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한 번 풀어봄

테마는 먼 미래 배경인데 과학적인 요소는 거의 없으니 SF라고는 말 못하겠네여

포스트 아포칼립스, 코즈믹 호러, 미스테리가 테마인 이야기인데,

너무 분량이 커져서 실제 게임을 만들 때는 이 스토리가 결국 완전히 배제됐었어요


웹하드 뒤지다가 발견했는데, 게임 시놉시스라 정리는 안 되어 있었지만 대충 단편 느낌으로 리메이크 해보니까 시간 떼우기 좋더라고요

그냥 쓰고 남기기는 그렇고 누구 보여주고는 싶으니 여기에나 한 번 올려봄

우선 실시간으로 쓰고 있는데 지금 여기까지만 썼어요.

많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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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일어난다.


남자가 일어난 곳은 생명 유지 캡슐로 보인다. 남자는 알몸이며, 금속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방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파이프, 철근, 그리고 알 수 없는 기계와 모니터 들이 놓여져 있다.


남자는 이 시설이 뭔지 모른다. 그 전에, 남자는 아는 것이 없다. 언어도, 활자도,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하지만 남자의 머릿 속에는 한 가지의 관념만 새겨져 있다.


'멸망을 가져와라.'


남자는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이 문장 마저도 언어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그 관념만이 머릿 속에 박혀 있을 뿐.


남자는 얼마 간 그저 앉아만 있다가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그의 첫 행동은 방 안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는 것. 남자가 방법을 어떻게 아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차가운 것은 매한가지다.


모니터에 무수히 많은 활자가 뜨고, 얼마간 활자를 주시한 남자는 완벽하게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남자는 컴퓨터에 담겨진 각종 화기 사용법을 숙지한다. 어째서 그런 데이터가 담겨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모든 데이터를 숙지하려 노력한다.


문 밖에 나가자 어둡고 넓은 공간과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복도가 그를 기다린다. 전체적으로 금속으로 이루어지고 복잡한 구조물이 난잡하게 얽혀져 있는 이 시설이 어째서 존재하는 걸까? 그는 처음으로 의문을 품는다.


의문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는 곧 땅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을 목격한다. 찢어져 흩어진, 명백한 인간의 시체들, 어떤 것은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하고, 어떤 것은 언제 죽었는지 모를 것들이다. 부패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먼 곳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맨 발이 차가운 금속 바닥을 밟는 소리,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생기 없는 눈이 제일 먼저 보인다. 남자는 그 인간에게서 반가움보다는 본능적인 적대를 먼저 느낀다.


그 인간은 총구를 남자 쪽으로 겨눈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며 근처에 널부러진 총을 집어 들고 상태를 확인 한다. 두 발이 장전 되어 있는 더블 배럴 산탄총, 근처에 널부러진 12게이지 탄을 집어들고 몸을 내밀어 사격을 시작한다.


총격을 받은 상대는 몸을 비틀거리지만 여전히 적의를 드러낸다. 남자가 두 번째 사격을 준비할 때, 갑자기 검은 무언가가 그 인간을 덥친다.


검은 무언가는 그 인간을 사정 없이 찢어 놓는다. 조금 전에 봤던 시체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나서 검은 것이 몸을 일으킨다. 아니 사실 알 수 없다. 검은 것은 일으킨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그림자를 조각내서 아무렇게나 뭉친 다음, 늪 속에서 수 년간 절였다가 꺼낸다면 저런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었던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뭉쳐서, 검고 끈적거리게 된 것 같은 형태가 남자에게 다가온다.


남자는 차분하게 사격을 시작한다. 두 세 번의 사격으로 검은 것은 형체를 잃어버린다.


이 짧은 전투 때문에 남자는 처음으로 감정을 느낀다, 분명한 호기심, 짧고 희미하게 스쳐 간 공포의 기류가 그것이다.


남자는 그 이후로 수 많은 인간, 그리고 수 많은 검은 것과의 전투를 벌이며 이 불가사의하고 거대한 시설을 탐사한다. 대부분의 컴퓨터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시설은 때때로 눈 앞에서 무너지기도 했다.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남자의 호기심은 점점 선명하고 적극적으로 변한다.


얼마간의 탐사 후, 남자는 처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 중년의 인간이었다. 상대는 어디서 당했는지, 이미 다리 한 쪽과 반대쪽 팔이 절단된 상태였다. 길게 늘어진 핏자국을 보아 꽤나 먼 거리를 도망쳐온 듯 하다.


중년은 말한다.


"그대는... 내 형제로군,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형제야... 이름이 있는가?"


"......."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 중년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아... 아직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는 형제인가... 아직도 형제가 탄생할 정도로 온전한 시설이 남아있다니 놀라운 일이군..."


"어쨌든 이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정말 감당하기 힘든 운명을 부여하셨어. 수 많은 죽음, 이미 자기 자신을 잃은 형제들과의 싸움, 그리고 저 '고여있는 존재'들에 대한 공포... 내가 깨어난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백년, 몇 천년? 그 이상이었을 수도 있지. 그대는 지금까지 몇 번째 죽음을 경험했는가? 뭐, 사실 큰 상관은 없네."


"......"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네. 이번 죽음을 끝으로, 나도 저 형제들과 같은 껍데기만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가 되겠지. 끊임 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끊임 없이 죽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 말이야. 하지만 저 편이 나아.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야. 진실에 접근할 수록, 사명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그 임무에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네."


"하지만 그대는, 그대는 제발 어머니가 내려준 사명을 완수하길 바라네. 결국에는 나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 또한 나의 사명인 것이야."


중년의 동공이 점점 커진다. 그것은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징조다.


"나는.. 여기까지네.. 비록 내 껍데기가 앞으로 그대의 장애물이 되겠지만, 부디 잘 해쳐나가길...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가 밝혀낸 진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낡은 총 몇 자루 뿐이구만."


거기까지였다. 중년의 고개가 떨어졌다. 남자는 중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기억해두기로 했다. 지금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는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중년이 고여있는 존재들이라고 부른 저것들, 저것들이 그렇게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그의 사망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