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칼과 고삐는 충성을 위해서만 잡을 것. 하나, 책 중의 왕에 적힌 말씀을 따를 것. 하나, 수입의 5푼을 낼 것. 칼리프는 창백한 피부색과 엹은 머리색의 로스토프 사람들에게 이것들만을 요구했다. 그들은 그의 정복을 받아들였다.


 미르켈라 올레그잔드리나는 망토의 안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해설서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먼 친척이 쓴 책. 책 중의 왕에 적힌 말씀을 해설한 책. 그리고, 그녀가 칼과 고삐를 잡을 수 있게 되자 아버지가 선물한 책. 당장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 라그라트에 있는 그녀에게 남은 고향과의 연결고리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공주님에게도, 저 왕관이 그러할까.

크리나 라그라트, 주군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 왕위의 계승자. 벌거벗어 놓으니 그저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만 그 흰 머리와 한쪽 눈만은, 그녀가 왕녀라는 것을 증명하듯 존재감을 뽐내왔다. 그 눈에는 흘깃 보기에도 인공적인, 주홍빛의 유리구가 들어 있었지만…… 미르켈라는 그녀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미르켈라에게 공주는 갈 데 없는 그녀를 기사로 만들어 준 은인이며, 충성을 바치는 주군의 딸로서 지켜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주군의 명령이 한 차례 더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명령이다. 미르켈라는 해설서의 책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공주님께선 의식을 치르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 명령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미루면 되니.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 무슨 연유로? 저 아저씨라면 알지도 모르지, 공주님의 과거에 대해서도 말야. 미르켈라는 미르쿨 맥스웰을 쳐다보았다.

 미르켈라가 그와 이름이 비슷한 건 우연이었다. 어차피 그는 그저 맥스웰 경, 또는 맥스웰이라 불릴 뿐이었지만. 그는 미르켈라보다 먼저 공주를 모셔왔으며, 그 뛰어난 지성으로 공주의 믿음을 받고 있었다. 미르켈라도 역시,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미르켈라는 고향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들에게 흔히 그렇듯, 또한 우정을 담아 서툰 라그라트어로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물론, 무례한 일이었다. 그것을 그녀가 알 순 없었지만. 이는 로스토프어를 알고서도 그녀가 그로써 말을 걸면, 비밀 이야기는 질색이다, 라고 한사코 거절하는 그의 탓이다. 이후 미르켈라는 그것이 무례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어도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크리나는 알몸뚱이에 망토만을 간신히 걸치고 있었다. 목욕재계 도중 일어난 난리로 미처 옷을 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계 낮은 여사제들은 이미 놀라 도망쳤다. 일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을 섬긴다는 이들이 그리 도망치다니, 미르켈라는 혀를 차며 공주의 옷을 주워들었다. 혼자 입기는 힘든 제복. 시녀가 없었으니, 기사인 미르켈라는 공주의 옷 시중을 들었다. 맥스웰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니 그 또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미르켈라는 공주의 몸이 약간씩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녀가 당황한 것은 아니다. 미르켈라의 얼마 되지 않는 소식통을 통해, 맥스웰의 그 넓은 사회망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반역의 징조를 미리 감지한 터이다. 아마, 맥스웰이 공주의 옆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라 적들이 그에게 정보가 향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리라. 정보는 이러했다: 첫번째, 주군, 프레데릭 왕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었다; 두번째, 라그라트의 영주들이 반역의 마음을 품고 무장했다; 세번째, 대부분의 고위층과 사제들은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을 미르켈라는 공주와 맥스웰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정보도 일부 있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공주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미르켈라는 그것에 대해 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일이 끝나면,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르켈라, 올레그잔의 딸. 로스토프 사람들은 칼리프가 그들을 정복한 뒤에도 전통을 지켰고, 딸에게도 칼과 고삐 잡는 법을 가르쳤다. 이름난 기사, 올레그잔 루미노프는 어린 딸을 말 안장 위에 올려 함께 타고 책 중의 왕을 읽어주곤 했다. 미르켈라가 글자만은 홀로 읽을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검과 고삐를 쥐어주었다.


