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sque of the Red



Prologue


 구원의 시간이 다가온다.


 지금 내가 찾으려는 것은 빛의 세계인 페이윌드(Feywild)도 어둠의 세계인 섀도우펠(Shadowfell)도 아니다. 물질계(Material Plane)를 둘러싼 공기(Air), 물(Water), 불(Fire), 땅(Earth), 그리고 주변에 흐르는 에테르(Ethereal plane)도 아니다. 수많은 존재들이 섬기고 있는 16개의 신의 영역(Outer Planes)도 역시 더더욱 아니다.

 나는 전체를 원한다. ‘존재의 평면(Plane of existence)’에 대한 지식 전체를.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만 나의 구원, 우리의 구원, 모두의 구원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현재 기계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모든 차원을 넘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는 그 구체(The orb)를 얻을 수만 있다면 사소한 문제들은 순식간에 넘어설 수 있다.


 기계가 가동되고 동굴 안의 진동이 서서히 강해진다. 집약된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이고 차원의 문이 열리면 나는 모든 평면을 초월한 새로운 평면으로 향할 것이다.

 붉은 가면이 나에게 속삭인다.


 이제 신으로 다시 태어날 시간이야.




Chapter I : Cabin in the woods


1


 “이딴 쓰레기 같은 맥주를 파는 가게라니.”

 앤더 브라이트우드(Ander Brightwood)는 들고 있던 맥주잔을 쾅하며 내려놓았다. 정말 싱겁고 맛없는 맥주였다. 아니 맥주라기보다 보리향이 첨가된 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시라는 곳은 정말 이렇게 사기의 연속이란 말인가? 앤더는 자신이 살던 브라이트 우드(Bright Wood)의 맥주를 떠올렸다. 시골마을이지만 맥주 맛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다.

 브라이트 우드는 네버윈터 남쪽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마을이었다. 잘 익은 보리들이 들판에 가득했고 집집마다 향긋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시원한 바람이 불던 언덕 위에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마을 어귀에 흐르던 강에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대단한 것도 없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다. 정이 넘치고 서로를 진실로 대하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앤더는 아버지를 따라 농부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버지를 따라 밭에 나가 땅을 고르고 밀을 심었으며 소에게 풀을 먹이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았다. 소년 시절부터 앤더는 힘이 좋아서 어른 한 명 분의 일을 너끈히 하곤 했다. 사람들은 앤더의 성실함과 튼튼함을 칭찬했고 앤더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기쁘게 들으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앤더가 사는 마을에 떠돌이 여행자가 머물게 되었다. 브라이트 우드 같은 시골마을에 외지인이 묵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라 마을 사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는 이곳저곳의 던전(Dungeon)을 탐험하면서 보물을 찾아다니는 모험가였다. 사람들은 모험가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모험가도 그들의 대접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떠나지 않고 재미삼아 마을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호신무술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몸을 휘저으며 따라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과 잘 지내는 모험가를 더욱 잘 대접해 주었다.

 간단한 놀이 같은 가르침의 시간이었지만 이제 막 청년이 된 앤더에게는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사건이었다. 그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무술에 강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앤더는 모험가가 알려준 동작들을 빠른 속도로 익혀나갔고 더욱 강해졌다. 모험가가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앤더가 더욱 강한 파이터(Fighter)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주고 떠나갔다.

