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뛰쳐나온 하은도, 별로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널찍한 로비에서, 정문을 앞에 두고 수십의 형상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이쪽은 아까 봤던 자들과는 다르게, 확실하게 인간의 모습이다. 거리가 멀어서일까. 그러나 목소리 만큼은 무감정하다. 마치 그 사람들의 입을 이용해 다른 자가 말을 하는 느낌.
“너도야.”
“너도.”
그들이 중얼거린다. 차라리,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이세영 쪽이 나았다. 이 사람들은 원래 이면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들고 있는 무기만 해도 그렇다. 방망이, 식칼, 삽, 망치.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것 들 뿐이다.
감염된 사람들의 정신은 어떨까?
저 넘쳐나는 증오와, 다른 자들을 동화시키려는 욕망을 제외하면 어떨까. 그냥 사람일까? 어쩌면 괴로워하고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한다.
“너도.”
너무 많다.
수는 대략 40. 만약 좁은 공간에서,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어찌어찌 이길 수 있는 수다. 그러나 널찍한 공간, 그리고 상대는 교란종에게 영향 받는 인간이다.
“이리와.”
오싹한 목소리와 함께 한명이 망치를 내려친다. 하은이 옆으로 빗겨낸다. 옷에 살짝 스친다. 보통 인간이라면 옷에 닿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 빠르고 정확하다는 증거다. 그녀가 그의 명치를 정통으로 친다.
“욱-“
호흡을 거칠게 몰아 쉬며 휘청거리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만약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고통을 호소하며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숨을 몰아 쉴지 언정 물러나지는 않는다. 넘어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폐를 쥐어짠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역부족.”
“무리, 무리.”
그것을 보고 점차 간격을 좁혀오는 무리들. 하은이 살짝 물러나며 공간을 살핀다. 도망갈 곳이 없다. 차라리, 일단은 탈출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살짝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본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열려 있었다.
“너희들 상대는 이쪽이다.”
깊고, 조용한 목소리가 울린다. 무리 한 가운데에 브리티시 스타일의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있다. 그는 마치 SF 영화에 나올 것 같으면서도, 이상스럽게도 정장에 잘 어울리는 검은 광택의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눈매 역시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것 정도다.
“언제?”
“누구?”
“언제?”
무리의 인간들이 동시에 한마디씩 내뱉는다.
“기체상태의 신경자극 물질에 의해 조종, 그 이후는 동화인가.”
“누구?”
“어떻게?”
심지어 하은도 그가 무리 사이에 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하나 하나의 특징을 기억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
그들이 다시 묻지만, 대답은 없다.
“누구?”
묻는다.
대답은 없다.
“그럼 너도.”
“너도 똑같이.”
뒤에서 아마도 식당에서 일하던 조리원이었을 여성이, 식칼을 머리 위로 내려 찍으려 한다. 시퍼런 칼날이 공기를 가른다. 하은이 뭐라 소리치기도 전에, 그 남성이 몸을 회전시키며 자신을 덮쳐오는 칼날을 향해 손을 휘두른다. 그것도 맨손. 닿으면 순식간에 잘려나갈 것 같은 모습.
쨍강-
그러나 잘리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그 식칼이다. 칼날이 공중을 날아 바닥에 떨어지고, 파편들이 조리원의 머리 위로 흩뿌려진다. 그녀가 휘두르던 칼자루만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하은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식칼의 옆면과 수직으로 손을 세워, 손날로만 강철로 된 칼의 중간 부분을 파괴한다. 물론 훈련 중에 하은은 몇몇 숙련자들이 두껍지 않은 금속들을 격파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안전 장구도 갖추지 않고, 원래 격파 시범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칼을, 체중마저 실지 않은 맨몸으로 박살내는 것은 차력사나 할 만한 일이다.
“어?”
무리가 당황한다.
“흡!”
남자가 기합을 넣으며, 반보 앞으로 내딛는다.
“우억!”
애처로운 소리와 함께 우두커니 박살난 칼을 들고 있던 여성이 어깨에 정확히 주먹을 맞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먼지가 그녀의 몸에서 날아오른다.
“흠.”
그가 가볍게 코웃음친다. 그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여 무리 사이를 파고든다.
“죽어.”
“죽어.”
“위험해. 죽어.”
