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XX월 XX일 토요일,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바람은 선선하고, 날씨 또한 쾌청합니다. 따뜻한 햇살이 불쾌하지 않은,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가을 날씨입니다. 서울 모 처, 약속 장소인 XX 카페 앞 거리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가을 옷을 멋스럽게 차려입고 삼삼 오오 무리지어 거리를 지나다닙니다.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환하게 웃으며 지나갑니다.


GM은 가장 먼저 나와 카페 앞에 서 있습니다. 묵직한 가방 안에는 룰북과 각종 컴포넌트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A4 용지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습니다. TRPG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요. 오늘 진행될 시나리오인 것 같습니다.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질 전리품 표, 그들이 맞서 싸울 적들의 구체적인 스펙, 적의 외양을 상세히 기술한 정성스러운 설명글까지, 정성이 듬뿍 담긴 시나리오이지요. GM은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시나리오를 읽습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정독해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지만, 철저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여기서 이걸 내보내고...여기서 이 인카운터를 엮은 다음..."


문득 불어온 바람에, GM은 휘날리는 시나리오 종이를 말아쥡니다. 바람이 심하군요. 더군다나 긴 머리가 제멋대로 휘날려 얼굴을 가리기 일쑤입니다. GM은 뒤돌아서 짙게 선팅된 카페 유리창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집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 만나보는데, 지저분한 모습이면 안되겠지요. GM은 유리창을 보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깁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카페 벽의 디지털 시계는 오후 12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곧 1시군요. 플레이어들과 만날 시간입니다. GM은 시나리오를 가방에 집어넣고 옷 매무새를 다듬습니다. TRPG 갤러리나 트위터에서 많이 봤지요. 주변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어서, 힘들었던 경험들을 토로하던 사람들을 말이지요. 어제 새로 빨아 말린 셔츠, 역시 다림질이 말끔히 된 청바지, 세척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운동화. 아침엔 때까지 밀었습니다. 이정도면 완벽한 준비 아닐까요.


GM은 유리창을 보며 머리를 연신 쓸어넘깁니다. 아침에는 꽤나 괜찮아보였던 머리 모양이었는데, 바람에 휘날린 머리는 원래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군요. 문득, 살짝 조이는 허리 부분에 시선이 갑니다. 단추 사이가 살짝 벌어져 있습니다.


"살빼야 하는데...후..."


막상 흠이 눈에 들어오자, 이곳 저곳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셔츠 색이 바지와 안 어울리는 것 같고, 바지 통은 왜 이리 넓은 것 같은지. 머리가 너무 덥수룩한데, 좀 자를 걸 그랬나. 입 가엔 못 보던 여드름이 보이는군요. 지금 짜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내버려둘 수밖에요.


GM이 그렇게 거울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겁니다.


"GM님?"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