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좀 구체적으로 썰을 풀어볼까. 당시 그 플레이는 전원 5랭크 캐릭터로 시작했음. 쨍 워울프 설정에서 5랭크면 실로 전설적인 첩보원(영화로 치면 어벤저스의 닉 퓨리 정도)이나, 셀레스틴이라고 불리는 신급의 대정령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대주술사 정도의 위치임. 그래서 나를 포함한 플레이어들은 ‘텔러가 이 캠페인에서만 적용되는, 오피셜과는 좀 다른 오리지널 설정이 있을 거라고 하긴 했는데, 일단 쨍 워울프고 전원 5랭크니 주로 정치라거나 안테딜루비안급 뱀파이어 등과의 스케일 큰 전투가 플레이의 주 컨텐츠가 될 거다’라고 예상했었음. 플레이어들끼리 그런 이야기도 했었고, 그 자리에 텔러도 있었어. 그런데 당시엔 아무 말도 없었는데 막상 플레이 시작해 보니까 미친 왕이 pc들을 의심해서 죽이려고 드는 막장상황이었음. 왕과 재상 간의 알력다툼도, 플레이어들이 (텔러가 공개한 초기 배경 설정 관련 글들을 보고서) 예상한 수준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였고. 그 사이에서 pc들은 샌드위치 신세로 시작. 그런데 그러한 초기 상황 정도는, 무려 5랭크까지 올라오며 전투만이 아니라 왠갖 산전수전을 거쳐 온 PC들은 당연히 알고 있어야 정상이거든. 이건 ‘플레이를 통해 알아내야 하는 숨겨진 진실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인 플레이 내의 환경 이해 및 전략 수립을 위해 플레이어들이 처음부터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다고. 그런데 플레이어들이 완전히 초기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는데+텔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내내 싹 입 씻고 있다가 그걸 기반으로 해서 오판을 할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 뒤에 상황이 꼬이고 나니까 그제서야 ‘그건 님들 추측일 뿐임, pc들의 정치적 입지는 님들 예상보다 훨씬 나쁨’ 이러더라.


한 번은 플레이 중에 이런 경우가 있었음. 쨍 워울프 설정 중에 보면 퍼펙트 메티스라는 존재가 나오는데... 세상의 멸망을 불러오거나, 혹은 그 존재의 등장이 세상의 멸망과 직결된다고 예언되어 있음. 어쩌다 보니 아직 어린 상태인 퍼펙트 메티스의 양육을 pc들이 떠맡게 됨(나는 처음엔 어딘가에 가둬두고서 관리한다는 뜻인줄 알았고, 분명 그럴 거라고 플레이 상에서 내 추측을 말했는데 텔러는 그 당시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플레이 중에 불쑥 ‘왕이 여러분을 불러서, 퍼펙트 메티스 정도를 관리하려면 5랭크 급은 되야 하니 여러분에게 양육을 맡기겠다고 합니다’했고). 그 후로 NPC들의 입이나 이런 저런 고대문헌 조사나 예지 등을 통해서 퍼펙트 메티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특히 적들에게 퍼펙트 메티스가 넘어가면 어떤 대재앙이 일어날지) 잔뜩 정보가 주어졌고. PC들은 이 퍼펙트 메티스 꼬마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본성이 어느 정도 악한 존재인 건 맞다’ ‘하지만 그건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생득적 악이다’ ‘우리가 잘 키우고 가르쳐서 웜에 맞서는 가이아의 전사로 길러보자’고 대충 합의를 봤음. 마침 내 캐릭터는 예전에 나쁜 것에 씌어서 대박 사고를 치고는 멘붕했다가 극복한 경험이 있어서 그걸 강하게 주장했었고. 그런데 그 도중에 역시 5랭크 급의 BSD(타락한 워울프)와 수많은 베인(타락한 정령)의 공격을 받아서는 퍼펙트 메티스를 빼앗길 위기에 처함. PC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다른 멤버들은 전부 눕고, 내 캐릭터와 다른 PC의 캐릭터 둘만 남음. 계속 싸우면 거의 확실히 전멸하고 퍼펙트 메티스는 빼앗길 상황.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내 캐릭터가 퍼펙트 메티스에게 ‘너 역시 가이아의 전사라는 자각이 있냐’고 묻고, 퍼펙트 메티스는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살고 싶다고 대답(만일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끝까지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지). 플레이어들이 고민하고 있는데 텔러가 조언하기를:


