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sque of the Red
3
괴물이 앤더를 향해 덤벼들자 그는 반사적으로 베르나를 벽쪽으로 던져버리고 괴물의 두 팔을 마주잡았다. 그러자 도마뱀 같은 머리를 한 괴물이 침을 질질 흘리며 앤더를 향해 으르렁댔다. 괴물의 머리 모양은 코볼트(Kobold)와 유사했지만 코볼트에 비해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 보통의 코볼트 크기라면 이미 앤더가 베르나를 던져버린 것처럼 한 번에 던져버릴 수도 있었지만 덤벼든 괴물의 크기는 일반 사람정도의 크기였다. 게다가 앤더와 팽팽하게 힘을 겨루고 있을 만큼 힘이 셌다.
“이런 망할 괴물이!”
앤더의 힘도 보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녀석을 거꾸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놈의 괴물, 곧 때려잡아주마.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앤더가 제압하려고 할 때였다.
슉!
앤더의 얼굴 옆으로 한 줄기 강렬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괴물의 이마 한가운데에 화살이 꽂히며 어이없이 푹 쓰러지고 말았다. 승부는 의외로 어이없게 끝나고 만 것이다. 괴물은 바닥에 쓰러졌고 앤더는 화살이 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한 엘프 경비대원이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분은 없으신가요?”
내가 힘으로 충분히 제압하려 하는데 오히려 당신의 화살이 위험했소. 앤더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경비대원은 쓰러진 괴물에게 달려가서 괴물이 죽었는지 확인했다. 숨이 확실히 끊어졌고 죽은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다른 외상은 없군요……. 아, 저는 네버윈터 경비대 소속 아드릭(Adrik)이라고 합니다.”
아드릭이 주변을 둘러보니 꽤나 어마어마한 상황이었다. 로브를 쓴 한 남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베르나는 술집 벽면에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아드릭을 뒤따라온 경비대원들도 현재 상황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아드릭은 경비대원들에게 지시해서 몇 명은 괴물의 시체를 치우고 몇 명은 다친 사람을 술집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했다. 벽면에 구겨져 있던 베르나가 일어나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경비대원님! 저 인간이 절 때리고 벽으로 던졌다구요! 무서운 깡패에요!”
“뭐라고? 이 하플링은 내 돈을 훔쳐간 도둑놈이오!”
앤더가 화를 내며 다시 맞받았지만 경비대원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드릭은 오히려 앤더와 베르나의 이름을 적어가며 두 사람이 괴물을 발견한 경위를 물었다. 앤더와 베르나가 서로 싸우며 각자의 주장을 하자 짜증난 술집 주인은 오히려 앤더와 베르나 둘을 감옥에 처넣으라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싸움은 다시 세 사람의 다툼이 되었고 두 드워프의 싸움이 끝나 지루했던 술집의 관객들은 그들의 싸움을 즐겁게 관람했다. 아드릭이 셋을 말리고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말했다.
“자, 계속 싸우시면 세 분 모두 감옥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드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감옥 이야기가 나오자 세 명이 동시에 흠짓 놀라는 틈을 보였고 아드릭은 분위기를 이어 계속 말했다.
“지금 여기 크게 다치신 분이 있으니 일단은 이 여관에서 안정화를 시키고 머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 두 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죠? 앤더, 베르나. 좋습니다. 경비대에서 직접 맡기에는 저희도 지금 인력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도 빈방을 하나 좀 마련해 주시죠. 제가 신전에 의뢰해서 내일 이분을 치료할 클레릭(Cleric)과 함께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 모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의바른 말투였지만 은근히 셋을 압박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여관 주인의 안내에 따라 다친 남자를 방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그동안 단단한 팔근육을 자랑하던 여종업원이 앤더와 베르나에게 확실하게 주인의 뜻을 전달했다.
“공짜는 없어. 하루 숙박비는 5sp야.”
순간 앤더와 베르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거 완전 꼬였군.
“대장님, 이미 놈들은 사라지고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녀석만 겨우 잡아올 수 있었습니다.”
경비대장인 드워프 팔라딘(Paladin) 가르다인 아이언피스트(Gardain Ironfist)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자리에 앉아 아드릭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음, 수고했네. 어차피 나머지 괴물 두 놈도 잡았다고 하더군. 생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곧 괴물의 정체를 밝힐 수 있겠지……. 영웅의 쉼턴지 뭔지 하는 그 술집은 별 문제 없던가?”
