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나도 돈키호테처럼 중세 기사 뽕에 빠졌던 적이 있다. 물론 로시난테를 잡아 타고 풍차로 돌진했다는 이야기는 아님. 다만 '영지물'이라고, 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아 살아가는 소위 '영지물'을 마스터링하고자 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크루세이더 킹즈를 비롯한 각종 중세 정치물(?) 게임을 한 뒤라 진지하고, 다소 고달픈 전개를 추구해보고 싶었다. 농노 전원이 뼈빠지게 일해야 그 소출로 겨우 굶지 않을 만한 경제 수준에, 툭하면 오크와 고블린 떼의 습격, 역병으로 인한 돌연변이로 생겨난 인간형 쥐떼의 창궐까지(워해머 파쿠리 맞음), 플레이어들의 영지는 말 그대로 '좆된' 수준에서 시작하도록 했다. 어쨌든 플레이어는 모였다. 세 명의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이러저러한 기본 개념들을 꽉꽉 채워넣었다.

 

문제는 직위였다. 모두 '기사'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영주 역할을 맡을 '기사'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한 명과 혹은 그의 종자, 하다 못해 청지기 같은 역할을 맡아줬으면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들은 타협을 하지 않았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선점할 권리를 부여해주기도 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툭 튀어나온 입을 보면 앞으로 플레이가 험난치 않을 것을 짐작케했다. 나는, 거기서 플레이를 끝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 역경으로 굴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뽕에 빠져 있었고, 또한 과거에 씹덕질해둔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서 쿰척거릴 생각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괴하게도 한 영지를 세 명의 영주(기사)가 통치하는 방식으로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과거 로마에서 그러했듯이, '삼두정'이라는 실험적인 정책이 이 산골짜기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무리한 설정으로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흘러갔다. 플레이어 셋 중 하나도 중세 유럽 역사의 덕후였기에, 그 당시 실정에 맞는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지만, 확실히 그럴듯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도 다른 플레이어 중 한 명도 그의 덕력에 감명받아 그의 언행에 열심히 찬동하며 그 역시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인 명령으로 농노들을 갈아대며 영지를 발전시킬 정책을 내놓았다.

 

문제는 마지막 플레이어, '현대적인', 즉 '민주적 / 인륜적 / 채식주의적' 사고 방식을 가진 플레이어에게 발생했다. 예를 들어, 다른 영주가 '초야권'을 행사해(이 초야권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PC가 뒈졌을 경우 능력치와 지위를 계승할 수 있는 클론 NPC를 숨풍숨풍 쏟아놓게 만들었다. - 실제 역사에는 초야권이라는게 실제로 사용된 일이 거의 없다곤 했지만, 이 플레이 중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행사되었다.) 농노들의 민심을 바닥으로 깔아버린 뒤, 이후 이어진 오크들의 침공에서 신들린 전투로 농노들의 사상률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어(농노들을 아군 전투 NPC로 차출하지 않고 영주인 자신들과 종자 한두명만 데리고 전투에 출전하는 식으로) 다시 민심을 회복하는 일을 해내었을 때 그 플레이어는 이의를 제기하곤 했다.

 

"농노들에게 민주주의를 알려주고 싶어요. 이런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통치 방식에 저항하도록 그들을 선동할 수 있을까요?"

혹은

"다른 플레이어 A의 초야권 행사에 반발해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결투를 신청하고 싶어요." 등의 이의를 말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지극히 중세인적 사고방식에 입각해 그 이의에 덤벼들었다.

"농노들은 밟히고 섬기기 위해 태어났소. 그들이 정말로 우리같은 귀족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드 라그나?"

또는

"초야권은 신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하신 신성한 의무요. 그들도 자신과 같은 비천한 농노의 씨앗을 품는 것보다, 우리의 고귀한 씨앗을 품고 우리의 후손을 생산할 기회를 얻는 것에 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해봤소, 로드 라그나?"

 

그 문제 플레이어, '로드 라그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윤리적인 잣대를 플레이 내내 들이댔지만, 2:1의 상황에서 라그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점차 그의 불만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