그러나 그들이 달려들기도 전에 남성의 주먹이 그들을 강타한다. 턱을 맞아, 한 남성이 혼절하며 그대로 쓰러진다. 그 다음은 간단한 예비 동작 이후에 이어지는 발차기다. 그것에 강타당한 무릎이 거꾸로 꺾인다. 근육과 관절이 파열되고 싯누런 지방덩어리가 피부를 찢고 흐른다.
“우억!”
그가 또 한 명의 남성을 밟고 뛰어오른다. 무리의 밖에 착지한 그를 돌아다보기도 전에, 그의 손에 들린 테이저가 발사된다. 경련과 함께 누군가의 몸이 힘없이 무너진다.
“하지만 신경 체계를 유용하고 있을 뿐. 새로운 신경망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군.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육체를 변형시킨 흔적도 없다. 거기 요원.”
하은이 화들짝 놀란다.
“눈을 가리는게 좋을거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든다. 그러나 그것이 평범한 라이터일리가 없다. 하은이 황급하게 시선을 돌리자 마자, 번쩍 하는 섬광이 로비를 가득 채운다. 작은 금속 상자가 엄청난 소음과 함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섬광을 몇 번이나 뿜어낸다.
육체를 고문하는 대신, 강력한 섬광과 소리로 대상의 신경계를 과부화 시켜 정신을 무너트리는 종류의 고문 기계다. 그녀의 훈련 과정 중 심문의 수단으로 교육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을 즉시 재현할 만한 기계가, 그것도 현장에서 쓸 만큼 작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음이 끝나고 나자, 하은이 눈을 뜬다. 사람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누… 누구시죠?”
“류 국장이다. 웨더스의 상관이라고 생각하도록.”
그가 짧게 대답한다. 웨더스에게 상관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가 재촉한다.
“뭐 하나?”
그가 가볍게 말하며 문을 열고 나선다. 하은이 황급히 그를 따라 나선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웨더스와 놈의 싸움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웨더스는 걱정 할 것 없네.”
하은은 조금 놀란다. 밖에는 경찰 병력과 의료 차량, 경찰 헬기 등이 잔뜩 전개되어 있었다. 마치 인질극 현장이라도 보는 느낌.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뭔가 다름을 느낀다. 이들의 행동거지, 표식, 그리고 장비가 일반 경찰과는 조금 다르다. 훨씬 더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 보였다. 무엇보다 이런 곳까지 벌써 경찰이 알아채고 도착했을 리가 없다. 좀 더 가까워지자, 심지어 중화기들도 보인다. 경찰이 아니라, 군대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하는 하은을 뒤에 둔 류 국장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아니, 23번으로 해.”
하은도 만일에 대비해 관제 시나리오에 대해서 외우고 있었다. 시나리오 23번이라는 것은 흉악범죄자의 대규모 인질극을 의미한다. 경찰 병력의 움직임이 새어 나갈 수 있다는 이유로 헬기를 통한 방송이나 기자들의 현장 진입을 금지할 수 있어서 언론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후적인 정보통제가 쉽지 않다. 연고가 없는 죄수들 중에서 적당한 자를 골라 인질범으로 꾸며내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그렇게 하게.”
류 국장이 전화를 끊는다.
“노하은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녀가 재빨리 그에게 따라붙는다.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웨더스가 탈출하는군.”
“더 보여줄 건 없나?”
“후, 남의 말투나 배워가지고는.”
웨더스가 대답한다. 그들의 사투는 2층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괴물은 이제 웨더스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그의 하드 수트는 이제 한계였다. 최소한 지금 그가 가진 장비로는 이 교란종을 제압할 수 없다. 그것은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 체구가 큰 남자처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전신에 선명한 근육과, 몸을 보호하고 있는 갑각은 그대로다. 온몸에 둘러진 저 갑각을 돌파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써봤지만 어느 정도 타격만 주었을 뿐, 그 뿐이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전투로 두 가지는 알아냈다. 첫번째, 갑각은 재생하지 않는다. 두번째, 이 녀석은 완전한 부정형이 아니라, 분명 고정된 약점이 있다. 이 차원에 적응하는 단계가 끝나, 완성된 형태를 지니려 하는 것이다. 처음 만큼의 유연성은 없지만 반대로 하드 수트 같은 중장비를 상대하는 데는 최적의 형태.