 모험가가 떠나가자 앤더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도 그 모험가처럼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세상에 나아가서 더욱 많은 무술을 익히고 강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열망과 싸우던 앤더는 마침내 아버지에게 마을을 떠나겠다고 선언하고야 말았다. 앤더의 어머니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앤더의 결심을 지지해 주었다. 젊은 시절 나가서 고생을 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 무술을 배우고 강하게 성장한 다음에는 반드시 마을로 돌아올 것이란 약속을 하고서야 그는 겨우 짐을 쌀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날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밤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아름답게 빛났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자 들판에 자라나는 밀들이 부드럽게 출렁거리며 파도를 일으켰고 놀란 풀벌레들이 제각각으로 울어댔다. 지겹도록 매일 보던 집 주변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줄이야. 앤더는 자신 안에서 어떤 감정이 꿈틀대고 있었음을 느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앤더를 부르자 그는 평온한 밤의 기운을 뒤로한 채 집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이제 너도 어른이지 하면서 집에서 본인이 직접 담근 맥주통을 꺼내 앤더에게 한잔 내어주었다. 눈처럼 하얀 거품이 입술에 닿자마자 구수한 향이 콧속으로 퍼지고 고소하면서도 적절하게 씁쓸한 맛을 혀가 느낄 때면 기분 좋은 탄산들의 입 속에서 터져 나와 잔치를 벌이기 시작한다. 맥주란 이렇게 맛있는 것이다.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대도시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모험가의 말대로 큰 도시로 가서 정식으로 무술을 배울 생각이었다. 네버윈터(Neverwinter) 같은 큰 도시라면 그런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도시는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앤더가 네버윈터에 도착하자 그의 어리숙함을 알아본 사기꾼이 빠르게 접근했다.

 “오 이런, 혹시 자네 브라이트 우드 출신이 아닌가?”

 앤더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브라이트 우드 출신임을 묻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앤더는 사기꾼과 브라이트 우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네버윈터에 온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사기꾼은 자기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면서 앤더를 데리고 다니며 네버윈터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사기꾼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도록 주선하게 해주겠다며 앤더가 가지고 있던 돈의 대부분을 가져간 순간 앤더의 짧은 대도시 투어는 마무리 되었으며 그는 무일푼인 채로 네버윈터라는 대도시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돈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당장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급한대로 마차에 짐을 싣는 짐꾼이 되었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낡은 여관에서 겨우 잘 수 있는 돈을 벌었다. 상황은 급변했다. 소박하지만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있던 시골집을 떠나서 그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도시의 조그만 여관방인 것이다.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침대에 앉아 정말 밀로 만들었는지 의심이 가는 뻣뻣한 빵을 씹고 있자니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큰 도시에서 낯선 사람을 쉽게 믿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사기꾼을 찾아 때려눕힐 수만 있다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벽을 쳐보지만 자신의 주먹이 부어오를 뿐이다.

 앤더는 석 달간 짐꾼으로 더 일하면서 얼마 안 되지만 약간의 돈을 모았다. 이렇게 어설프게 일을 해서 돈을 모을 바에는 차라리 용병이 되어 바로 모험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예전에 마을 찾았던 모험가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처음 모험을 시작할 때는 혼자 떠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무리에 참여하여 모험을 시작했지. 돈이 되는 것은 언제나 깊은 동굴 속 던전에 있다고. 그래. 일단은 용병이 되어 모험을 시작하자. 그러면 이런 멍청한 일보다는 위험하겠지만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앤더는 그간 고생해서 모은 약간의 돈을 들고 여관 근처의 무기상점으로 향했다. 다양한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앤더가 계속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있자 상점 주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앤더에게 물었다.

 “거 무기는 좀 쓸 줄 아나?”

 상점 주인은 시골 촌뜨기가 두리번거리자 걱정이 되었다. 주인은 짧은 검(Shortsword)을 하나 앤더에게 쥐어 주었다. 앤더는 자세를 잡고 모험가에게 배운 기본적인 동작을 선보였다. 가게 주인이 보기에도 꽤나 그럴싸해 보였는지 주인은 그에게 몇 가지 물건을 추천해 주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긴 검(Longsword)과 가죽 갑옷(Leather Armor)을 하나씩 구입했다. 검이 15gp고 갑옷이 10gp였으니 총 25gp를 쓴 것이다. 더 좋은 장비를 사기엔 그의 돈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이제 남은 것은 이제 10gp 정도였다.

 “돈이 없어 보여 하는 말인데 가게 뒤편 골목에 영웅의 쉼터(Hero's Shelter)라는 여관 겸 술집이 있어. 허름하긴 한데 종종 용병들을 찾는 일거리가 들어온다는 모양이야. 그곳으로 한 번 가보게.”