“네, 괴물들이 술집 안으로 들어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 남자가 습격을 받아서 크게 다쳤고 근처에 한 인간 남자와 하플링 여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아가씨가 계신 술집에 모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가르다인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다행이로군. 홀리미온(Holimion) 집안의 엘프 아가씨는 별 탈이 없겠지? 뭐, 자네가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니 특별히 걱정은 없지만……. 아무튼 괴물과 관련된 셋도 잘 감시하도록 병력을 배치하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아드릭이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가르다인은 다시 한 번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담배 안의 연기가 자신의 온 몸에 퍼지는 느낌을 한껏 느끼자 과거 모험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별일이야 없겠지. 가르다인은 그저 단순한 사건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네버윈터 중심부에 위치한 티르(Tyr)의 신전에는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신에게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 모인 클레릭 중에는 쏘라딘 배틀해머(Thoradin Battlehammer)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사제(Acolyte)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모험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오늘 그의 기도는 평소보다 더 길고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어지러운 세계에서 지켜야 할 것은 정의입니다. 티르의 신께서 나약한 저를 지켜주시길! 쏘라딘은 이전에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꿈을 다시금 떠올렸다.
당시 깊은 명상과 기도로 지쳐있던 상태에서 쏘라딘은 계시와도 같은 기묘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 속에서 쏘라딘은 평소처럼 신전을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 전체가 가벼워짐을 느끼면서 마치 공중에 뜬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중력이 사라지고 ‘정신의 공간’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은 여러 보이지 않는 힘들이 교차하는 물질계(Material Plane)를 초월한 세계였다. 이곳은 어떤 세계일까. 쏘라딘의 앞으로 점점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신의 공간을 떠돌고 있는 금속성의 천칭(天秤)이었다. 공평한 세계. 천칭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짐이 없는 완벽함을 갖춰야 했고 그것이야 말로 티르의 신이 요구하는 정의였다. 하지만 어떻게 공평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쏘라딘에게는 늘 고민이었고 사제 생활에서의 불만이기도 했다. 공간에서 수평을 이루지 못한 저 천칭에게 완벽한 수평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 때 아래쪽―아마 보통의 물질계였다면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에서 하나의 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둥은 점점 커지면서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망치의 모양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망치의 머리 부분이 완성되자 망치는 공중을 떠돌던 천칭 근처로 다가갔다. 공중을 떠돌던 천칭은 망치의 머리위로 올라가자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완벽한 수평을 유지했다. 바로 이것이다. 정의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한 망치의 바탕 아래 공평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쏘라딘은 다시 한 번 티르의 상징(망치위의 천칭, balanced scales resting on a warhammer)에 대해 깨달음을 얻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쏘라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플린트(Flint) 사제가 다가왔다. 그는 쏘라딘의 선배 사제로서 쏘라딘 보다 50년 정도 먼저 사제로 지냈던 마음씨 좋은 드워프였다.
“표정이 아주 좋구만. 이제 여행할 채비는 끝난 것인가?”
“물론입니다. 플린트님. 티르의 신께서 제게 용기와 함께 깨달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쏘라딘의 얼굴을 본 플린트가 말했다.
“그래, 100살 정도면 여행을 떠나기에 아주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닌 적당한 나이겠지. 자네라면 충분히 잘 해낼 것이라고 믿네. 안 그래도 자네가 오늘부터 모험을 떠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 말인데……. 신전에 아드릭이 와있다네. 그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아드릭이 어쩐 일입니까? 요즘 경비대원들이 엄청나게 바쁘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신전에 올 여유도 있습니까?”
쏘라딘은 아드릭이 정의로운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엘프라는 사실은 조금 불편했다. 게다가 그는 엘프면서 드워프들에게 흔한 이름을 쓰고 있어 더욱 이상했다.
“그래, 요즘 코볼트를 닮은 괴물들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그 괴물에 부상당한 자가 있다고 하네. 모험을 떠나려고 준비하는 자네가 가서 치유를 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괴물에게 부상을 당했단 말입니까?”
괴물에게 부상을 당했다는 말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최근에 도시 안에 괴물들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쏘라딘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괴물들은 퇴치해야 할 일종의 ‘악’이었다.
“영웅의 쉼터라는 곳에 부상자가 있는 모양이네. 자네의 치유 마법이라면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괴물에게 부상을 당한 사람이라.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모험을 떠나려는 자네에게 충분히 흥밋거리가 될 것 같아서 특별히 얘기하는 것이네.”