“그럼 여기까지군.”
만약 웨더스가 자신의 클론을 상대한다면 할 만한 말. 눈 깜짝할 사이에 하드 수트의 팔이 놈에게 잡힌다. 그러나 하드 수트는 놈을 떨쳐내기는커녕 오히려 단단히 붙든다.
“포기했나?”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헬멧 하단을 박살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뒤로 어느새 열린 수트의 뒷면이 보인다. 그 너머로, 웨더스가 열린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콰앙!”
하은과 류 국장의 눈 앞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교정을 뒤흔든다. 건물 한쪽이 폭발하며 완전히 무너진다. 먼지에 가려 웨더스의 모습이 잠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이내 옅어지는 흙먼지 속에서 튀어나온다.
“소령님! 괜찮으십니까?”
“뭐, 보다시피... 국장님?”
그가 의아한 듯 묻는다.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작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 류 국장. 그러면서도 건물의 체크를 놓치지 않는다. 가라앉는 흙먼지 속으로 인간의 형상이 보인다.
“안 죽었군.”
“그렇군요.”
웨더스가 씁쓸하게 말한다. 하드 수트를 자폭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 쫓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 타격은 있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의 약점은 심장이나 뇌수 근처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일종의 차원 간의 단말로 쓰고 있는 것 같더군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둘 중 하나에 케이블이 연결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웨더스는 말을 더 이어가지 않는다. 약점을 알아봐야, 그것을 이용할 사람이 없다. 그의 고민을 읽어내듯, 류 국장이 그에게 묻는다.
“웨더스. 혹시 내부에 병력이 더 있나?”
“없습니다.”
“그럼 선택지가 없군. 그렇지 않나? 자네가 하드 수트를 사용한 상태에서도 제압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이 교란종 만을 국부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자산을 동원하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걸리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까 민간인들의 상태를 보았네. 신경을 직접 통제하는 개체 같던데. 그뿐인가?”
“아닙니다. 통제하고 있는 생물체의 몸을 변형시켜 자신과 비슷한 개체를 만들어내는 듯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반나절 이후면 수백의 괴물들이 생겨난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웨더스가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말한다. 그러나 류 국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다면 즉시 건물 전체를 소각하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은이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든다.
“소각이라는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요원.”
국장이 하은에게 돌아선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르고 있는 자의식과 거짓의 방벽을 단번에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선이다. 하은이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는다.
“예.”
“말 그대로다. 간단하게 말해 소이탄 계열의 무장으로 건물 자체와 내부의 모든 유기물을 소각하는 것이지.”
“하, 하지만!”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그렇게 되면 아직 구해낼 수 있는 사람들도 죽지 않습니까?”
“그렇다.”
“하지만-“
“요원. 그럼 자네의 생각으론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말씀하신대로, 아까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조종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를 처치하면…”
“그건 알고 있네. 문제는 누가 처치하느냐지. 웨더스의 하드 수트가 자폭을 했음에도 아직 활동 가능하다는 것은 자네도 보았겠지? 저 정도의 내구성을 지닌 교란종을 처치하기 위한 중장비를 대령시키고 나면 이곳은 통제불가능의 상태가 될 거다.”
류 국장의 말이 끝나자 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막는다.”
교관the Man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때와 똑같다. 아니, 그때 보다 더하다. 압도적인 파괴력. 과학의 만들어낸 극한의 산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내구성. 분명히 존재하는 약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까지.
어떻게?
대체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반론이 없으면 진행하지.”
돌아서려는 류 국장의 팔을 그녀가 잡는다. 그에게 있어서도 팔이 잡힌 것은 예상 밖이었던 듯 했다.
“제…”
“요원, 제대로 말하게.”
류 국장의 싸늘한 추궁에, 하은이 발악하듯 말한다.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노하은!”
웨더스가 말린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녀는 정식 훈련은커녕, EC들에게 주어지는 교육 중에서도 약식 훈련 밖에 받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게. 시간은 15분 주지.”
“국장님!”
웨더스가 강하게 반론한다. 그러나 그가 말리기도 전에,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뛰어간다.
“…제기랄.”
그가 욕지기를 내뱉는다. 그러나 류 국장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더니, 태연히 몸을 돌리고 돌아간다. 그러면서 웨더스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린다.
