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기본적으로 관찰자의 시점에서 감상하게 되면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게 힘들어짐. 그리고 러브크래프트가 그 당시에 글의 소재로 삼았던 공포 대상들이 지금 와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것도 한 몫함. 내 경우에는 크툴루가 증기선에 복부를 뚫리고 그대로 봉인 되는 내용에서 실망했었음. 나는 그 당시에는 코즈믹 호러가 별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러브크래프트하고는 사는 시대가 다르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고 이해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음.



1.미지의 영역


 러브크래프트 작품 중에서 '우주에서 온 색채'를 예시로 들자면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가 주변 농가를 황폐화하고 사람들을 광기에 몰아넣는 내용이 나옴(자세한 내용은 직접 찾아서 읽어보기를). 몇몇 사람들은 이 기묘한 색채가 주변을 황폐화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방사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물론 자세히 따지면 다름-별로 공포를 못 느끼는데 이는 우리가 방사능이 어떤 현상인지 알고 있어서임.

 두 대상이 완전히 동일한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비슷한 현상이 존재할 경우 그에 맞춰서 해석하기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덜어냄. 이는 러브크래프트의 글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임. 밑에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영상을 첨부함.


 고-전 SF 명작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스타게이트 장면임.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겠지만 저 장면의 인물은 모노리스에 접촉하면서 한번도 겪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 장면 도중마다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볼 수 있음. 누군가가 "그저 저 상황에 놀란 것이 아냐?"라고 물을 수 있는데 그것도 맞는 말임. 그 이유는 다음 내용에 설명.



2.경외감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가 크툴루 신화라고 불리는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우주적 존재들이 신격을 갖췄기 때문임. 이는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

 옛날에 인류가 어느 정도 배부르고 등 따스해지면서 맨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주변을 인식하고 의문을 품는 것이었음. 비가 내리는 것, 천둥, 번개, 낮과 밤, 야생 등 초기 인류에게 있어서 자연은 놀라운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음. 초기 인류는 이 현상들이나 공포 대상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를 이라는 존재로 설명했음. 그리고 그 신이라고 하는 대상을 숭배하고 그 존재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게 바로 경외감이고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아우터 갓, 엘더 갓 등 신이 자주 나오는 이유임.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온 신에 대한 존경과 공포. 그 원초적인 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것임.

 이게 잘 안 통하는 또다른 이유는 역시나 1에서 이야기한 미지의 영역이 축소한 것이 가장 큼. 신이 없어도 충분히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자 굳이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필요가 사라졌음. 여전히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다고? 그 이유를 다음에 설명함.



3.인간의 무력함


 인간은 지구에 다른 동물들이 해내지 못한 문명을 만들어냈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랐음. 이건 대단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무력한 상태로 원초적인 부분에서 공포를 느끼고 있음.

 종교 없이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인간은 많은 걸 설명해내면서 공포와 미지의 영역을 축소해냈지만 인간은 여전히 원초적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죽음과 죽음 이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범위이기 때문이지. 죽지 않으면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고 다른 이에게 죽음을 설명해줄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여전히 많은 목사가 지옥불로 사람들을 협박하면서 십일조를 뜯어내는 것이지. (혹시나해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미리 사과함. 나도 예수는 존경할만한 사람이고 종교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으니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은 안 함. 타락한 종교인들이 싫을 뿐)

 어쨌든 인간은 자신이 도전조차 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 나타나면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무력감에서 오는 공포가 바로 코즈믹 호러의 궁극적인 공포임. 옛날의 러브크래프트 작품 속 신이나 현상들은 미지의 영역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었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크툴루 증기선 배빵처럼-그 무력감이 사라진 것도 이유가 됨.

 그렇기 때문에 사실 내가 크툴루 신화에서 가장 코즈믹 호러에 어울리는 대상은 아자토스라고 생각함. 어떤 경우에도 인식 외에 존재하고 깨어나더라도 막아낼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무력함과 미지의 영역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임. 심지어 이 존재가 우주를 멸망시키는 것을 설명하는 가장 비슷한 과학 이론은 우주 멸망 가설인데 어떤 경우에서도 인간은 우주 멸망을 극복할 방법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어쨌든 여기서 끝이고 몇몇 COC 시나리오를 곰곰이 읽어보니 코즈믹 호러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 긴 잡설을 쓰게 되었음. 나도 얕은 지식만 가지고 쓴 글이지만 1920년대를 배경으로 COC를 플레이하면서 코즈믹 호러를 느끼는 건 어렵다고 생각함. 사실 코즈믹 호러 느끼고 싶다면 가장 알맞은 방법은 우주멸망이나 블루 홀. 우주 공포증에 관련된 내용을 구글링 하는 거라고 생각함. 참고로 인류 멸망이나 우주 멸망같은 내용을 찾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kurzgesagt -in a nut shell-에서 해당 영상을 보는 걸 추천함. 무력함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줌.



 아 그리고 COC로 어떻게든 코즈믹 호러 느낄 거면 절대로 엘드리치 호러나 아캄 호러 하지 마. 칼과 총으로 신이랑 괴물들 배때지에 구멍 내던 사람들이 무슨 공포를 느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