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이러하다. 본디 뼛속까지 오타쿠인 나는 역시 뼛속까지 오타쿠적 취미인 TRPG에 깊은 흥미를 가지다 얼마 전에 우연치 않게 도전하게 되었다.
어떠한 우연인고 하니 교양과목인 게임기획(가칭) 수업을 듣다가 내가 얼떨결에 언급한 TRPG라는 것을 듣고 우리 과의 인싸 선배가 흥미를 보인 것이다.
그 선배는 대학마다 한 두 명 씩 있는-다양한 의미로- 도대체 이런 사람이 왜 우리 학교에? 류의 사람이었다. 좋은 쪽으로.
말하기로는 중학교 시절을 미국에서 지냈는데 그때 던전 앤 드래곤을 하던 애들을 보고 흥미가 생겼었다나.
과에서 나의 위치는 대체로 무해한, 찐따는 아니지만 한없이 찐따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음으로 선배가 가져준 흥미가 대단히 부담스러웠지만 동시에 은근히 고맙기도 했다.
선배가 있다면-
학관 구석에서 주사위를 굴리고 낄낄거리며 플레이를 하고 있어도,
어떤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저기 저 것들이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할 계획을 모의하고 있다고 신고할 걱정은 없을테니 말이다.
거기에 구질구질하고 퀴퀴한 오타쿠 특유의 습기가 조금 덜 해 보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나 개인으로서는 선배가 파티에 들어 온 것이 대단한 행운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디킨스의 소설처럼 최고의 시대와 최악의 시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아뿔싸, 우리과의 원톱아싸혼모노도 게임기획수업을 듣고 있었고, TRPG 발언을 들었으니.
반짝거리던 선배가 떠나고-그럼 모레 3시 쯤에 학관에서 보자.- 꿀렁꿀렁 거리는 혼모노가 특유의 눅눅하고 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 곳이다.
가로되 자신 또한 TRPG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걔 중에서도 로그호라이즌과 겁스, COC와 던전월드를 오래 즐겼다. 라고 하더라.
나로서는 제발 좀 너의 얼굴을 치워주지 않으련? 네 면면을 보니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습도가 아니라 유도(油度)를 부른 것이 떠오르는 구나.
따위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솔직히 생각해보니 나나 쟤나 그게 그놈인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우습고 아닌 듯해-어...뭐...그래...응...같이 하자.-라고 대답해버린 것이다.
만족스러운 듯이 투실투실한 볼을 씰룩거리며 떠나는 혼모노의 뒤로 어두운 하늘이 비를 걸레에서 물 짜듯이 뱉어내고 있었다.
아아이구, 세상에나. 날씨부터 불길한 걸. 나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하지만 곧이어 애써 그런 생각을 털어내었다. 단순한 날씨일 뿐 아닌가.
이쯤에서 뜬금없지만 책 하나를 이야기 해야겠다. 코엘료의 연금술사다.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별 희한한 걸 다 상징으로 취급하고 똥을 싸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싸구려 감성팔이와 상처핥기를 위한 책...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인정하기는 싫지만-코엘료의 말, 연금술사의 내용도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추적 거리던 빗방울은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 이틀 뒤 있을 오그라들고 숨이 턱 막히는 사건들의 전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왈, 사람은 자신의 일이라 해도 그 코앞을 예상치 못한다 했는데 과연 그렇다고 하겠다.
차라리 TRPG를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쓰다가 너무 긴 것 같고 해서 그냥 줄임. 본 사건은 쓰지도 않았네.
빨리 2편써
ㅠㅠㅠ
각 잡힌 글은 아니지만 잘 쓰긴 했다 고로 다음편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