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DM과 팀이 악당 캠페인을 굴리기로 했는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그게 그다지 참가하고 싶지 않은 그런 극단적 부류의 플레이라는 걸 걸 뒤늦게 깨달았어.

팀원들은 식인종 야만전사, 단순한 변덕으로 우물에 독을 타는 마녀, 세계 정복을 계획하는 마법사였고. 나는 로그였어.

모험 사이의 휴식기에, 우리들은 어느 도시(마법사가 정권 탈취를 꾸미고 있는)에서
제각기 하고 싶은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야만전사는 자신이 패배자를 잡아먹는 지하 투기장을 만들었고,
마녀와 마법사는 노예를 가지고 인체 실험을 시작했고,
나는 어느 한 소녀를 따라다니는 스토커 짓을 했어.

단순히 그게 다야. 그냥 은밀 판정 한 다음에, 멀찌감치서 그 소녀를 지켜만 보는 거지.
내가 그 짓을 하는 의도는 전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뭔가 굉장히 불합리하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

인체의 각 부위의 맛의 차이를 논하던 식인종 야만전사의 플레이어가 제일 먼저, 날더러 기분 나쁘다고 말하더라.

나머지 팀원들도 맞장구를 쳤지만,
나는 마녀가 임산부 노예의 배에 악마의 피를 주입해서 하프 데몬을 만들려 했던 것
(그리고 결국 임산부와 태아 모두 단순히 독살하는 결과만 만들었던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자, 결국 모두들 마지못해 침묵했지.

DM은, 내가 하려는 짓을 막으려는 의도인지, 그 소녀의 삶에 대한 묘사를 되게 건성으로 하더라.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아카데미에 가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식.

게임 내에서 6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야만전사는 식인 검투사 부하들을 가지게 됐고,
마녀는 하프 데몬 양산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마법사는 도시 의회에 파고들어서 중독성이 매우 높은 마약을 뿌리기 시작했어.
내 캐릭터는 그 소녀의 이름, 좋아하는 요리, 친한 친구, 그리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소년 등을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팀원들이 내가 소녀를 스토킹하는 것을 꺼린 까닭이
내가 그녀에게 성적인 짓거리를 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이 여학생을 어떻게든 조금씩 배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어.
그들의 캐릭터는 차마 입밖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짓거리를 하는 악당놈들이었지만,
그 대상은 전부 애초에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름 없는 NPC였던 거지.
하지만 내 캐릭터의 경우, 조심스럽고 착실하게 대상을 파악해나갔고,
그때문에 다른 팀원들도 그녀에 대해서 본의아니게 잘 알게 되어버린 거야.

마법사가 도시를 완전히 지배하게 될 때 쯤,
그 플레이어는 그녀가 희귀 식물, 특히 꽃을 연구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아카데미는 그 식물이 있는 장소를 손에 넣게 되었고,
그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장소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 정도가 되었지.

마녀는 지하 하수구에 숨겨진 비밀 기지에서 악마가 노예를 범하는 시설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생산된 사악한 괴물들이 지상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런 비밀 기지 중 일부는 소녀가 학교에 다니는 골목길에 대단히 가까웠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괴물들은 밤에만 출몰했어.

야만전사는 오래 전 그가 싸지른 사생아 셋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 아버지를 죽이려고 들었어.
그 셋을 모두 잡아먹은 후,
플레이어는 자기 캐릭터가 자신의 사생아에 대해 다른 팀원이 스토킹하고 있는 소녀보다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쯤 되자, 모두들 내가 그 소녀에게 나쁜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어.
나는 멀찌감치서 돌멩이 한 번 던진 것 외에는 그녀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결코 말려들지 않았거든.
야만전사는 내 캐릭터가 그저 은밀 기술을 갈고닦으려는 의도였을 뿐이고,
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약간 악한 느낌의\" 접근을 했던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지.
나는 굳이 이 이론을 반박하진 않았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소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냉정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거대한 악행을 실행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고.
따스한 관점으로 보자면, 사실 그 플레이어들은 본질적으로 소녀에게 그렇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는 선량한 인물었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아카데미는 추가 예산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학생 전용 온실이 만들어 졌어.
악마의 피 실험은 이제 세밀하게 감독되기 시작해서, 탈출하는 개체가 나오지 않게 야간 순찰이 붙었어.
야만전사는 가장 직접적으로 그 소녀에게 접근해서는,
화분에 옮겨 심은 희귀 식물을 건네고는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전했지.

그 이후, 소녀는 우리 팀의 마스코트 같은 것이 되었어. 그들의 과거 행적은 사악했지만,
이제 그들은 비밀리에(혹은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최애캐가 된 그 소녀를 위해 자신의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야만전사만이 소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마법사는 그 학교의 운영 위원 자리에 취임했고 마녀도 곧 뒤따랐기에,
그들은 이제 내 캐릭터가 관찰하며 얻는 정보 이상으로 소녀에 대해 잘 알게 되었어.

플레이어들이 그들의 캐릭터의 행동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우리 캠페인은 서서히 성향이 변하기 시작했지.
소녀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들이 저질렀던 실험과 악행을 숨기기 힘들어진 거야.
일단 가장 드러나기 쉬운 행위부터 중단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결국 최악의 악당 집단은 중립적인,
어찌 보면 조금 선량한 파티로 바뀌어 나갔어.

우리 DM은 스토리 진행보다는 캐릭터의 심경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 캐릭터가 스토리에 악당의 회개라는 변화 요소를 불러왔다며 매우 기뻐하더라.
소녀가 온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묘사하면서,
DM은 내가 악당 캠페인을 이런 평범한 것으로 변모시키려는 장대한 계획을 꾸민 게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더군.

나는 빙긋 웃으면서 결코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하곤, 내 캐릭터가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걸어나와서,

그 소녀에게 다가가서, 모가지를 따겠다고 선언했어.


출처: 4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