플린트가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의 말하는 태도로 보아 어차피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되지만 특별히 쏘라딘에게 차례를 배려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서 짐을 정리하고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당치도 않은 말일세. 어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게.”
쏘라딘은 플린트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자신의 가방을 챙겨 아드릭과 함께 영웅의 쉼터로 향했다.
4
아드릭과 쏘라딘은 영웅의 쉼터에 도착하여 부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드릭은 주인에게 앤더와 베르나도 방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군. 일단 상처 치료(Cure Wounds)마법을 사용해 보겠소.”
쏘라딘이 주문을 외우자 침대에 누워있는 부상자의 몸 부근에서 따스한 기운이 돌았다. 부상자는 점차 회복이 되었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앤더와 베르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 여기가 어딥니까?”
부상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는 네버윈터시에 있는 작은 술집입니다.”
쏘라딘이 부상자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주변에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 부탁은 앤더와 베르나에게 넘어왔다. 두 사람은 한참 다투다가 베르나의 화술에 밀린 앤더가 물을 가져왔다.
“음……. 체력이 회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이 남아 있소. 이건 약재상의 해독제를 구하거나 고급 마법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쏘라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부상자는 그러한 걱정은 괜찮다는 듯 침대에서 상체를 세워 일어났다.
“몸이 많이 회독된 것 같습니다. 괴물들이 제게 뭐라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상자의 상태가 좋아보이는 것이 확인되자 아드릭이 물었다.
“부상당하신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어쩌다가 괴물에게 당하게 된 겁니까?”
부상자는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걱정된 표정으로 쳐다보는 쏘라딘, 호기심 가득한 채로 지켜보는 베르나, 의심의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드릭, 그리고 멍하니 물병을 들고 서있는 앤더가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하세요.”
앤더가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부상자는 물을 꿀꺽꿀꺽 삼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란달 이븐우드(Randal Evenwood)라는 나무꾼입니다. 네버윈터 숲에서 나무를 해서 겨우 먹고 살고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 숲 주변에서 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밤이 되면 정체모를 것들이 자꾸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산짐승과는 다른 이상한 존재 말입니다. 어제는 평소보다 나무를 늦게 시작해서 해가 진 다음에야 겨우 나무를 마칠 수 있었지요. 그게 실수였습니다.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나 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괴물들을 피해서 도망쳤고 가까스로 이곳까지 도착해서 두 분에게 구출된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를 구해주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란달이 앤더와 베르나에게 감사를 표하자 앤더의 뺨이 살짝이 붉어졌다. 평범한 나무꾼이라. 쏘라딘은 란달이 평범한 나무꾼이라고 말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아드릭이 다시 란달에게 물었다.
“괴물을 만난 위치는 어디쯤이죠?”
“괴물을 만난 건 네버윈터 숲 속이어서 저도 정확이 위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제가 보통 가는 위치가 호테나우 산(Mount Hotenow)자락이 이어지는 부근이긴 합니다.”
“호테나우 산자락이 이어지는 곳이라……. 그 외에 괴물에 대해 특별히 알고 있는 사실은 없습니까?”
아드릭이 계속 물었다. 란달은 침착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너무 황급하게 도망을 치는 바람에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괴물을 피해 도망을 쳐왔을 뿐입니다.”
“괴물이 나타난 곳은 호테나우 산 부근이라……. 란달씨 이 두 분은 안면이 있나요? 아니면 처음 보는 분들인가요?”
아드릭이 앤더와 베르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제 처음 본 분들입니다. 사실 제대로 본 것은 오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제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아드릭이 앤더와 베르나에게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물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이곳에 온 경위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말싸움을 벌일 징조를 보이자 아드릭은 재빨리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네버윈터 전체에 경계령이 내려져 있어 경비대들이 여기저기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 분에게 별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괴물들과 만난 분들이기 때문에 저희 경비대에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곳에 머물면서 행동은 삼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아드릭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쏘라딘이 말했다.
“나는 이분의 독을 좀 더 연구해 보려고 하네. 알아내는 것이 있다면 보고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일처리가 쉽겠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드릭이 가벼운 목례를 하고 떠나자 방 안은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망했군. 뭐 일거리라도 있나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 범죄자 취급이나 받고.”