 앤더는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가게 뒤편의 골목으로 향했다.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이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음침하고 더러운 골목길이었고 골목길 끝에는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간판이 앤더를 맞이하고 있었다.


 영웅의 쉼터 (Hero's Shelter)

 - 진정한 영웅은 쉴 곳을 가리지 않는다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아무도 없었지만 어디선가 계속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있었다. 괜찮을까. 건물이 곧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든 앤더가 술집의 문을 열자 한심하게 만들어진 나무문이 기분 나쁜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술집의 거창한 제목과 달리 그저 술꾼들이 앉아있는 시끄러운 주점일 뿐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앤더는 구석자리에 앉아 우락부락한 팔근육을 자랑하는 여종업원에게 맥주를 한 잔 주문하고 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시끄럽게 술을 마시며 떠드는 사람(Human)들, 뭐가 심통이 났는지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는 드워프(Dwarf)들, 제대로 조율도 되지 않은 류트(Lute)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노래라기보다 소리치는 것에 가까운를 부르고 있는 하플링(Halfling) 등등 술집 안은 그저 난장판이었다. 정말 괜찮은걸까.

 “여기 맥주. 1sp.”

 여종업원이 거칠게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무 세게 내리쳐서 테이블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테이블은 멀쩡했고 맥주만 밖으로 튀었을 뿐이다. 1sp라니. 보통 에일(Ale) 맥주 한 잔을 마셔도 4cp면 되는데 1sp면 두 배 이상의 가격이다. 너무 비싸다.

 “정말 1sp 맞아요?”

 종업원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앤더에게 손만 내밀고 있었다. 난장판인 술집 상황에 정신이 없던 앤더는 일단 잔돈을 모아 10cp를 냈다. 종업원은 ‘깔끔하게 1sp를 낼 것이지 귀찮게 10cp를 내고 있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카운터로 돌아갔고 그제야 앤더는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웩.

 “이딴 쓰레기 같은 맥주를 파는 가게라니.”


2


 하플링(Halfling)인 베르나 티리프(Verna Tealeaf)는 술집 안을 휙 둘러보았다. 오늘은 어떤 바보 같은 놈의 주머니를 털어볼까. 아무래도 장소가 쓰레기 같아. 난장판이 된지 오래인 영웅의 쉼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취해서 말싸움을 하던 두 드워프는 이제 주먹을 휘두르며 본격적으로 싸우고 있었고 멍청한 인간들은 대부분 취해서 테이블에 뻗어 있었다. 하플링 바드 하나가 류트를 띵띵거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고 특별한 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마구 질러대는 소리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싸움판이 더 커지고 정신없어지면 드워프들을 좀 털어야겠군.

 베르나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준비운동을 시작할 무렵, 드워프 둘은 주먹을 더욱 굳게 쥐고 서로의 얼굴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 드워프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드워프를 강하게 밀쳤고 드워프는 다른 테이블 위로 고꾸라지며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술집의 시선은 드워프 둘에게 집중되었다.

 이때다. 베르나는 자그만 몸집을 재빠르게 움직여 드워프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던 자리로 이동했다. 모두들 드워프 둘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어 베르나는 거의 투명인간처럼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르나는 능숙한 손재주로 드워프들의 가방을 찾아 재빠르게 뒤졌다.

 허탕이다. 두 가방을 뒤져 나온 것은 고작 5cp였고 팔만한 물건들도 전혀 없었다. 베르나는 5cp만 주머니에 넣은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이런 쓰레기 같은 술집에 오질 말았어야해. 거지들만 잔뜩 앉아있군.

 베르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엘프(Elf) 여자는 여기 없는 건가? 베르나는 오늘 저녁에 술집 앞에 보았던 엘프를 떠올렸다. 하얀 피부에 세련된 로브(Robe)차림으로 영웅의 쉼터 앞에 서있던 엘프. 분명 이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고 베르나는 마치 홀린 듯이 그녀의 뒤를 따라 이곳에 들어왔다. 베르나가 술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엘프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난장판이 준비되기 시작할 때였다. 저런 예쁜 엘프가 이곳에 앉아 있다면 분명 털어갈 것이 많을 텐데. 분명 귀족(Noble) 출신에 좋은 장비도 가지고 있을 테지. 베르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저렇게 태어났다면.