“현장 철수나 시키고, 백 사장에게 연락해서 뒷처리Clean-up Procedure나 준비하라고 하게.”
웨더스가 그의 귀를 의심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처리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일 끝내면 라이터나 돌려 달라고 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류 국장. 그 모습을 쳐다보며 웨더스가 어딘지 모를 오한을 느낀다.
“라이터 말입니까?”
“그래. 팔을 잡길래 좀 놀랐는데 말이지. 그걸 가져가려고 했던 모양이었군.”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서서히 헬기쪽으로 걸어간다.
정말 그는 사람인가?
가라앉고 있는 흙먼지 속을 헤치고 지나가는 하은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것 딱 하나뿐이었다. 거의 농구 선수 수준의 점프, 강철을 잘라내는 동작,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속도.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는 목소리와 위압감.
심지어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까지, 그것도 세계 기록 수준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그. 분명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그 ‘모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잡한 생각 가운데, 그녀가 박살난 복도와 문을 지난다. 의자가 잔뜩 들어서 있는 대강당.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가운데, 그녀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아까의 그 여자군.”
흙먼지 속에서 무겁게 들려오는 목소리.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형상의 괴물. 훨씬 슬림 해졌지만 아직도 근육의 모양이 그대로 피부 위로 드러나 있는 나신의 인간의 모습. 1.8m 정도의 키에 단단히 다져진 몸. 아까와 같은 모습이라고는 가슴, 어깨 관절, 명치를 비롯한 급소 근처의 검은 갑각 뿐이다.
“왜 돌아왔지?”
그것이 묻는다. 하은은 그의 말투가 웨더스를 닮았음을 알아차린다.
“흐음. 나에게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저런 말 따위는 들을 가치가 없다. 그녀는 상황을 살핀다. 주위에는 어떤 인간도 없다. 오직 그녀와 저 괴물뿐이다. 두 존재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감돈다.
어떻게?
무턱대고 들어왔지만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알아내야 한다.”
교관의 목소리. 하은의 시선 가장자리에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눈을 뗄 수 없다.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아까 그 자를 다시 불러오는 건 어떤가? 아직 보여줄 게 더 있나 알고 싶은데 말야. 지금 이 상태라면 똑같은 기계와 상대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웨더스의 말투로 그것이 말한다. 문득 하은은 그 말에서 무엇인가 알아차린다. 놈의 몸은 하드 수트를 상대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체구가 2m는 넘어가는 대상을 상대하기 위한 형태다. 그렇다면 체구가 훨씬 작은 그녀를 상대로, 속도와 근력의 장점을 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이다.”
교관의 말과 함께 하은의 몸이 번개처럼 튀어나간다.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이 작은 소리와 함께 총알을 토해낸다. 그러나 갑각에 부딪힌 총알이 튀어나간다. 동시에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인간 외의 속도. 안구가 돌아가는 속도보다, 소리가 귀에 전달되는 속도가 빠르다. 우측 상단을 빗겨 피한다. 왼손의 총을 좌측 44도로 발사. 총탄의 위력 따위는 기대하지 않기에, 당연히 총알은 할로 포인트다. 오직 찰나의 저지력, 기껏해야 궤도가 조금 틀어지는 것 만을 노리는 것이다. 자신을 노리는 놈의 손이 빗나간다. 체구가 훨씬 작기에 가능한 일.
그녀가 뒤로 뛸까,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불리하다.
잡히지만 않으면-
그녀가 기도하듯 생각하며 놈의 겨드랑이 사이로 통과한다. 체구가 크고, 상체에 근육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회전 속도가 느리다. 그녀가 뒤로 뛰며 총탄을 난사한다. 강당의 의자를 순식간에 세개나 밟으며 뛰어올라, 두번째 열 뒤로 피한다. 놈이 의자들을 박살내며 다가온다. 그녀의 품에서 군용 단도 같이 생긴 바이브로 블레이드가 꺼내진다. 웨더스가 쓰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소형이다.
심장만 부술 수 있다면-
웨더스의 말을 떠올리며 그것의 품으로 뛰어드는 하은. 놈은 상대도 안된다는 듯이, 느릿느릿하게 그녀에게 팔을 휘두른다. 그녀가 피해낸다. 그것에게는 장난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죽음과 삶의 경계다. 총을 버리며 백 덤블링. 체구가 큰 탓인지, 자신이 박살낸 의자에 발이 걸려 살짝 속도가 늦춰진다.