베르나가 투덜대며 일어나자 앤더가 다시 발끈했다.
“뭐라고? 진짜 도둑질을 한 주제에? 당장 감옥에 안 간걸 다행으로 알라고! 나야말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엉망이 됐어!”
“어허, 두 사람 또 싸우려 드는 건가? 환자 앞에서 싸우지 말고 나가서 싸우게나.”
두 사람이 싸우려들자 쏘라딘이 말렸다. 그러자 갑자기 란달이 말했다.
“저……. 혹시 두 분은 모험을 떠나려고 이곳에 오신 겁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란달에게 향했다. 쏘라딘 역시 ‘모험’이란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제가 의뢰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혹시라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란달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차분했다. 베르나가 물었다.
“왜 아까는 이런 말 안 했어요?”
“경비대원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방금 전 경계령이 내려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난 당신이 평범한 나무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소. 어떤 일을 제안하고 싶은 거요? 당신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쏘라딘이 적극적으로 물었다.
“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군요. 혹시 일에 관심이 있으시면 엿듣지 마시고 직접 이곳으로 와서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란달이 크지 않지만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매우 명확하게 귀에 꽂혔다. 엿듣는 사람이 있다니? 쏘라딘이 놀라는 가운데 방안으로 로브를 입은 한 여자 엘프가 들어왔다. 베르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문에서 보았던 엘프가 바로 지금 눈앞에 서있는 것이다. 엘프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베르나는 그녀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한 번 귀엽다고 생각했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제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전 리아 홀리미온(Lia Holimion)이라고 합니다.”
엘프 여자는 당황한 듯 했으나 최대한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홀리미온, 홀리미온…….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자, 이렇게 네 분이라면 괜찮은 팀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자리에 다들 앉아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네 사람이 란달을 중심으로 모이자 란달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실 저는 어떤 단체의 정보원입니다. 일단 소속을 밝히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그냥 특수 정보원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저희 단체에 최근에 이상한 괴물들이 나타난 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저는 그들의 정체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조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그들이 네버윈터 숲과 호테나우 산 주변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 지역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같은 정보원인 애쉬(Ash)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네버윈터 숲을 지나고 있는데 괴물들에게 습격을 당한 겁니다. 결국 저는 크게 다쳐서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이지요. 제가 여러분들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저 대신 애쉬(Ash)에게 연락을 취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경비대원에게 못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뭐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거라면?”
앤더가 살짝 투덜대는 투로 말하자 쏘라딘이 반박했다
“경비대원들은 그런 한가한 일을 하지 않지.”
란달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말했다.
“이런 일은 공식적인 루트로 흘러가면 조금 곤란한 면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과 같은 모험가 분들께 의뢰를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공짜로 부탁드리는 것은 아니지요. 사례는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란달은 자신의 허름한 옷을 뒤적였다. 란달의 옷 속에는 동전소리가 나지 않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주머니가 있었다. 란달의 손에서 반짝이는 금화가 나타났다. 총 80gp가 란달 앞의 테이블에 나타났다.
“이것은 선금입니다. 한 분당 20gp면 나쁘지 않은 금액이라고 봅니다.”
금화가 반짝이자 베르나의 눈도 반짝였다. 앤더는 이제 뭔가 일이 제대로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일을 하는 데 어째서 네 명이나 필요하죠?”
리아도 질문에 참여했고 란달은 차분히 설명했다.
“지금 괴물들에게 제가 당한 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 쪽에서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놈들도 정보들이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 쪽 정보원도 안전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게다가 저도 네버윈터 숲에서 당했습니다. 의외로 숲은 위험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한두 명으로는 분명 위험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네 분 정도 함께 하신다면 어느 정도 안심이지요. 파티 구성도 아주 좋군요.”
“좋습니다. 뭐, 한 번 가보도록 하죠. 별거 있겠습니까?”
앤더가 씩씩하게 말하자 란달이 다시 한 번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지도를 구해 주시면 제가 오두막의 위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한 통 써드리도록 하지요. 애쉬에게 제 편지를 전해주시길 바랍니다만……. 혹시라도 애쉬가 위험에 처해있다면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사람은 란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란달은 술집 주인에게 지도를 구해 도시에서 약 35마일(mile)정도 떨어져 있는 오두막의 위치를 표시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밀봉하여 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일을 잘 처리해주신다면 50gp씩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 꼭 서둘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란달은 네 사람에게 한 번 더 당부했다. 네 사람은 자신의 장비를 챙겨서 바로 출발하기로 이야기했다. 앤더와 베르나는 각자의 방으로 향했고 이미 모든 장비를 챙긴 리아와 쏘라딘은 술집 카운터의 앞의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렸다. 쏘라딘은 자신이 란달을 관찰한 결과를 종이에 기록하고 있자 리아가 말했다.
