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공포라는 감정은, 그냥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본능의 집합’이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거 같아.
그 정도로 공포는 ‘다채로운’ 감정이야. 나는 서구식 ‘몬스터’와 동양의 ‘원령’에서 느껴지는 공포부터 다른 감정이라고 볼 정도고.
하지만, 일단 현대인들이 익숙할 호러 게임/영화 등에서 보이는 호러는, 대충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네.
그것들을 각각 ‘감각적 공포’, ‘서사적 공포’, ‘메커니즘적 공포’로 나눠 보자.
‘감각적 공포’란, 문자 그대로 감각, 특히 현대의 영상매체에서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전해지는 공포감을 말해.
괴물의 기괴한 형상이나 소름 끼치는 BGM 등을 말하는 거지.
데드 스페이스에서 배경음악이 빠지고, 네크로모프 대신 네모난 판정박스들만 나온다면 무서울 리가 없지 않겠어?
‘서사적 공포’란, 문자 그대로 서사에서 드러나는 반전, 기괴함, 긴장감 등을 말하는 거고.
내가 엄청나게 빠는 미얄의 추천 4권이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괴담과 공포소설들이 무서운 서사를 구축하는 법을 보여주지. 코즈믹 호러도 이 중 하나고.
그러면 메커니즘적 공포는? 사실 이건 비디오 게임과 RPG에만 국한되는 개념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긴 하는데,
쉽게 말하면, 게임 시스템 레벨에서 공포를 유발하도록 설계하는 것을 말해.
탄약이 제한되어 있고, 세이브 포인트는 어마어마하게 멀며, HP는 툭 치면 죽을 정도로 낮고...
뭐,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가 게임 도중에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시스템들을 말하는 거지.
사실 방금 생각해 낸 분류법이긴 한데, 어떤 영상매체의 공포 요소든 이 중 하나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댓글 좀 달아줘.
2.
자,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건 CoC다. 이 세 가지의 관점에서 CoC를 분석해 보자.
첫 번째. CoC는 감각적 공포를 유발하는가?
오해하기 쉬운 부분인데, 일단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감각적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성공했고.
러브크래프트는 평소 동료 작가들과의 서신 교환에서 어휘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고, 실제로 장황한 서술들을 소설 내에 마구 삽입해 뒀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서 사악한 신들의 기괴한 형상들, 이교의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혐오감은 중요한 역할을 해.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독자들은 그의 상상력에 매료되었고,
지금도 금손들은 데비앙아트 등에서 러브크래프트의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적 모티프들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지.
막말로 러브크래프트는 촉수/눈깔/입 괴물의 시조라고. 연꽃소녀 같은 걸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야. 여기에 반론은 사양한다.
자, 하지만 CoC 도중에 그런 것들이 제대로 서술되는가? 솔직히 아니지.
RPG는 소설이 아니니까, 유한한 시간의 한계상 묘사는 제한될 수밖에 없어. 사실 소설부터 장황하다고 싫어하는 사람 많은데.
따라서, CoC는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들이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등장하는 기괴한 이미지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플레이 중에 나오는 괴물들에 대해,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 형상들을 투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와 비디오게임 그래픽의 놀라운 발전 덕분에,
이제는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보다 훨씬 더 강렬한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음악에 대해서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시대에, 상상력에 기반한 괴물들이 매력적이지 못한 건 당연할지도.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상상력 때문이라지만, 그것이 상상력만으로 인간이 최대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냐.
결국, 감각적 공포에 대해서는 CoC뿐만 아니라, 모든 RPG가 비디오게임이나 영화에 비해 불리하다 말할 수 있겠지.
심지어, 시간이라는 제한을 생각해 보자면, 소설만큼의 섬세한 묘사도 불가능에 가까울 테고.
3.
그러면 서사적 공포다. CoC는 서사적 공포를 주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서사적 공포라는 것은 취향을 매우 탄다는 부분이야.
의외로 괴담의 취향은 엄청나게 갈리거든. 당장에 동서양에서부터 ‘미지에의 공포’와 ‘아는 존재로부터의 공포’로 다르잖아.
그리고, 사실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코즈믹 호러는 이런 취향 타는 서사의 극한이야.
냉정하게 말하자면,
살면서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 본 경험이 없다면, 왜 러브크래프트가 광기에 집착했는지 알 수 없어.
살면서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착각해보지 않았다면, 인간이 한없이 보잘것없어지는 공포에 공감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CoC는 절대적으로 크툴루 신화에 의존하고 있어.
정형화된 러브크래프트식 시나리오와 장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에, 이런 구성을 먼저 받아들어야만 하는 거야.
사실, D&D로도 무서운 이야기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 괴담의 플롯은 수도 없이 다양해.
인세인의 비밀 시스템은 반전에 기반한 일본식 전기괴담을 RPG로 구현하는 이상적인 방법론이라 보고.
