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래상자, 그러니까 샌드박스 관련 잡글 하나 끄적여 봄.

일단 아직도 좀 착각하는 사람 나오는 거 같아서 다시 써 보는데, 원래 레일로드의 의미란 "마스터가 캠페인이 자기 계획대로 진행되도록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the GM takes any measure necessary to ensure that there is only one direction the campaign

may proceed — his planned direction)"에 가까움.


쉽게 말해서 네가 시나리오 보고 따라하면서 최대한 그 전개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진행 도중에 손을 쓰는 그 모든 것들이 레일로드라는 형식에

속할 수 있다는 거임. 반대로 플레이 도중 플레이어의 결정에 따라 마스터가 자신이 정한 계획을 포기하거나 아예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면서

원래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진행이라도 그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게 소위 샌드박스 스타일의 진행이 됨.


실패에서 가능성 보기

샌드박스에서 실패는 곧 이야기를 새롭게 비틀 수 있는 요소임. 왜냐면 마스터가 실패의 결과를 묘사하고 그게 어떻게 진행될지 다루다보면

원래 계획과는 아주 멀리 가기 쉽고, PC들의 입장에서도 대개 성공을 기대하고 진행했는데 그게 실패하면 당연히 실패해서 달라진 상황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임. 이걸 수습하다 보면 원래의 이야기는 아주 아주 멀리 갈 수 있다는 거지.


<간단한 예시>

이 분야에서는 끝내주는 명작이 하나 있음. '슬라이딩 도어즈'라고..... 말 그대로 지하철을 제때 타는 데 성공하냐 마냐로 사람 인생이 완전히

갈리는 전개를 보여주는 영화임. 영화에서라면 당연히 두 전개 모두 각본을 짜 놓은 거지만, TRPG에서는 마스터가 저 상황의 결과를 보고서

이야기를 만들어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전개를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임.


대가는 확실하게 받기

실패 자체는 이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음. 문제는 실패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데,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거임.

김조커 선생은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너를 이상하게 만들 뿐이다(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 stranger)"랬는데,

이거는 뒤집어 보면 죽을 때는 그냥 죽는다는 그런 거임, 그리고 그런 경우 '룰적 안전장치'가 없다면 당연히 진짜로 죽여야 해. 봐주지 마라.

물론 그 때문에 이런 방식을 쓰는 룰들은 한 두 번의 실패로는 안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안전장치를 준비해 주는 게 일반적임. 니체의 원본을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룰적 지원 없이는 죽을 뻔 한다고 네 캐릭터가 강해질 리가 없기 때문"이지. 사이어인이면 모를까.


<간단한 예시>

아카네 "그러면 저는 폭탄을 설치하고 그 옆의 휘발유가 든 드럼통에 바로 불을 붙일게요."

마스터 "네, 그러면 바로 옆에서 터질 거니 피해 입을테고, 그 정도 피해면 한큐에 황천길 구경할 수 있을 텐데 괜찮나요?"

아카네 "까짓거 해 보죠. 봄바!"

(이하 생략)

마스터 "저런. 아카네는 그 자리에서 폭발에 휘말려서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아카네 "뭐... 뭐 며칠간의 여유 그런 거 안 주나요...... 즉시 죽는 건 좀 그런데..."

마스터 "그러면 며칠간 내장이나 사지가 부족한 상태로 전신화상으로 고통받다 죽으세요."

(이하 생략)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기

쉽게 말해서 내가 "샌드박스"를 표방한 이상 내 예상 / 의도와 다른 전개가 나올 경우에는 거기에 관련된 계획은 버리거나 고칠 준비를 해야 함.

그게 싫으면 넌 레일로드야. 그렇다고 계획을 아예 안 세우는 거도 위험한데, 왜냐면 네가 중요한 상황마다 일일이 새로운 계획을 파바박하고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전자두뇌라는 보장이 없거든. 그렇게 중요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진행이 버벅거리면 다른 사람들이나 너나 샌드박스 쪽이

오히려 시나리오만 보면서 무난하게 따라가면 되는 레일-로드만 훨씬 못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을 테고.


<간단한 예시>

"죠르노"와 "부챠라티", "나란챠" 등이 "트리시"를 경호하는 임무 도중 판정에 실패해서 트리시가 죽었다고 치자.

마스터 "이런, 트리시가 죽어버렸군요. 따라서 여러분이 보스에게 받은 임무는 실패입니다"

나란챠 "에, 그런 건 예의상 좀 살려주는 거 아니야? 판정 몇 번 실패했다고 애가 죽으면 어떡해?"

마스터 "그런 행동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어쨌든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임무에 실패했으니 도망가야겠네요."

죠르노 "그럼 죽음이라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보스 같은 건 안 나오는 건가요?"

마스터 "그러니까 그런 거 아마 없을 거라고요."