“차라리 여러분 손으로 죽이고 시체라도 회수해 두면 나중에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래서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다른 pc가 퍼펙트 메티스를 쏴 죽임. “악역은 내가 맡겠다”는 대사까지 하면서. 내 캐릭터는 슬퍼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그 pc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고(뭣보다 플레이어로선 나도 동의했었고). 그 후 지원군이 도착해서 어떻게든 대충 상황은 수습됐지만 퍼펙트 메티스는 이미 시체가 된 상태. 덤으로 시체의 절반은 메이지로 추정되는 어떤 존재에게 빼앗김.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저 상황에서 그간 열과 성을 다해 지켜왔고 어느 정도 정도 붙은 퍼펙트 메티스 꼬마를 결국 죽이게 된 것까지는 불만이 없음. 원래 쨍은 쓴맛으로 하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한참 지난 뒤에 사실 퍼펙트 메티스는 멸망을 불러오는 웜의 사도(워울프 설정에 나오는, 재생을 전제로 한 만물의 파괴를 담당하는 초월적 존재. 현재는 미쳐서 타락함)가 아니라 ‘웜의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보낸 화신 같은 거였다고 밝혀지고, 그 상황에서 끝까지 퍼펙트 메티스를 살리는 게 굿엔딩 루트 선결조건이었다고 텔러가 스스로 밝힘(이 부분은 기억이 좀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이런저런 예언 등을 통해 그간 워울프들 사이에서 알려진 인식과는 달리 죽어선 안 될 존재였다는 게 포인트).


그 이후로도 pc들이 5랭크의 영웅으로서 갖는 입지나, 개인적으로 익힌 기프트, 기타 플레이 과정 등을 통해 조사한 바로는 ‘이 사안에 있어 어떤 결정을 하는 게 유리할지’가 대체로 명확하되 도덕적으로 따지자면 좀 애매하다거나 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종종 나왔고. 아, 물론 그 때도 텔러는 ‘당장 유리한 방향’으로의 조언을 아끼지 않음. 한참 뒤에야 사실 그 때 그렇게 했으면 상황이 악화되었을 거라는 게 밝혀지곤 했고(한두 번 정도는 그래서 진짜 꼬인 적도 있다. 제대로 선택한 적도 있었지만). 당연히 플레이어들도 불평을 하긴 했지만 텔러는 ‘나는 중립적으로 마스터링했을 뿐이다, 정답이 뭔지 내가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주장함.


쓰다 보니 기억났는데, 한 번은 또 이런 일도 있었지. 워울프들을 싫어하는(하지만 공통의 적을 가진) 졸라 짱셀 것으로 추정되는 npc의 존재가 확인됨. 그래서 플레이어들끼리는 ‘우리를 싫어할 것은 알지만 드립따 강하겠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적을 늘려서 좋을 것도 없겠다 어디 있는지 찾아내서 상호 불가침 조약이라도 맺어두면 어떨까’ ‘잘하면 우리 조상들이 잘못을 저지른 걸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하는 대신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상의함.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급한 일이 터져서 어느 걸 해야할 지 고민하다가 결국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감. 역시 한참 뒤에야 밝혀진 거지만 그 npc는 ‘인성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소속 세력과 갖고 있는 능력 특성 상 절대 pc들의 아군이 될 수 없는’... 컴퓨터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른 루트 한정 아군 합류 npc였음. pc들이 그 npc의 존재를 알아냈던 시점에서는 이미 ‘분기 포인트’라고 할 만한 게 지나서, 때려 죽여도 아군으로 할 수 없고 기껏해야 안 싸우는 정도만 가능한ㅇㅇ


결정타는 워울프 디 아포칼립스라는 게임의 핵심 설정과 근본 전제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캠페인의 최중요 반전 부분이었는데 그건 너무 어이없는 거라서 드래그해야 보이도록 일단 가려놓음.