“기회다.”
교관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가 총을 버린 손으로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똑바로 들어올린다. 아까 류 국장이 썼던 라이터다. 그녀는 어느샌가 완벽하게 섬광을 차단하는, 특작용의 고글을 쓰고 있었다.
“!”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놈의 움직임이 멈춘다. 인간의 몸을 흡수해, 인간의 신경계를 유용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통하는 수단도 어느 수준까지는 통할 것이라는 도박이었다. 하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놈의 무방비 상태인 몸을 목전에 둔다.
그런데 어떻게?
외갑각을 그녀가 깰 수는 없다. 돌파하기만 하면 블레이드로 몸을 갈라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근육 같은 곳에 데미지를 입혀봐야 쓸모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무엇인가 눈치챈다. 갑각 중 한군데, 그것도 왼쪽 가슴을 덮고 있는 것만의 색깔이 다르다.
왜?
엄청난 양의 정보가 그녀의 뇌신경을 타고 흐른다.
왜 저것만 색이 다른가?
심장만 부술 수 있다면-
웨더스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는 심장을 보호하고 있는 갑각을 여러 번 부수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거기에 하드 수트의 자폭까지. 어쩌면 저것은 부서지기 일보직전이 아닐까. ‘갑각’에 신경이 있을 리가 없다. 놈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아니, 확실하다.
저것이 그녀의 유일한 찬스였다.
찰나의 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간의 흐름보다 빠르게, 그녀의 동작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라이터를 버린 손이 몸의 회전을 실어 내쏘아진다.
“?!”
그녀가 노린 외갑각이 마치 흑요석이 부서지듯 산산조각 난다. 동시에, 오른손에서 바이브로 블레이드가 작동을 시작한다. 회전이 더해진 블레이드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잡았다!”
아직도 시신경이 마비된 놈의 외침과 함께, 하은의 머리채가 잡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인다. 쑥, 하고 그녀의 머리 밑단이 빠져버린다. 트릭 용의 붙임머리다.
“무-“
“-지금이다.”
놈의 손은 쓸데 없는 곳에 가 있고, 시신경은 회복 중이다. 갑각은 깨져 있다. 교관의 목소리와 함께 하은의 오른손에 들린 바이브로 블레이드가 놈의 가슴 부위를 가른다. 피부와 함께 인간의 것을 흉내 낸 갈비뼈가 잘려 나가, 큼지막한 틈이 생긴다.
이제 찌르기만 하면-
“!”
잡힌다. 잡힌 곳에서부터 피부가 스멀거린다. 놈의 피부가 녹아내리며 하은의 팔에 기분 나쁜 모습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좋은 발상이군.”
그가 하은의 팔을 잡고 내던진다.
“윽-“
무언가 둔탁하게 부러지는 소리. 하은이 엄청난 격통에 몸부림치며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는다. 딱딱한 나무벽이 깨져 그 조각이 어깨에 박혀 출혈이 나는 모양이었다. 등을 타고 뭔가 미끈한 것이 흘러내린다. 스멀거리는 자국이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온다. 하은이 블레이드를 그 위에 가져다 댄다.
“헉… 헉…”
소령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마취제도 없다. 어쩌면 쇼크사할지도 모른다.
“걱정마라. 곧 나처럼 될 테니.”
괴물이 말한다. 하은이 간신히 낸 가슴의 틈도 천천히 메워져 가고 있었다.
“넌 예외로 해주마. 너는 직접 먹어서 배우는 것 보다, 관찰하는 것이 더 재미 있겠어. 얼마나 오래 가나 보겠…”
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가슴의 상처에 박힌다. 하은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시한 신관이 달린, 소이 유탄이다.
“한발 더.”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웨더스가 거침없이 걸어온다. 그의 손에 들린 유탄 발사기가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발을 더 쏘아낸다. 거의 닫혀가는 상처 속으로 유탄이 매끄럽게 말려들어간다.
“이…”
“재생하는 건 척수 반사라 통제가 안되는 모양이구만?”
웨더스의 말에, 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다. 괴성과 함께 그것이 웨더스에게 몸을 돌리는 순간,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놈이 살짝 부풀어오른다. 몸의 모든 구멍으로 화염이 새어 나온다.