결국, 마스터가 괴담을 잘 쓰기만 한다면, 플레이어들이 무서운 분위기를 잘 잡는다면,
스토리 구상에 제약이 없는 보통의 룰이라면, 어떻게든 공포감을 스까묵을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CoC는 ‘크툴루’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CoC는 마스터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서사적 공포를 만족시켜 줄 수 있지만,
이걸 모든 플레이어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메커니즘적 공포. 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낡았다, 가 가장 정답에 가까울 거야.
SAN치 체크에 따른 각종 정신병 등을 구현하여 공포심을 구현하려고 했지만,
사실 RPG에서 온갖 장치들이 연구된 지금에 와서는, 이젠 심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
여기서 신화 생물들에게 라이더킥을 날리기 시작하면, 아예 앞에서 잡아놓은 감각적 공포나 서사적 공포도 날아가기 시작하고.
CoC가 똥룰이다... 라는 지적은 본질적으로 여기서 온다고 생각해.
룰이 공포감을 효율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룰의 약점을 사용해서 기껏 잡아놓은 공포 분위기를 순식간에 날려 버리기에 딱 좋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실드 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4.
하지만, 난 본질적인 질문을 하나 해 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러브크래프트뿐만 아니라, 드라큘라 같은 고전 뱀파이어물 같은 걸 읽으면서 느꼈던 바인데...
나에게 이런 서구 고전 호러들은, 본질적으로 ‘공포감’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기괴함’을 느끼게 하더라고.
그러니까, 애초에 당대 사람들이 느끼던 ‘호러’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호러’와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
러브크래프트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뱀파이어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나는 ‘카르밀라’를 읽으면서, 사실 공포감이 아니라, 이런 감정을 느꼈다,
‘오, 간만에 이중딜도 안 나오는 백합물을 발견했다! 그래서 너네 언제 섹스하니?’
...뭐, 사실 반쯤 농담이지만, 사실 뱀파이어물이 왜 ‘변할’ 수밖에 없는지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주는 사례지.
당시에 동성애는 일종의 죄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적 분위기를 암시하는 ‘카르밀라’는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거부감과 불안감을 야기했을 거고, 그렇기에 그것은 ‘공포소설’로 여겨졌던 거야.
그리고 백합물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들의 경우, 이것을 그냥 우울한 백합물로 여기게 된 거고.
(덤으로 말하자면, 이건 과장되어 있는 소리니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함)
드라큘라도 그런 식으로 당대 사람들의 도덕적 금기를 건드리기 때문에 호러로 남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그러니까, 거꾸로 영화나 게임에서 느낀 어떤 ‘공포감’을 CoC로 구현하려고 용쓰기 보다는,
광인들과 외국인들, 괴물들에 대한 1차원적인 거부감, 본질적인 두려움을 순수하게 즐기는 것이, 좋은 CoC가 아니련지.
coc부분은 읽지 않고 쓴다만, '리미트'나 '카운트다운'은 서스펜스에 속한다. 서사적인 기법이고, 예로 부터 반전이나 기괴함보다 이게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반전이나 기괴함은 '우스꽝스러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서사에서 쓰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게임이 오히려 특이 사례지. 만화에서 인체를 무너트리면 '코믹'이 되지만 게임은 우스꽝스러움에 조작감이 되었든 난수가 되었든 환상적 스펙터클이 되었든 집어넣어서 빠르게 거대 장르로 진입했으니까
ㄴ죄송합니다... 배움이 일천하야 우스꽝스러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일단 RPG가 게임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논지를 전개했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소설에서라면 '총알이 다 떨어져 간다'가 서사겠지만, 게임에서는 분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윽 일단 공포가 뭔지부터 좀 정의하고 갑시다 너무 빨라서 숨이 차네
ㄴ그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거지. 같은 층위?를 공유하는 구분이라기 보다는 양상?이랄까... 그리고 보통 우스꽝스러움은 비현실적이거나 앞뒤가 안맞는 걸 말하는 것
그러나 결과적으로, COC의 설정만 야금먹고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ㅋㅋ 거기다가 워낙 크툴루 문화 자체가 오래되었고, 혐오 주체가 해산물같은 서양문화 위주이기도 하니까 단순히 공포에 치중하기에는 낡은 것 아닐까... 지금의 한국 COC는 일본처럼 공포물 일변도 수사어드벤쳐, 반전개그, 액션극 등등 여러 기타 장르로서 변이되어 쓰이는게 맞지 않나봄. COC가 가용성이 높은 룰이기도 하고
공포물 일변도(+를 벗어나)
COC는 가용성이 높아서 공포가 섞인 복합장르로 쓰이면 좋을듯
오우... 재밌는 글 잘 읽었다. 개추. 이런거 좀 박제해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