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공포물 TRPG의 핵심은 오감의 자극을 통해 일어나는 본능적 공포, 즉 공포 반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TRPG에서 실제로 참가자들을 고문할 게 아닌 이상, 이런 감각적인 자극을 줄 방법은 많지 않기 때문
게다가 본능적인 공포 반사를 자극하는 활동은 영화나 컴퓨터 게임, 어트랙션 같은 다른 매체들이 훨씬 월등함
1.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포”는 공포 반사뿐만 아니라 “학습된 공포”도 포함하는 것
생물학, 심리학, 정신의학, 뇌신경학 등에서 공포에 대해 공통으로 주장하는 사실은 뇌의 편도핵을 통해 공포 반사가 일어나며, 공포의 조건을 학습한다는 것
공포 반사: 학습하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보이는 반응
(예: 큰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람, 뱀에 대한 공포 등)
공포의 학습: 실제 체험 또는 간접 체험을 통해 특정 조건과 공포 반사가 짝지어지는 것
(예: 스티븐 킹의 It을 무서워하며 본 사람은 나중에 광대만 봐도 무서워함
사람들에게 여러 그림을 보여주면서 특정한 그림 A를 볼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면, 나중에도 A를 볼 때 편도핵의 활동이 평소보다 훨씬 크게 증가함)
2. 공포물 TRPG의 핵심은 참가자들이 상상력을 통해 이 “학습된 공포”를 불러내 체험하는 것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이 유명해진 이후 우주와 외계가 직접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온 것처럼,
공포 영화 “링”이 크게 히트한 뒤로 사다코의 이미지가 온갖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처럼,
오원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육을 사고파는 범죄자들에 대한 괴담이 떠돌았던 것처럼, 현대에는 공포의 학습이 사회와 문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음
공포물 TRPG는 바로 이 “학습된 공포”를 참가자들의 상상을 통해 불러내고, 그걸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지점을 목표로 함
3. “학습된 공포”를 잘 불러내려면, 공포가 학습된 경로를 이용해야 함
갤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쏘우 변형판도 일리가 있는 주장임. 왜냐하면 본능적인 공포 반사를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하는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임.
몇 가지는 주의 깊게 고려하면 실제 플레이에서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을 것임 (조명이나 음성의 연출, 배경음악, 효과음 등)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공포의 RPG 캠프를 찍을 수 없는 이상, 결국 공포를 어떻게 학습했는지 그리고 그걸 재현할 방법을 궁리하는 게 훨씬 적합함
4. 공포 학습의 경로
-직접 체험(예: 어릴 때 학원 가는데 누가 날 강제로 끌고 가서 간신히 도망쳤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간접 체험(예: 술 먹고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장기를 떼어가는 놈들이 있다는데……)
-공포스러운 소재를 사용한 매체를 통해 간접 체험(예: 공포 영화, 소설, 드라마, 게임 등등)
5. 그럼 저 경로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참가자들 간의 공유”가 필수, 특히 다른 장르보다 더!
예를 들어 “난 포의 공포 소설이 뭐가 무서운지 하나도 모르겠음 ㅎㅎ 사다코가 제일 무서웠음” 하는 사람과,
“어셔 가의 몰락 정말 소름 끼쳤지! 하지만 사다코는 보면서 웃기기만 했음” 하는 사람이 같이 공포물 TRPG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사다코 같은 귀신이 나오면 후자는 심드렁할 거고, 반대로 어셔 가 같은 배경이 나오면 전자는 지루해하겠지.
특히 학습된 공포는 아까 말한 공포 반사에 기반해서 조건과 반사를 짝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학습이 안 되어 있거나 학습에 실패한 경우에는 도통 공감하기 어려움.
다른 장르에 비해 공포물 TRPG의 난이도가 높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닐까 함.
이런 맥락에서 참가자 간 공포의 공유를 위해 물리적으로 조명을 좀 음침하게 한다거나 미리 썰을 풀어서 분위기를 조성한다던지,
사전에 참가자들의 공포물 취향을 파악해서 지뢰를 피한다던지,
반대로 대중적으로 히트한 공포물의 연출을 참고해서 중요한 장면을 짠다던지 하는 것이 (다른 장르보다 더) 중요해 보임.
6. 추가로 생각해 본 것: 이 논리대로라면 플레이 시작 지점에서 캐릭터의 "행복"과 "안정된 상태"에 몰입하게 한 뒤 그걸 깨버리는 연출이 매우 효과적이지 않을까
아까 121.161이 말한 “관객의 전능감”이 TRPG에서 공포의 호출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음.
즉 플레이어가 캐릭터에게 최소한의 공감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공포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넣을 경우,
플레이어는 관객 포지션에서 자기 캐릭터가 당하는 일을 안전하게 감상할 뿐, 능동적으로 공포를 연출하거나 깊이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지.
내가 생각한 방법은 공포물 TRPG라 해서 처음부터 무서운 상황을 뻥뻥 연출하지 말고,
오히려 PC들이 행복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어떤 대상에게 애착을 느끼는 장면을 초기에 배치하면 어떨까 하는 것. 물론 그 다음에는 그 행복감을 위협하고 산산조각 내는 거지.