“저 사람의 말을 믿나요?”
쏘라딘은 기록을 멈추고 리아를 쳐다보았다. 가녀린 여자 엘프로 보였지만 강렬한 눈빛은 그녀의 내적 단단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요? 엘프들은 의심이 많구만. 당신도 관심이 있어서 몰래 듣고 있었던 것 아니오?”
“네, 관심이 가서 엿들은 것은 사실이지요. 그 사람의 말은 흥미로웠으니까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어요. 여러 가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죠.”
쏘라딘은 리아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의심부터 하는 건지 모르겠군. 엘프들은 원래 의심이 많소?”
리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쏘라딘은 자신의 기록을 마무리한 후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앤더와 베르나가 나왔다. 앤더가 신나게 외쳤다.
“자, 이제 출발입니다!”
란달이 말한 오두막(동그라미)
오두막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네버윈터 숲까지 도착하는 길은 한적하고 평온해서 네 사람이 서로를 소개하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기에 적절했다. 앤더와 베르나, 쏘라딘이 각각 자신의 소개를 했고 마지막 차례는 리아였다. 리아는 네버윈터의 유명한 귀족 출신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 모험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베르나가 굳이 이런 낡은 여관에서 지내는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평범한 들판길이 사라지고 본격적인 숲 속으로 진입하면서 위치와 방향 확인을 담당하는 것은 리아였다. 리아는 란달이 건네준 지도로 길을 잃는 법 없이 정확하게 나아갔다. 가는 도중 늑대 몇 마리를 만나기도 했으나 앤더가 앞장서서 단번에 물리쳤다. 서두른 덕분에 란달이 알려준 오두막 부근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까지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물줄기를 따라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오두막이 나올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좀 더 경계하면서 나아가죠.”
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쏘라딘이 자신의 워해머(Warhammer)를 고쳐잡으며 동의했다.
“맞는 말이오. 괴물 같은 놈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네 사람은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조금 느리지만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갔다. 숲 속은 고요했으며 오직 들리는 것은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과도하게 경계하는 거 아닙니까? 주변에 뭐 아무것도 없잖아요?”
앤더가 자신의 롱소드를 한 번 휘둘러 보였다. 옆의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소리 없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쳇, 힘쓰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구만.”
베르나가 빈정거리자 앤더가 발끈했다.
“이 도둑놈의 꼬맹이가!”
“쓸데없는 말들은 삼가주세요.”
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쩌자고 이런 사람들과 같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리아는 답답했다. 분명 내가 조심해서 나가자고 말하지 않았나.
물이 흐르는 소리는 눈치 채지 못할 사이에 사라지고 숲 주변은 고요했다. 한동안 네 사람의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것은 그들의 발자국 소리 뿐이었다.
“저기 오두막이 보여요.”
베르나가 말하면서 좀 더 총총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란달이 말했던 숲 속의 오두막이 네 사람의 눈에 나타났다. 리아는 지도를 다시 한 번 란달이 알려준 위치를 확인했다. 그가 알려준 곳과 정확히 일치하는 곳이었다.
“앞에 특별히 위험한 건 없어 보이네요.”
어느새 맨 앞에 앞장서 있는 베르나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앤더가 자신있게 오두막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리가 너무 겁을 먹고 있거라니까요. 이봐요, 거기 누구 있습니까?”
그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대답은 없었다. 리아는 주변이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도 없나? 왜 대답이 없지?”
앤더는 중얼거리며 오두막의 문으로 향해 노크를 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봐요 애쉬? 거기 있어요?”
앤더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남의 집 문을 마구 열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무례한 행동이에요.”
리아가 앤더를 뒤따라가며 나무랐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오, 이런!”
오두막 안의 광경을 보자마자 앤더는 소리쳤다. 앤더를 맞이한 것은 하프시코드(harpsichord) 위에 엎어진 채로 죽어 있는 한 남자였다.
(계속)
실제플레이라고 가정 하면 엘프가 (숨어있을게요) 라고 하고 선언하는거 상상되서 웃기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