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해. 하는 사람 모두가 '나는 지금 공포물을 하고 있다'는 개념을 머리 속에 꽉꽉 채워두는 거.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RPG로 공포물을 하면서 플레이어가 진짜 '공포감'을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해. 마스터가 아무리 혼을 담아서 무시무시한 묘사를 해도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눈 앞에 저절로 영상재생되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 시트와 주사위, 룰이라는 필터가 있으니까. 그런데 호러 영화나 소설 같은 걸 보며 느낄 만한, 즉 독자(또는 관객)가 주인공과 일체화함으로써 오는 공포감을 RPG에서 요구하니까 COC는 똥룰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임.


공포물 플레이가 노잼이 되는 전형적인 패턴 중 하나를 보자고(전부 이런 식은 아니겠지만). 

1)마스터는 '모두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리겠다'는 순진한 열정에 차올라서 상황묘사용 배경 자료를 빽빽하게 준비함. 플레이가 진행되면서, 순차적으로 점차 스케일이 커지는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게끔 주의를 기울임

2)플레이어들은 '어디 한번 마스터가 얼마나 나를 무섭게 하는지 시험해 보겠음'이라는 생각으로 팔짱끼고 지켜 봄

3)마스터가 플레이어를 감복(....)시킬 수 있을 경우 플레이어는 그제서야 '올ㅋ 좀 살벌하네' 하고 적당히 주사위 굴리고 캐릭터가 겁에 질리는 거 대강 묘사해줌. 하지만 마스터가 그러지 못할 경우 플레이어는 낄낄대며 "내 캐릭터는 양 손에 샷건 들고 하스터의 누런 가면에 라이더킥" "야 냐루코 내보내봐" "난 마법주문으로 쇼거스에게 미소녀 메이드로 변신하라고 명령시킴"이럼

4)????

5)PROFIT!


봐봐. 마스터한테 걸리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생각 안 드냐? 사람이 공포감을 느끼는 코드는 저마다 다 다른 법이고 그 정도도 천차만별인데 그걸 어떻게 전부 만족시킴(유령이나 악마 같은 것보다 사이코 연쇄살인마가 훨씬 더 무섭다는 사람 많잖아)? 


나 같은 경우, 어렸을 때부터 원체 호러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건 소설이건 드라마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괴담이건 이거저거 꽤 많이 봤음.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자극의 역치가 올라가서 남들이 다 무섭다고 하는 것도 왠만하면 팝콘 씹으면서 본단 말야. 얼마 전에 그레이브 인카운터 봤는데 천정에서 손 튀어나오는 거 보고 너무 조잡하다 싶어서 빵터짐.


근데도 티알로 공포물을 한다고 하면 기대하는 이유가, 나는 '공포물 플레이를 하면 플레이어로서 나 자신이 무서움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 캐릭터가 무서워하는 걸 즐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내 캐릭터가 겁에 질리고, 약해지고, 피해망상과 불안에 시달리고, 멘붕하다가 결국 끔살당하는 걸 받아 들일 의향이 있다고. 그리고 그걸 위해서 일부러 전략적으로 불리한 선택을 하고, 마스터가 '존나게 소름돋는 묘사'할 때까지 기다릴 거 없이 바람이 분다는 묘사 한 줄만 해도 움찔움찔하고 괜히 깜짝 놀라는 등 캐릭터의 리액션을 크게 하고 등등. 결국 요는 이거라고 봄. '마스터가 혼을 실은 묘사와 연출로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평가할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 공포를 받아들이고 확대 재생산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게 안 되면 COC가 아니라 인세인을 하건 뭘 하건 간에 공포물 플레이는 실패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음. 그리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걸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과 룰적인 보충 요소가 충실히 준비되어 있는 게 좋은 공포물 룰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