사실은 워울프들이 섬기는 가이아가 진짜 악의 축이고,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킨 뒤 뱀파이어나 메이지, 레이쓰들 같은 다른 초자연체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인간들의 문명은 원시 시대 수준으로 돌려놓은 뒤 새로 창조된 세상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변신족들 관리 하에 모든 걸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pc들이 원하는 엔딩(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미래)을 위해선 가이아에게 반역해야 한다는 쌈빡한 설정이었음^^ 그 시점에서 내가 탈주 안한 이유는... 내 캐릭터가 알파고, 지금까지 주된 의사 결정 중 거의 절반 정도는 내 캐릭터가 함으로써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와서 탈주하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미안해서였거든. 내 캐릭터에게 강하게 이입하고 있었다 보니 꼭 해피엔딩을 보고 싶기도 했고. 같이 플레이하던 친구 놈 하나는 내가 팀에 끌어들였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고 전제해 온 워울프 플레이랑은 너무 달라서 적응 못하겠다고 결국 빠졌다. 

 

    

  

이제 이해가 가냐. rpg하면서 처음의 예상을 벗어나는 건 당연히 있는 일임. 당장 주사위가 그걸 허락하지 않고.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모으고 전략을 세우는 과정도 플레이의 핵심적인 부분이고, 주사위가 안 받쳐줘서 그걸 실현하지 못하거나 플레이를 하면서 생긴 맥락 및 캐릭터의 성향 등의 이유로 인해 최적의 전략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rpg의 묘미라고 봄. 그런데 당시 그 텔러는 당시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은 도저히 알아낼 도리가 없는 내부정보를 은폐한 상태에서, 당장은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상황이 꼬이는 쪽의 선택지를 은근히 들이밀며 “나는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했다고. 복선? 지나고 나서 꼼꼼하게 따져보면 사실 있긴 했어. 야 근데 니네 같으면 플레이 끝나고 잡담하면서 텔러가 친 드립이 복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냐? 다른 중요한(것처럼 보이고, 사실 pc들이 손대기엔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거나 큰 시간과 노력을 새로 들여야 하는) 정보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줄로 쓱 지나간 것들은 어떻고?


아랫 글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플레이 도중에도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해 불만이 없지는 않았고,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플레이 내에서 뭔가 긍정적으로 바뀌어 가는 부분이 없어 무력감이 든다고 푸념도 하고 그랬는데 그 때마다 텔러는 말을 돌리거나, 그런 절망 속에서도 싸우는 게 워울프 아니냐고 함(난 떨떠름하게 동의했었지). 그래서 결국 그 캠페인은 배드 엔딩이 떴고, 나는 새벽 3시에 집에서 나와 술 퍼마셨고, 그 이후로 한참 동안 다른 룰로 다른 사람들과 플레이를 할 때도 마스터를 의심부터 하는 병에 시달림. 당시에는 두 번 다시 워울프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몇 년 뒤에야 괜찮은 사람들과 썩 괜찮은 플레이를 하게 되면서 그 병이 많이 나았다. 하지만 지금도 증세는 좀 남아 있고.

  

116.33.*.*은 ‘분명 어떤 선택이든 철저하게 PC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그 합리적 선택이 무위로 돌아가버릴 수 있을거야.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렇지 않아? 내가 했던 선택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몰라. 하지만 눈 앞에 닥친 선택지에서는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자 하잖아. 그 선택이 불러올 나비효과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라고 말했는데, 난 저런 식으로 낚시질을 당하지 않고서, 플레이어로서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대체로 예상할 수 있는 상태에서(주사위의 개입 결과 그 예상을 벗어나는 건 괜찮다) 내 의지로 큰 흐름을 선택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배드 엔딩이어도 괜찮아. 그 캠페인의 엔딩도 뭐... 웜에 의해 진짜 아포칼립스가 오고 모든 생명이 미치고 타락해 지구가 생지옥이 되는 결말은 아니었음. 내용 자체는 뭐... 그래, 최악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건 나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의지와는 완전히 아무 상관도 없는 결말이었다고. 


새벽에 옛 기억이 떠올라서 열 올라 썼더니 맥주 땡긴다. 한 캔 따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