(이미 공포물 좀 해본 사람들은 다들 하고 있겠지만...)
해야 하는 일은 안 하고 이것만 열심히 봤는데 나온 글이 겨우 이정도 수준이라 슬프다.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까 올려봄.
개추로 보답한다
괜찮네
개추 주는 친절한 갤러들 고맙다. 그리고 난 야근...
이런 좋은 글은 개추야!
크툴루 신화가 쓰여진 1920년대는 공감 하나도 안되고, 오히려 냉전 시대가 더 와닿는다는 말도 이 "학습된 공포"랑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자꾸 학습에 집착하는데 학습이 곧 재미고 게임의 핵심 중 하나지만 공포와 학습은 관계가 옅어. 공포스러운게 공포를 빠르게 일으키는 거고. 학습으로 인해 올라오는 공포는 한 발 늦은 공포를 노리는 거야. 논문 이런거 찾아보고 해서 이것저것 배웠으면 거기에 합치되는 내용을 써야지. 거리가 먼 내용을 꿋꿋하게 올리니.
포도쨩// 왜 관계가 옅은지 설명 좀 해줘. 나는 0~2번에서 내 주장과 근거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
전능감은 외줄타기같은 감각,즉 스릴을 말하는 것인데...
그리고 저 가설은 너무행동주의적이야, 불확실성이나 통제할 수 없는 것등을 반사로 퉁칠 수는 없다고
125.148// 내가 그나마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제일 상상하기 쉬운 지점이라 여기서 시작했어. 다른 가설도 물론 있을 수 있겠지.
0. 공포물 TRPG의 핵심은 오감의 자극을 통해 일어나는 본능적 공포, 즉 공포 반사가 아니다-> 그러하다. 완전한 가상현실기술이 개발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매체를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언어를 매개로 이뤄지는 RPG라면 더욱 그러하다.
1.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포”는 공포 반사뿐만 아니라 “학습된 공포”도 포함하는 것/2. 공포물 TRPG의 핵심은 참가자들이 상상력을 통해 이 “학습된 공포”를 불러내 체험하는 것-> 그러하다. 매체를 통해 감각을 직접 자극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이상, 매체는 그 향유자들이 가진 학습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로 감각을 자극하여 기대되는 반응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3. “학습된 공포”를 잘 불러내려면, 공포가 학습된 경로를 이용해야 함-> 그러하다. 그래서 클리쉐라는 게 있는거다. 이건 꼭 공포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학습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려면 그것이 학습된 경로를 이용해야 하는거시다.
4. 공포 학습의 경로-> 그러하다긴 한데, 원래 뭔가를 체험하여 학습하는 방법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 체험하는 거시다. 이게 왜 굳이 공포 이야기에 나와야 하는지 잘 알수가 없다.
5. 그럼 저 경로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참가자들 간의 공유”가 필수, 특히 다른 장르보다 더!-> 아니 그러하다. 원래 모든 RPG는 참가자간의 정서적 공유가 필요하다. 각 참여자간에 배경 장르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가진 이미지가 다르면 원래 플레이는 파토나는 것이다. 뭐가 다른 장르보다 더 그러한지 나로써는 알 수가 없다.
6. 추가로 생각해 본 것: 이 논리대로라면 플레이 시작 지점에서 캐릭터의 "행복"과 "안정된 상태"에 몰입하게 한 뒤 그걸 깨버리는 연출이 매우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러하다. 근데 이건 공포물이 아니라, 모든 장르에서 다 그러하다. 특히 오감을 직접 자극할 수 없는 언어매체는 해당 매체 내의 상황 묘사를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상대적으로 인식시킨다. 이토 준지 그림체가 아무리 그저그래도, 토미에는 존나 이쁘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뭔 말을 하고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왜 굳이 공포물의 핵심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건 그냥, 기초 창작론 아님?
피드백 포함해서 글 새로써보는것도 좋을듯
ㅋㅌㅊㅍ// 4번은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한 번 더 썼고, 5번에서 "다른 장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 것은 "학습된 공포"가 사실은 즉물적인 "공포 반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의 경우, 예를 들어 D&D라면 성취감은 신체적인 반사가 아닌 수많은 다른 경로로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공포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본 거지.
ㅋㅌㅊㅍ// 6번도 지적한 대로 일반론이긴 하지만, 위에 전개한 논리대로라면 공포물에서는 이런 장치가 캐릭터에게 이입한 상태에서 신체적인 안전이나 행복감을 위협당할 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포석으로서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라는 얘기였다. 내 글의 핵심은 앞쪽에 다 배치했다고 생각했는데 전달이 잘 안되었나...젠장 ㅠ.ㅠ
좋은 정리고 마지막 결론도 괜찮은듯 ㅊㅊ
위에 누가 이야기를 했는데, 불확실성이나 통제감에 대한 연구를 보면 좋을 것 같다. 인지-정서 관계라던가. 심리 치료 쪽에 가면 공포증에 대한 연구가 여럿 있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