추가로 난해한 고난을 끼워넣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 썅
당시에도 너무 난이도가 높다거나, 플레이어로서 PC가 아는 것 이상을 알고 판단하는 게 어렵다거나, 아무리 강한 적과 싸워 이기고 아무리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켜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싶어서 무력감이 든다고 여러번 말하긴 했는데 그 때마다 그 텔러는 존내 교묘하게 말을 돌리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싶으면 선수쳐서 "님 캐릭터에게 잘 어울릴 만한 강력한 페티쉬를 생각해 봤어요, 스펙이 이러저러한데...(주절주절) 이번 시나리오 잘 클리어하시면 포상으로 드리겠음" "님 캐릭터가 좋아하는 NPC와 엮어드릴까여? 해피 엔딩이 난다면 맺어지는 것도 좋겠죠ㅇㅇ" 같은... 나로선 솔깃할 만한 소리하면서 화제를 돌렸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에 족족 낚인 나새끼도 병신이야. 그거는 인정.
아무튼 결국 그 플레이는 배드 엔딩으로 끝남. 그 이후로 나는 마스터가 'PC는 물론, 플레이어들을 상대로까지 낚시질하고 교묘하게 통제하려고 드는 일체의 짓거리'를 극혐하게 됐음. 그 후로 합의에 의한 플레이에 관심을 갖게 됐고(추가로, 두 번 다시 자기 캐릭터에게 일인칭적으로 이입하지 않게 됐음. 이건 좋은 거라고 생각하긴 한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그 텔러랑 똑같은 짓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마스터링을 할 때도 미리 시나리오가 짜여 있을 경우 굳이 이런 거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다 싶은 거까지 어지간해선 다 오픈하려고 함. 물론 늘 결과가 좋진 않았고, 취지와는 별개로 합의에 의한 플레이 경험부족으로 인해 그 '합의'의 범위나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를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여튼 세션에서 김사장님이나 ㅊㅅㅁ님, ㅇㅅㄷ아재 등이 쓴 글 같은 것도 여러번 복습하고 스스로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내린 결론은, '합의에 의한 플레이가 성립하려면(굳이 합의에 의한 플레이가 아니어도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서사에 관여하게끔 하려면) 플레이어들도 마스터랑 비슷하게 거시적, 객관적 관점을 갖고 플레이 전체의 흐름을 캐치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였음. 그러한 결론은 이번 겁스 동인도 PBP 플레이에서도 반영되어 있고... 그래서 계속 플레이어들에게 현재 상황에서 있을 법한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고 어떤 전개가 재미있을 거 같은지 묻거나, 현재 상황에서 얻을 수 있을 법한 정보의 종류('답'은 아니고)를 가르쳐 주고 플레이 내에서 그걸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 계속 설명할 것을 요구하는 중이고.
그래서 턀갤에서도 가끔 마스터링 좀 해봤다 하는 갤럼들이 '플레이어들이 이러저러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같은 소리할 때마다 '어.... 응.... 아니...' 싶긴 함. 최소한 저런 소리하는 사람과는 같이 플레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네캎의 몇몇 플레이어들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하는건 사실이다
1:1 플에서 조력자로 내놓는다고 미리 말하기까지 한 캐릭터를 고문하고 살해했다니까요 글쎄
물론 글쓴이가 같이했던 마스터랑은 나도 같이하고싶지 않다
개추여 - dc App
빈딕맨/그런 선언을 하면 받아주면 안 되지...
그리고 중요한건 이런 플레이 방식에 가장 적합한 규칙은 겁스라는 사실! - dc App
적어도 CoC하고는 별로 안 맞는 거 같다
니컬/아재가 COC 오래 했고 잘 안다는 건 아는데... 본문은 룰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의 문제라고 생각함. 나는 마스터의 로망(나는 PC들이 역경을 뚫고 해피엔딩을 쟁취하는 걸 보고 싶다, 쟁취 못하면 죽어야지)을 위한 자위도구로 써먹힌 느낌이었다고.
페널티 쭉 늘어놨는데도 한다는데 뭐...
빈딕맨/왜 굳이 하고 싶은지 묻고, 그 이유가 납득되면 고. 납득 안되면 걍 터뜨려.