 베르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러스칸(Luskan)의 부둣가를 떠올렸다. 러스칸은 네버윈터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였고 거리는 도둑과 불량배들로 가득한 범죄의 도시다. 이 동네는 물건을 털리는 놈이 바보고 돈을 뺏기는 쪽이 멍청이야. 베르나는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새어나오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매일 식당 주방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생선 대가리를 턱턱 잘라내며 베르나에게 물었다. 오늘은 얼마를 벌어왔냐? 아버지가 물어볼 때마다 방금 바닥에 떨어진 생선 대가리가 베르나를 쳐다보았다. 베르나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다. 턱. 생선 대가리가 하나 더 떨어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하나 더 늘었다. 이 빌어먹을 항구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해. 알고 있지? 턱. 대가리가 하나 더 떨어졌다. 당장 나가서 생선 배달이나 해서 돈 벌어와. 빌어먹을 생선 대가리들이 베르나를 계속 노려본다. 기분 나빠. 베르나는 네네 대강 대답을 하고 곧장 밖으로 나와 거리로 나갔다. 돈 벌러 나갈 시간이다. 베르나는 어부들이 모여 있는 선착장으로 가는 대신 술집들이 몰려 있는 거리의 뒷길로 향했다. 

 생선 배달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 그런 일로 푼돈을 버는 대신 바보 멍청이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훨씬 즐겁다. 베르나가 처음으로 소매치기를 시작한 것은 항구에서 건달패거리들끼리 크게 싸우던 날이었다. 싸움은 크게 번졌고 근처에 있던 어부들도 몇몇 죽어나가는 통에 베르나는 배달할 생선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 주머니에서 동전이 흘러나와 있는 것을 보았고 베르나는 날렵한 손짓으로 그들의 동전을 자신의 주머니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건달패들은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자그마한 베르나를 신경 쓸 겨를은 전혀 없었다. 결국 그날 베르나는 평소 생선을 배달하는 것 이상의 돈을 긁어모았으며 생선 대가리는 베르나를 노려보지 않았다.

 물건을 털리는 놈이 바보고 돈을 뺏기는 쪽이 멍청이야. 베르나의 타고난 민첩함 덕분에 실력은 점점 늘었고 생선 배달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아버지에 줄 수 있었다. 노려보는 생선 대가리의 수는 점점 줄었고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더 이상 생선 대가리를 자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아버지는 낮술을 마시고 거리에 널브러지는 거리의 바보가 되기로 결정했다. 베르나가 길거리에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날 그녀는 누구나 순식간에 바보로 변해버리는 이 끔찍한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자 이상하게도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 베르나는 거지들이 아니라 부자들을 제대로 털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길바닥의 거지들이 눈에서 사라지고 근사한 옷을 입고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녀석을 털자. 베르나는 경호원 둘을 데리고 멋진 로브를 입고 있는 한 인간을 털어보기로 생각했다. 표정이 멍청한 것이 경호원이 있어도 금방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나는 기회를 포착해 재빠르게 로브 입은 멍청이의 돈주머니를 가로챘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었고 로브 입은 멍청이는 화가 났는지 파이어 볼트(Fire bolt)를 쏘아댔다. 마법을 쓰다니.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처음이다. 베르나는 놀란 채로 정신없이 도망갔고 그녀는 이제 막 남쪽으로 출발하는 대형 캐러밴(Caravan) 무리의 짐마차 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베르나에게 당한 바보 멍청이들은 결국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었고 캐러밴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여유롭게 러스칸 남쪽 네버윈터시로 향했다.