“끄…어…”
녹아 내린다. 이 현실에 뿌리내린 역겨운 육체와 이차원에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의 본질을 연결하고 있는 매개체인 심장이 불타버렸다. 그 즉시 현실 그 자체가 놈의 흔적을 지워 버리기 시작한다. 역겨운 피부와 살점, 고름, 물집, 근육, 신경조직, 뼛조각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하나의 죽이 되어 녹아 내린다. 그것은 너무나도 허망하게 사라졌다. 동시에 하은의 팔을 타고 올라오던 기분 나쁜 자국들도 사라진다.
하은이 숨을 고른다. 웨더스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미안하군. 옷 갈아 입느라 조금 늦었다. 팔이 하나라서 말이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은이 아드레날린으로 약간씩 떨리는 손으로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다.
“역부족이면 도망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말에, 하은이 멋쩍게 웃는다.
며칠 후.
“다녀왔나?”
“네.”
AP-5 아말감의 의료실. 소피아가 새롭게 이식 받은 웨더스의 팔을 검사하는 중이었다. 하은은 이 정도에는 놀라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피아의 몸이 스스로 회복하는 걸 본 상태라, 이쪽으로는 이제 놀랄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첨단 의료장비가 웨더스의 몸 여기저기 부착되어 그의 생체 신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물론 매우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뭐, 괜찮다 마다.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소령님, 이거 비싸요. 알죠?”
소피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핀잔을 준다.
“알았네, 알았어. 안 그래도 수트 하나를 날려 먹어서 어떻게 보고할 지 생각하는 중이야.”
하은은 웨더스의 권고로, 그녀가 구해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어떻던가?”
사건은 ‘언제나’ 처럼 처리 되었다. 가스 누출 후 폭발 사고로. 가스 중독으로 인한 다수의 호흡 곤란 증세, 흉악 범죄자의 소행 의심, 수련회 전면 재점검 등등 뻔한 키워드들이 언론을 몇차례 휩쓸고 난 이후, 사건은 잠잠해 졌다. 사망한 열댓 명 남짓의 사람들만 불쌍할 뿐. 물론 사후적으로 대략 20년간 정도는 언론과 대중매체, 그리고 인터넷은 해당 키워드와 관련해 주의 깊은 감시를 받게 될 것이다.
“별로… 그냥 학교입니다.”
“그런가.”
하은을 웨더스가 가만히 쳐다본다. 그녀의 심리 상태는 약간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구해낸 사람들에게 애착을 가지거나,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거나 하는 방식으로 뭔가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거의 자살에 가까운 행동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괜한 일을 시켰군.”
“아닙니다.”
어쩌면 항상 쫓기며 살던 어린 시절의 탓이 아닐까, 라고 웨더스가 호기심을 접어 둔다. 굳이 알아내야 할 일이라면 그럴 필요가 생길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
“류 국장님이 네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군. 아, 그리고 돌려달라고 하시던데.”
“제가 가져갔다는 걸 아시는군요.”
“뭐, 일부러 가져가게 놔두셨을거다.”
“…예. 나중에 그 분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래야지.”
하은이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넘긴다. 웨더스가 이식된 팔로 그것을 받는다. 그 팔은, 꽤나 잘 움직이는 편이었다.
“뭐, 오래 쓰면 오리지널이라는거지.”
그가 팔을 보며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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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랑 간츠랑 공각기동대랑 워해머 보면서 썼습니다.
다들 추석 연휴 잘 마무리 하시길
물론 앞으로 맨날 이런 느낌의 글만 주구장창은 아니고 테크노크라시의 많은 면(?)을 조명하기 위해 다양한 상황을 조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설정면에 대한 설명은 본문 내에는 줄이려고 함! 궁금하신점 있으면 제가 책 읽어보고 답변드림 ㅇㅅㅇ
중간의 외갑각 박살은 실제로는 포스2를 걸어서 친거라고 한다 포스 찍으세요 여러분
강원랜드크로니클에 이어 좋은책상 크로니클인가
잘 보고 있음 1편에서 사장이 고급장비 지급 못하는 게 예산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실제로는줘도 못쓴다던지 패러독스 먹는다던지 히는 요인도 섞인 거지?
ㄴ ㅇㅇㅇ그루해요
vivivi
하드 수트 가지고 싶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