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RPG가 "실제로는 무섭게 하지 못한다" "아니다 무섭게 할 수도 있다"고 얘길 하는데
왠지 말하는 사람마다 "공포"라는 걸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대학 다닐 때 그나마 제대로 배운 게 생물학적인 정의밖에 없어서 일단 그거로 생각을 해 봤다.
뇌에 편도핵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그게 공포를 느낄 때 신체 반응에 관여를 해서,
통각이 둔화되고, 눈동자가 커지고, 심박수가 빨라지고, 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서 근육에 가는 혈류를 강제로 늘리고...
즉 우리가 무서워할 때 느끼는 감각이 바로 이 편도체 때문에 생기는 거다.
그래서 편도핵이 손상된 동물은 공포를 느낄 때의 반응이 약해지고 성질이 순해지기도 하고 그런다.
그리고 우리가 무서운 영화나 소설, 게임, 혹은 놀이공원 어트랙션(에버랜드의 호러메이즈 같은 거) 등을 체험할 때는
분명히 이런 공포 반응을 느끼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TRPG를 할 때도 정말 이런 걸 느끼려고 하는 게 맞나?
이건 좀 의문이 생기더라고. 나는 한 번도 COC나 인세인 같은 걸 하면서 이런 공포 반응을 다이렉트로 느껴본 적이 없어.
대신 내가 느낀 건 공포의 약화 버전인 "불안"이었어.
그나마도 내 자신의 불안이라기보다 캐릭터의 불안에 공감하거나,
아니면 캐릭터가 끝까지 같이 못 가고 게임 중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가까웠고.
물론 이것도 공포의 연장선에 있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누가 말한 것처럼 공포감에 여러 유형이 있는 것처럼 소위 공포물 TRPG가 추구하는 공포는 종류가 좀 다른 것 같다.
소설이나 글로써 느끼는 공포감이 TRPG의 공포일듯
아랫 댓글을 보면서 생각난건데, 그 '캐릭터의 승리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는 주장에는 공감을 했었음. 그니까 물론 정말 용을 잡은건 아니지만 어느정도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거지. 역으로 패배에 그렇게 동질감을 느끼고 공유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이런 식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PL과 PC의 일체화가 아예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라는 이야기에 동의를 한다고 전제할 때, 공포는 RPG를 통해 형성될 수 있는 다른 감정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것....
만약 호러가 어렵다면 왜 어려운걸까?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걸까? 다른 감정들과는 어떤 면에서 다른걸까?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한층 더 재밌게 핵심을 찌르는 플레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묘사로 인간 감정을 이끌어낸다는게 쉬운게 아냐. 라는 말과 별개로 내가 생각하는 공포란 예로부터 '알지 못하는 무언가' 라고 생각해오고 있지만.
공포를 다른 감정들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그건 나의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는 건데...RPG로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실제처럼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포글의 감상과 TRPG의 공포감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그 공포감은 직접적으로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상상해서 공포감을 형성한다고 생각
222.122 // 사실 원래는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아래서 달렸던 답글중에서, 관찰자로써 느낄 수 있는 호러도 분명히 있다는 반박을 읽은 참이라. 또한 긍정적인 감정들 역시도 자기가 직접 겪어야 기능하는게 있거든. 예를 들어서 PC가 사랑한다고 PL이 사랑하는게 아니지만 PL은 거기서 즐거움을 얻거나 기쁨을 얻을 수 있듯이. (한술 더 떠 PL이 진짜로 연애감정을 느끼는게, 바람직하진 않겠지만, 그런 경우도 불가능한게 아니고)
극적 아이러니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관객을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서스펜스와 달리 호러는 생리적 우선순위 높은(몰입감있는) 공포가 관석의 안전함과 괴리되어 관객들이 전능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분석을 얼핏 본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성취감의 경우, 우리는 실제 용을 잡는 게 아니라 디지털 데이터 쪼가리로 된 용 형상이 우리에게 랜덤하게 주는 난수의 집합을 극복하더라도 마치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것 같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왜냐하면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서 그런 식의 가상 시뮬레이션을 극복하는 것에도 상당한 보상을 주거든. 하지만 공포는? 공포는 가장 즉물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반응이야. 통각이 둔해지고 근육으로 가는 혈류가 증가하는 건 전부 뭔가 위험한 일이 터졌을 때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기 위한 거니까. 이건 성취감처럼 "연습"을 통해 얻을 수가 없는, 일종의 스팀팩 버프같은 거지.
fishy// 나도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만 "어렵다"는 것에는 다들 대체로 동의하잖아? 이 어려움이 어쩌면 공포라는 감정의 특성 그 자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121.161// 관객의 전능감이라...이건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면이 좀 있다. COC보다는 아캄 호러 보드게임을 할 때 느끼긴 했지만.