 베르나의 캐러밴 밀행은 이틀 만에 들통이 났지만 그녀의 끈질긴 간청으로 잔심부름이라도 하면서 캐러밴을 따라갈 수 있었다. 캐러밴에는 이곳저곳 많이 떠돌아다니던 상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진실을 조금 섞은 허풍을 듣는 것은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베르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도둑길드(Thieves' Guild)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들은 훔치지 못하는 보물이 없었다. 이 허풍을 들은 베르나는 네버윈터에 도착하면 반드시 길드에 들어가서 활약해 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네버윈터시는 거대했고 도둑길드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자그마한 베르나를 무시하였으며 가끔 대답해 주는 사람도 도둑길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한 번씩 먼저 베르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은 숨소리만 들어도 사기꾼인 티가 났다. 지친 베르나는 수소문을 그만두고 일단은 모험가가 되어 경험을 더욱 쌓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그만 여자 하플링을 무시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한 단련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녀의 자금도 거의 떨어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러스칸의 바보에게서 뺏은 50gp는 가죽 갑옷에 10gp, 날카로운 단도(dagger) 2개에 4gp, 도둑의 장비(Thieves' tools)에 25gp를 썼다. 이미 네버윈터시에서 10일 남짓 생활을 하면서 10gp를 썼으니 이제는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물색한 장소는 영웅의 쉼터라는 뒷골목 술집이었다. 이곳에서 용병 일거리를 얻을 수도 있다고 해서 찾아갔지만 멀리서 쓰러져 가는 건물의 모습만 봐도 바보 멍청이들의 집합소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러스칸의 쓰레기 소굴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때 건물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엘프 여자가 부드러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베르나 앞을 지나갔다. 좋은 향기가 나는 걸? 정확히 어떤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생선 비린내의 가장 반대편에 존재하는 향기가 확실했다. 어째서 저런 사람이 저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베르나는 멍하니 서서 엘프 여자가 걸어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로브에 큰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귀족가문의 마법사(Wizard)로 보였다. 엘프는 문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살짝 쫑긋하더니 이내 끼익 거리는 문 속으로 사라졌다. 왠지 귀여운 걸? 베르나는 이제 여자 엘프에게 관심이 갔다. 엘프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본 엘프는 주변과 과도하게 어울리지 않는 다는 점에서 베르나를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지대에 하얀 토끼어울리지 않게 너무 하얀가 종종 앞으로 뛰어간다면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베르나는 영웅의 쉼터로 들어갔다. 하지만 밖에서 주저하며 멍하니 서있던 탓인지는 몰라도 방금 전의 엘프는 보이지 않았다. 베르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종업원이 신경질을 내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잡고 사과 주스를 주문했다.

 쓰레기들 밖에 없었다. 점점 술집 안은 시끄러워졌고 용병 일을 구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사방에서 술을 마시며 고함을 지르는 자들로만 가득한 술집이었다. 젠장, 이런 곳은 러스칸에 널리고 널렸지. 용병 일은 아무래도 글렀는데, 싸움이나 빨리 났으면 좋겠네. 베르나는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생선 대가리를 치던 술집이 바로 이런 곳이었다. 저녁이 되면 해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것처럼 손님들의 볼도 점점 붉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소리가 높아지고 주먹이 오고 가기 시작하며 좀 더 지나면 본격적으로 무기를 뽑아 싸운다. 술집은 난장판이 되고 가끔은 피가 튀기도 했다. 베르나는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서로 일자리가 없다느니, 부인과 애들이 도망갔다느니, 지도부가 썩었다느니, 내기에서 졌다느니 등등을 떠벌리면서 누가 더 우울한지 내기를 벌이다 싸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문제의 원인이 아닌, 우울 대결을 하는 상대방에게 칼을 겨눈다. 네버윈터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드워프 둘이 누가 더 우울한지 대결을 하다가 주먹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좋아, 사람들이 난리를 칠 때 저 두 놈의 가방을 털어보자.


 하지만 허탕이다. 드워프 두 가방을 뒤져 나온 것은 고작 5cp에 쓸 만한 물건도 없었다. 이대로 밤거리로 나가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베르나는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저 인간이 좀 바보 같아 보이는 군. 술집 한 구석에 힘만 쓰게 생긴 한 인간 남자가 찡그린 표정으로 맥주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마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 놓은 상태로 드워프 둘의 싸움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시골에서 올라온 바보가 확실했다.