아참, 결정적으로 당시 그 텔러에게 빡쳤던 거. 한 번은 이런 소리를 하더라. "플레이어들은 전부 한 편이지만 저는 혼자 그런 플레이어와 PC들을 상대해야 하니 고독하고 힘들어요."(실제로 한 말)
그게.... CoC는 원래 키퍼가 시나리오의 "진실(반전 요소?)"을 홀로 쥐는 대신 탐사자들이 "가능하면 거기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베이비시팅을 적당히 해 줘야 하는 게 전제되는 물건임. 근데 이걸 생각 못하는 놈이 마구잡이로키퍼하면 딱 위에 나온 사례가 나오거든... 물론 웬만한 거 다 공개하고 시작하는 것도 영 아니라고 봄.
그러니까 위의 사례는 텔러가 견공자제인 게 맞는데 "가능하면 공개"하는 운영도 CoC 돌리기엔 별로다 이거임.
나는 오히려 그 마스터의 방식이 이해가 가는데. PC에 깊이 몰입해서 플레이 할때, 마스터가 게임의 흐름과 정합성을 위해 특정 사건의 선택지 A B C가 불러올 영향을 전부 이야기해주면 고마움 반 짜증 반이었거든. 그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분명 어떤 선택이든 철저하게 PC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그 합리적 선택이 무위로 돌아가버릴 수 있을거야.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렇지 않아? 내가 했던 선택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몰라. 하지만 눈 앞에 닥친 선택지에서는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자 하잖아. 그 선택이 불러올 나비효과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니컬/그거야 고전 RPG가 대체로 그렇고... 그게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었을 수는 있어도 'COC를 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는 데에는 동의 못하겠다. 그리고 내가 합의에 의한 플레이(혹은 그에 준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핵심 진실 같은 건 그냥 우리(플레이어들)도 모르고서 플레이하는 게 좋겠다'는 것까지 선택의 여지에 포함되기 때문이거든.
어디까지 오픈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문제고, 나 같은 경우는 굳이 할 필요 없는 것까지 오픈하거나 하는 등의 시행착오를 거친 거고.
TRPG를 현실에 대입시키는 건 무리라는건 나도 잘 아는데, 근데 깊이 몰입해 플레이를 하며 내리는 선언들은 그다지 무의미한 선언들은 아니었을거야. 그 순간 순간에 가장 어울리고 합리적인 선택들을 했겠지만,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알 수 없는거지. 그냥 최선을 다 했고 결과는 알아서 따라오겠지, 하고 말야
그냥 그런 부분에 만족을 했다면 오히려 만족스러운 플레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해피 엔딩이 좋다면야 그런 선택지 트릭이 화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함
개인적으로 좋은 플레이어는 선택들이 미칠 영향을 합의하에 미리 알고 있더라도 캐릭터성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자캐딸잡기 위한게 아니라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이어야함. - dc App
116.33.*.*/그런 것까지 플레이어들에게 확실히 사전에 고지를 했고 동의를 얻었더라면+"나는 플레이어들의 의사 결정을 존중하고 절대 내가 원하는 루트를 강제하지 않는 착한 텔러"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나도 1n년치 트라우마로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
낚시질 실컷 해놓고 강요한 적 없다 이 지랄을 하니 빡치는 거지.
'이 버튼을 누르면 A가 나와요!' 라고 해서 눌렀더니 B가 튀어나와서 엿먹었다 vs '이 버튼을 누르면...노 코멘트 합니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듯. 낚시질이라는게 본문엔 설명이 잘 안되어있어서 글쓴이가 어디에 빡친건지 잘 와닿지는 않넹...
특정한 선택지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건가?
116.33/아니. '특정한 선택지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플레이어들이 머리를 짜내 어떤 추측을 하고 어떤 예상을 하고 어떤 작전을 세워도 마스터가 내부적으로 결정해 둔 모범답안에 안 맞으면 상황이 좆같이 돌아간다'는 데 빡치는 거지.
글이 길어져서, 새로 글 싸겠음ㅇㅇ
116.33.*.*/그러고 보니 그 플레이 당시 텔러한테 불평하면 니 말과 똑같은 논리(선의로 한 일이 비극으로 돌아오는 결과도 있는 거 아니냐~)로 방어하던데, 혹시 본인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