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A는 지인 몇몇과 함께 주로 겁스를 즐기는 RPG 플레이어다.


학생, 직장인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모임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한국에서의 RPG 사정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겁스를 하러 오는 유입은 여전히 적은 편이고, 


그나마 겁스를 플레이하고 있는 플레이어들끼리 소통을 활발하게 하기에는 그 규모가 적었으며


개인적인 성향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A는 자신의 작은 모임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편이고


지속적인 플레잉을 할 수 있는 자신이, 꽤 운이 좋았다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플레이로 인해, 남자는 서서히 권태를 받기 시작한다.


모임의 일원들은 다들 자신들의 일로 바쁜데다가, 일상에 치여 피곤함에 물들어간다.


사람들이 구태어 언급하지 않지만...


A도 다른 사람들도, 서로가 예전만큼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A는 그동안 RPG를 했던 자신의 경력에 대해 별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다.


겁스는 자신이 만나왔던 룰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룰북이었고,


아직도 RPG플레잉 속에서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할 룰 중에는 이만한 룰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끝나지 않는 권태기에 A도 서서히 지쳐간다.


새로 마음을 고쳐먹어 보고, 신선한 플롯들을 구상하며 연거푸 룰북을 읽어보지만...


곧 잘 반응해주지 않고 축 처진 사람들에 A의 의욕도 푹 꺼져버린다.


어쩌면... 새로운 것들을 접해 본다면,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정체된 편인 RPG판에 자신의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플레이 팀들은 없다.


그저 그런 수준의 룰북을 사용하는 보통의 플레이에 참가를 해볼까 했지만, 시간낭비일 것이라는 속단이 든다.



그러는 와중에 A는 커뮤니티의 사이트의 작은 구인글을 본다...






[0/3]던월 세션 급구합니다~~~! (중판, 단편)






A는 처음에 자신이 저 구인글에 눈길을 계속 줬다는 사실에 자신을 향해 조소를 날렸으나,


실없이 드는 호기심에 웃음은 곧바로 멈추고 말았다. A는 이미 스스로를 더 질책할 이유를 잊었다.


잠깐의 침묵 후, A는 구인글에 커서를 가져다 댄다.






...하지만 역시 내용은 금방 잊혀질만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해왔던 짜임새있던 플레이들에 비해서 형편없는 볼륨이었다.


구인글이 소개하는 플레이의 내용은, 짜임새도 없고 형편없는 인스턴트 식품 그 자체였다. 


A는 자신이 구인글을 눌렀다는 것을 다시금 비웃으며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눈을 연거푸 비비며 몸을 편하게 눕힌다.


룰북이나 읽을까 하다가 지금은 의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다.


애써 다른 여가 활동의 종류들을 스스로에게 강조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회식으로 인해 팀원 한 명이 불참을 예고하여 내일 있을 플레이가 무산되었다.


정기적으로 세션을 하다 보면 당연스럽게도 종종 있던 일이기에 A는 금방 신경을 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유달리 마음 한 켠에서 깊은 공허를 느낀다.


A는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며 생각해본다.


'그 던전월드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재미가 있을까?'


애써 생각을 지우고 시간을 보낼 다른 일들을 생각하는데 집중해보지만, 헛수고였다.


'그래, 잠깐이면 될 지도 몰라. 어차피 단편 세션 한 번이잖아? 간만에 던전월드 좀 해보는 거지 뭐!'


A는 그 순간만큼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불쾌한 일들과 들었던 끔직한 경험담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구인글은 여전히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그 잠깐 사이에 이미 두 명이나 신청했었다. 남자는 괜시리 마음이 조급해진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평소에 던전월드를 다신 하지 않겠다고,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의견을 말해왔던 A였다.


A가 느닷없이 단편 던전월드를 한다고 하면, 자신의 지인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 뻔했다.


그리고 괜시리 집중되는 불필요한 편견들과 시선들은 덤일 것이다.


'다른 사람인 척 하는 것이 좋을까?'


가면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A는 그렇게... 그동안 했던 모든 자신의 RPG의 경험과 일순간의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새로운 닉네임을 생각해서 플레이에 참여하기로 했다.


던전월드 세션은 남자가 예상했던 것처럼 마스터도 그렇고 플레이어도 그렇고 엉망이었다.


단편 세션에서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면을 쓴 A는 그것을 비난할 수 없었다.





A는 문득 이런 투박한 플레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었다. 평소 혐오하였기에 잘 하지 않았던 괴악한 캐릭터들은 물론,


짜임새 있는 플롯이나 대사를 생각해보느라 골머리를 썩힐 필요도 없었다. A는 또한,


자신의 기본기 잡힌 롤플레잉을 선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감복할 거라는 확신도 있었는데.


그는 던전월드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경험을 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상상은 옆에서 광대같은 캐릭터를 짜오는 플레이어에 의해 잠깐 사그라들었지만,


A는 금방 그 플레이어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던전월드 세션 속에서 그는 뒤틀린 자유를 체감하고 있던 것이다.


A는 드디어 마음 속에 있던 웅어리를 표현해낼 수 있었다.






트롤, 루니의 목적없는 파괴와 자멸하는 플레이어들의 선택...


발전없이 반복되는 플레이들, 그리고 피해갈 수 없는 캠페인의 폭발...


빠져드는 텍섹들의 유혹, 파렴치한 뉴비들의 위선...


출구없는 마스터들의 억압- 세션은 어차피 우연의 소산물이 아니던가?


이런 숨 막히는 세션을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그 조촐했던 던전월드 세션이 짧막한 엔딩을 마쳤을 때...









A는 가면을 벗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