(이하 5부 끝)


자료를 준비하고 모아두기

샌드박스에서 버리고 고치라는 건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게 아님. 그보다는 다양한 "소재"를 만들어놓고, 이게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서 중요한 판정 결과에 맞춰서 활용하는 게 더 일반적임. 대표적인 예로 ToC의 아미티지 파일즈 같은 서플먼트나 혹은 아포칼립스 월드

2판에서 국면 개념 대신에 나온 위험 지도 같은 개념을 떠올리면 될 거 같음.


<간단한 예시>
눈 덮인 산장에 모인 등산객들을 모아놓고 산장 주인 "모노쿠마"가 산장 시설에 대해서 소개를 한다고 치자.

모노쿠마 "저기에는 접이식 침대가 있고, 옆의 상자에는 전기 안마기가 들어있고, 찬장에는 흥분제가 들어있어. 그리고 또.... "

에노시마 "대체 왜 귀찮게 우리를 모아놓고 이런 것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짓을 하는 거야?"

모노쿠마 "그야 너희가 뭘 할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런 게 있으니 필요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거지!"

(이하 생략)


상식과 질서라는 '벽' 구축하기

"샌드박스"라고 해서 플레이 내부 세계관의 상식과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님. 아, 아포칼립스 월드 같은 거면 좀 많이 없겠다. 따라서 일단 네가

샌드박스 안에서 내놓는 전개는 그 세계관 내에서 제시된 상식이나 규칙을 어느 정도는 따라야 함. 문제는 이게 언급된 적이 없다면 충돌이

약간 있을 수 있으니 그런 걸 적용하기 전에는 이야기를 해 두는 것이 편함. 일단 이게 내부에서 막 고무공처럼 튀는 플레이어들의 선언을

저지하거나 통제하는 최후의 저지선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


<간단한 예시>

라그나 "그러면 저는 의뢰인을 죽이고 시체를 창 밖으로 던져버리겠습니다."

마스터 "왜요?"

라그나 "사실 저는 의뢰인을 죽이고 가진 돈만 손에 넣을 생각이었어요."

마스터 "네. 경찰이 발견해도 괜찮겠다면 그러세요."

세츠나 "그러면 의뢰인이 가져온 술이나 다들 한 잔씩 하죠."

(이하 생략)

마스터 "여러분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나오자 밖에는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고 뒤에는 여관 주인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라그나 "이게 무슨...."
마스터 "그럼 창 밖으로 시체가 던져진 지 한참 됐는데 그 사이 경찰들이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하 생략)


뭐 이 정도면 샌드박스를 그럭저럭 탈 없이 굴리는데 필요한 건 대충 다 나온 거 같다... 근데 솔직하게 마스터로 자신 없으면 그냥 괜찮다 싶은

사용 시나리오 하나 펴놓고 레일로드나 굴려. 그게 수백 배쯤 나을 거임.


한 가지 더 추가 - 플레이어들의 말을 들어 보기

들어 주기가 아니라 들어 보기다. 항상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특히 샌드박스에서는 플레이어들의 선택에

대해서 대부분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하는데, 바로 플레이어들의 "의도"임. 왜냐하면 특정한 선택에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다면 결과에 따라서

벌어질 일은 그 의도와 엮이지 않을 수 없거든. 다만 이게 들어 보기지 들어 주기가 아닌 이유는 꼭 그렇게 흘러가야만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임.

뭐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 갈 거다 식으로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약속하거나 그런 게 아닌 이상은 말이야. 그러다보니 판정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이야기가 꼬일 수 있고, 그 다음에는 근성으로 재도전을 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개할 수도 있음.


<간단한 사례>

"메살라"가 기와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스라엘군의 행진을 구경하고 있다고 치자.

마스터 "네, 지붕은 어제 내린 비로 축축합니다.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잘 잡아 보세요."

메살라 "어, 이거 부분적 성공인데 어쩌죠?"

마스터 "네. 그러면 메살라는 무사하지만 대신 밟았던 기왓장 하나가 아래 행진하던 장군의 어깨에 떨어집니다."

이스라엘군 "저놈 잡아라!"

(이하 생략)

마스터 "이스라엘군은 금방이라도 메살라를 때려 죽일 거 같은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나요?"

메살라 "아니 이건 고의가 아니었잖아요. 일단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설득을 시도할게요."

마스터 "저런, 설득도 실패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이하 생략)


이 상황에서 "메살라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과 "장군의 어깨를 맞춘 것"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냐에 따라서

마스터가 받아낼 설득 실패의 대가의 규모가 달라질 거임. 단순한 사고하고 저격 실패는 전혀 다른 문제잖아?

그리고 만약 마스터와 메살라 사이에 온갖 역경을 뚫고 장대한 여정을 거치는 모험하기 같은 게 정해져 있었다면

마스터는 이 사건이 메살라의 장군 저격이었다고 우기는 NPC를 투입해서 메살라를 역경에 밀어넣을 수 있겠지.


이 글은 신데마스 / 블레이블루 / 건담 OO / 단간론파 / 죠죠의 기묘한 모험 5부 / 다크 나이트 / 전차 경주가 끝내주던 고전 명작 영화의 원작 등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