난 여기서 말하는 얘기들이 뭔가 우스워보인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의한 위협에서 느끼는 서스펜스(긴장)과 호러(공포)는 원래 이후 전개나 결말을 알고 있어도, 내가 아니라 남의 위협이어도 잘 느끼는 감정이고 이쪽으로 연구도 꽤 되어있다.
liesmith // 그렇다면 호러는 다른 감정들과 달리, 유틸리티(?)로써의 기능에 더욱 초점이 맞춰진 능력이라는거려나. 음. 많은 부분에 대해 답이 되는거 같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해. 그런데 여전히 질문이 남는 부분은 조금 다른거야.
121.161// 사실 나도 공포 게임 역기획 쓰면서 공포감이 뭔지 설명하려고 그런 거 많이 봤었는데, 머리에 구체적으로 남은 건 거의 없지만...어쨌든 그 연구들은 TRPG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나 혹은 영화나 소설 같은 다른 매체를 가지고 분석한 거라서 딱 들어맞지는 않았거든. 다른 매체들이 왜, 어떻게 공포를 일으키고 해소하는지야 당연히 연구가 잘 되어 있지.
ㄴ?
liesmith // 근데 이게 호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스티븐킹 이야기가 자주 나오잖아. 그 사람이 예전에 정리한게 있더라고. 공포의 3가지 종류. 1번째는 혐오. 끔찍한 광경에 대한 즉발적인 공포. 2번째는 호러.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광경 혹은 힘에 짓눌리는 것. 2번째의 감정을 rpg에서 끌어내기 힘든 이유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많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
liesmith // 그런데 3번째는 '테러'라고 표현을 하더라고. 이 사람 예시에 따르면 '평생 살아왔던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이 아주 정교한 복제품으로 교체된 것을 깨닫는 순간' 이라던지, 분명 혼자 있는 공간에서, 계속 시선을 느껴서,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돌아봤더니 아무것도 없다던가. 소위 말하는 '소름'이랑 비슷한 느낌. 사실 이건 오히려 rpg 쪽이 더 잘 표현할거 같거든.
fishy// 스티븐 킹이 정리한 2, 3번째의 공포는 "학습된 공포"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전쟁을 겪은 병사들이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나 물건을 보고 당시의 충격과 공포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야. 반면 1번의 "즉발적 공포"는 어린아이든 100살 먹은 노인이든 무조건 느끼는 반사작용에 가까운 거고. 예시로 든 사례는 말하자면 "나의 인생과 삶의 터전이 한순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오는 공포"인데, 이건 자기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의 공포라서 아주 나이가 어린 아이는 뭐가 무서운 건지 제대로 못 느낄 것 같거든.
여기서 말하는 난수와 불확실성, 생존, (제 3자의)시뮬레이션, 극복이 공포의 본질과 닿아있다는 게 문제지. 원래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처리해야 할 '문제'이고 해명하지 않으면 의식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생존에 불리한 것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여기서 그 매체가 수용자나 참여자가 싸우거나(다 때려부수거나) 회피(때려치거나)할 수 없도록 붙잡는데 성공한다면 서스펜스나 호러로서 기능할 수 있는 거지
3번은 총체적인 인식론적 허무에 뒤따르는 공포고, 2번은 그냥 전형적인 통제할 수 없는 위협이다.
fishy// 쓰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데, 바로 이 "학습된 공포"가 공포물 TRPG에서 가장 다이렉트로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닐까? 생생한 영상이나 효과음 등이 줄 수 있는 공포는 TRPG에선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확실하니까 말이야. COC가 성공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미 사람들이 사회와 문화로부터 학습한 공포이기 때문에 상상과 대화를 통해 공포를 키워 나가고,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 유희의 형태로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댓글들이 알차서 개추머겅
121.161// 음, 너가 말하는 게 개념적으로는 무슨 소린지 알겠는데...그게 정확히 TRPG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사용되는지 잘 상상이 안 된다. 고리가 하나 더 있어야 연결이 될 거 같다.
내가 도배라니!
오 된다. 인식론적 허무나 기독교적? 운명론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낙관주의가 학습된 거야, 인간은 원래 부정적인 상황에 더 민감하고 현실감? 가중치를 둔다고. 더 먹으면 좋을 뿐이고 죽으면 먹지도 못하니까.
단지 그게 인간에게 내장된 정신승리법으로 회복되는 사람과 정신승리가 부족해서 무너지는 사람이 나뉠 뿐이지
크툴루에서 말하는 공포는 학습된 공포와는 다른 거에요. 초록색의 점액질은 학습하지 않아도 먹기 싫듯 근원적으로 유전자에 박힌 혐오스런 행동들이 있는 거에요. 크툴루는 이런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데 목적을 두고 쓰여졌어요
그래서 해산물들이나 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거에요.
포도쨩/그건 그냥 서양놈들 문화적 특성인거 같은데...
포도쨩/ 산악민족이나 정글부족도 해산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을까?
포도쨩// 그거야말로 학습된 공포 같은데;; 나는 문어 보고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진 않는다고.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학습된 공포와 본능적 공포는 서로 상충하지 않아. 오히려 학습을 통해 조건화된 공포가 본능적인 공포 반사를 일으켜서 강화 학습이 되는 식이야.
다만 학습된 공포의 경우 일단 학습을 하기 전까지는 느끼기 어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