 베르나는 난장판의 소란함에 숨어서 재빠르게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베르나가 다가온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너무 쉽잖아. 도시에서는 가방을 바닥에 놓고 다니면 안 된단다, 시골 바보야. 베르나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상태로 손을 쭉 뻗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뒤지는데 짤그랑 짤그랑 동전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거리가 애매했다. 조금만 더 접근하면 소리 없이 깔끔하게 빼낼 수 있었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가까이 접근했다간 아무리 촌뜨기 바보라도 알아챌 것이다. 베르나는 조심조심 가방을 뒤지면서 동전을 찾아냈다. 왠 잔돈이 이렇게 많담. 베르나의 작은 손 사이로 동전들이 오락가락하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기 시작했다. 짤그랑 짤그랑.

 “어디서 이렇게 소리가 나는 거야?”

 앤더가 자신의 가방이 놓인 곳을 바라보자 한 작은 여자 하플링이 손을 뻗어 낑낑대는 것이 보였다. 하플링이 자신에게 윙크를 했다.

 “이런 망할, 도둑놈이!”

 베르나는 재빠르게 자신의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문 밖으로 도망갔다. 뒤에서 앤더의 씩씩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베르나는 자신의 빠른 다리에 속도를 냈다. 해도 졌으니 어두운 골목 속으로 숨으면 저런 둔한 녀석쯤은 금방 따돌릴 수 있겠지.


 쿵!


 너무 급하게 달려왔던 걸까. 베르나는 본격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가속도를 내려 했지만 갑자기 앞에 등장한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악!”

 베르나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쓰라린 고통이 온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망할 도둑놈!”

 베르나를 뒤따라 문을 박차고 씩씩거리며 뛰어 오던 앤더는 순식간에 따라붙어 바닥에 넘어진 베르나에게 다가왔다. 우악스러운 팔의 힘으로 멱살을 잡고 단번에 베르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베르나의 발이 허공을 가르며 바둥거렸다.

 “켁켁,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요. 제가 돈은 바로 돌려드릴테니까요. 켁켁, 이거 좀 살살 놔주시면…….”

 베르나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떻게든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내 돈을 훔쳐가? 건방진 놈! 어라……? 이게 뭐야?”

 분노하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놈이 왜 이러지? 베르나는 순간 이상했으나 남자가 당황한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베르나의 오른쪽 얼굴 위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놀랐는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살짝 느슨해졌다.

 “어라, 내가 이렇게 크게 다친 건가?”

 베르나도 자신이 아픈 것에 비해 피가 너무 많이 난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차, 방금 전에 뭐에 부딪혔는데 그건 도대체 뭐지?

 그 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으……. 거기 누가 좀……. 도와주시…….”

 앤더와 베르나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붉은 피가 가득한 가운데 남루한 차림의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앤더는 일단 베르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남자를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베르나의 멱살을 굳게 쥔 채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내 말이 들립니까……?”

 앤더가 물었지만 남자의 대답은 없었다. 갑자기 베르나가 앤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저기……. 힘센 아저씨……?”

 “왜 갑자기 난리야?”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저기 앞에……. 뭔가 있어요…….”

 “대체 뭔 소리가 난다는 거야?”

 앤더가 눈을 껌뻑이며 어두운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크르릉 크르릉. 정말 어떤 소리가 난다. 크르릉 크르릉. 앞에 동네 개라도 있는 건가? 크르릉 거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르릉 크르릉. 확실히 뭔가 오고 있다. 저벅저벅. 이제는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어느새 앤더는 주먹 양쪽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베르나는 조금씩 켁켁 대면서도 앤더와 같이 어두운 골목 속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릉. 발자국 소리는 멈추고 크르릉 대는 소리가 사라졌다. 기분 나쁜 침묵.


 크르릉!


 날카로운 발톱이 어둠을 뚫고 앤더와 베르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