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 같이 가시죠."


GM은 무심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라그나와 함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은 온갖 상황들로 부글거리다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자리가 두 자리 있으면, 옆 자리에 앉아야 하나? 자리가 한 자리 있으면 라그나를 앉혀야 하나? 아니 그러면 너무 티가 나려나? 만약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야할 때, 안전 고리를 잡으려고 팔 들어올릴 때 겨드랑이에서 냄새 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 애초에 라그나가 왜 나와 같이 가자고 했을까? 어색하면 조금 기다렸다가 따로 가도 괜찮지 않나? 라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내가 자꾸 과대망상하는건가?


"GM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라그나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복부 공격을 맞은 듯, GM은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아, 아뇨. 그냥...집에 가서 시나리오 정리할 생각 좀 하느라..."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 그래도 오늘 조금 아쉽긴 하네요. GM님도 아시죠. 라그나랑 라헬이랑 처음에 굉장히 사이 안 좋았던거..."


라그나는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했다. 그랬다. 라그나와 라헬은 처음부터 잘 맞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라그나는 현실주의적이었고, 라헬은 몽상가였다. 라그나가 실력 행사를 중시했다면, 라헬은 대화와 타협이 먼저였다. 그래, 그랬었다.


"사실, 저도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라헬이요."


GM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마음에 걸렸다는 게 어떻게...?


"제가 '라그나'라는 캐릭터에 굉장히 휘둘렸거든요. 저 원래 되게 소심하고, 말 함부로 잘 못하고, 그런 사람인데 '라그나'라는 가면을 쓰고 라헬에게 좀 막 대했었던 것 같아요. 라헬이 되게 약하고 어린 캐릭터라 그런지, 그게 더 쉽기도 했구요..."


라그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직접 만나서는 라헬에게 좀 사근사근 대해주고, 플레이어분 한테도 플레이 끝나고 뭐 맛있는 거라도 따로 사드려야 하나 생각을 했었는데, 아까 라헬 님이랑 잠깐 얘기하면서 라헬 님은 그런거에 전혀 신경 안쓰시더라구요. 전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러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제 캐릭터에 가해지는 어떤 공격이나 그런 비슷한 걸 쿨하게 잘 못 넘기거든요. 막 제가 당한 것 같고... 아 좀 바보같죠 ㅋㅋ"


"아녜요. 그럴 수도 있죠...몰입해서 하다보면 자기한테 뭐라고 하는 것 같고 그런거, 저도 많이 느꼈어요."


GM와 라그나는 그런 시답잖은, 하지만 과거를 돌아볼만한 작은 이야기들을 이어가며 지하철에 탔다. 자리는 없었고, 둘은 입구 쪽에 나란히 섰다. GM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말해야 할까. '카톡 아이디'말고, '번호' 물어보고 싶다. 여자친구 한 번 사귀지 못했던 자신이, 그런 생각까지 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 번호를 물어본다니, 그것도 오늘 처음 본 여자의 번호를 말이다. GM은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리고, 입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라그나는, GM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관심이 없어보였다.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라헬인가, 하고 슬쩍 넘겨다보니 아마 같은 학과의 여자인 친구인 듯 했다. 다행이다, 라고 GM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다섯 정거장, 네 정거장만 있으면 라그나와 헤어진다.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다. 질러야 하나? 모르겠다. 아니, 질러야 한다. 저질러서 생기는 후회가, 저지르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보다 더 견디기 쉽다고 했다. 그래, 결심했다.


"저기"


"저기"


라그나가 GM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GM은 라그나에게 허둥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얘기하라며 말이다. 라그나는,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듯 했다. GM은 희미한, 아주 희미한 희망이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만에 하나, 혹시라도 라그나가... 그 때, 라그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GM님 죄송한데, 라헬 님 번호 아세요? 카톡 아이디 말구요."


"아뇨 저도 잘 모르겠네요..."

.

.

.

물론 플레이는 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GM은 플레이가 예정된 그 '다음 주'에 핑계를 대며 플레이를 미뤘고, 그 다음 주, 그 다음 주에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들을 피했다. 그렇게, 그들은 점차 멀어졌다. 라그나와 라헬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GM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모두가 화목했던, 모두가 꿈꾸던 장기 TRPG 팀은 공중분해되었다. GM은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