 왕성 밖 곳곳에서는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대관식 도중이라면 왕녀가 무력하리라 생각했던 걸까? 암살자와 함께 이들 일행을 공격하려던 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모두 이 전당 바닥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하지만 바깥에선 여전히 공주를 찾으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크리나는 왕관이 꿰여 있는 사슬을 손에 쥐고, 기사 둘을 쳐다보고 말했다, 도망칠 수 밖에 없겠군, 저들과 굳이 싸우고 싶지는 않다, 정원에 비밀 통로가 있으니 가자. 공주는 웅장한 문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고, 미르켈라와 맥스웰은 그 뒤를 좇았다.

 정원 또한 불타고 있었다. 식물이 수분을 품고 있는 덕에 아주 불바다는 아니었지만, 조심은 해야 할 터였다. 그리고, 비밀 통로의 입구가 숨겨진 곳으로 가기 위해선 불을 가로질러야 했다. 불을 지나 비밀 통로로, 알겠습니다. 미르켈라는 맥스웰을 돌아보았다. 가능하신가요, 아저씨? 괜찮다. 이 몸 하나 건사하지 못 할 것 같으냐. 그럴 순 없구나, 왕녀가 말했다. 여기서 내가 하나라도 더 잃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며, 왕녀는 맥스웰이 서 있는 공간을 접어냈다. 한 장의 곱게 접힌 종이처럼 된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왕녀의 제복 주머니에 들어갔다. 크리나는 차례로 미르켈라를 마찬가지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선 달렸고, 불길을 뛰어넘었다. 왕녀는 불길 너머, 어린 시절 형제들과 뛰어다녀 익숙한 미로를 지났다. 비밀 통로의 입구에 달하자…… 문은 열려있었다. 왕족만이 알고 있는 이곳을, 누가? 크리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무모하셨습니다.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진 맥스웰이 외쳤다. 그래도, 대단하셨죠. 미르켈라는 공주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크리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가 이 차이를 불러온걸까? 미르켈라는 맥스웰이 공주를 언제부터 모셨는지는 몰랐다. 크리나는 미르켈라보다 네 살 어리니, 대략 자신이 처음 고삐를 마음껏 다루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 먼 라그라트에서 모시고 계시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저 그리 생각했다. 그러며 왕녀가 쉴 수 있도록, 비밀 통로의 가장자리, 그런 용도로 만들어 졌을 법한 돌 조각 위의 먼지를 털고 왕녀에게 이 곳에 앉아 잠시 쉬어 주실 것을 청했다.

 똑. 소리보다도, 그녀가 그 무엇보다도 열망을 느끼는 향취가 먼저였다. 핏방울. 돌 조각 위의, 아마 하수도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방울져 떨어지는 피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굴 죽이지 말라고? 손 등에 L자. 어, 이 하인은 있잖아. 뭐, 어쩌냐. 이 친구가 재수 없는 거지. 그리곤 웃음소리. 그 년 예쁘던데. 한 번 보고 싶네. 누구? 그 하녀 있잖아, 목에 점 있는. 나는 그보다는 그 년. 넌 누군데? 술탄의 딸. 젊고, 피부도 흰 눈 같잖아. 뭐, 술탄의 사위라도 되시려고? 피도 잘 빠니 뭐, 잘 빨아 주겠네. 다시 한 번 웃음소리. 미르켈라는 목에 소름이 돋고 욕이 나왔다. 젠장. 라그라트의 병사들은 미르켈라를 흡혈귀 술탄의 딸이라 불렀다. 그 누구보다 앞서 말 달려 가 적을 베고, 전투가 끝나면 남들 몰래 피로 목을 축이는, 타는 듯하며 결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달래는 그녀를. 내 아버지는, 올레그잔 루미노프야. 미르켈라는 하나는 부정했지만, 다른 것은 부정하지 못함에 튀어나오려는 외마디 욕을 다시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아조시 입장에서 써야하나...

일단은 다시 강의 들으러 가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