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도 없고 굴리는 사람도 적어보이는데 언급만 되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가볍게 소개 한번 해봅니다.

무려 정식 발매된 TRPG 룰북인데 이토록 인기가 없다니 가슴 아프다. 


망한 세계는 위험해 


아포칼립스 월드에서 세계는 일단 대충 망했다. 대충 망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엔간한 건 뭐든지 있을 법한 세계가 완성됨. 근데 세계가 망했기 때문에 당연히 개판 나있음. 모히칸 가죽조끼들이 스틱형 수류탄을 들고 오토바이로 질주한다던가, 어쨌건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닌 세상"임. 사람이 살만한 곳이면 그게 망한 세계겠나? 이 망한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인지 룰북에서 제시해주진 않지만, 어쨌건 이 멸망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 많은 위험 요소들에 의해 고통 받게 됨


이렇게 주변 환경이 험악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도 무척 연약함. 가장 약한 화력을 지닌 무기인 9mm 권총이나 나이프의 피해는 2점인데, 이 2점의 피해도 NPC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NPC에게 레벨 개념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면 죽을 수도 있다."라는 리빙포인트같은 얘기가 통하는 세계임. 


근데 이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무엇을 하느냐, 같이 배고프고 추워하고 폭력에 고통을 받나? 아님. 주인공들은 이른바 개멋진 놈들(fucking hot)임. 하늘에서 비 대신 잉크가 내리는 날에 담배 한대 꼬나물고 권총 한 자루로 갱단을 터는 놈들이란 말이지. 그래서 PC들은 NPC들과 달리 쉽게 죽지 않음. NPC들은 2피해를 입으면 무력화되고, 3~4피해 안에서는 확률적으로 죽거나 어쩌고 하고, 5피해가 쌓이면 얄짤없이 즉사인데, PC들은 6피해가 누적되어도 살 기회가 남아있음. 말 그대로 주인공 보정인 셈이지. 


따라서 이 RPG에서 다루는 내용은 "망해버린 험난하고 위험한 세계 속에서 멋있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됨. 17대 1로 싸운다거나, 시한폭탄을 0:02에 해체한다거나, 전기톱 연쇄살인마를 정신파쓰러뜨린다거나, 방사능 도마뱀 가죽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작품을 만든다던가 그런 것들.  


비어있는 세계관, 그리고 사념의 소용돌이


아포칼립스 월드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고... 이런 내용이 딱히 룰북에 제시되지 않음. 이런 건 적당히 "재밌을 거 같은 식"으로 하라는 거. 이런 적당함은 꽉 조여진 탄탄한 세계관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불만거리일 수가 있음. 특히 설정 읽는 재미가 있는 룰북은 아님. [우리들의 망한 세계에선 화폐로 닭을 써요. 이 닭은 네 발로 걷는 포유류이고, 사람을 잘 따라서 애완/사냥/경비/식용의 목적으로 자주 기른답니다.] 라고 정할 수도 있음. 


비어있는 세계관을 참여자들이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플레이하면서 누적해가다보면, 다른 누군가가 만든 세계를 공부한 것과는 다른 식의 익숙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 [오- 당연히 닭은 네 발로 걷는 포유류지. 우리집 닭은 골든 리트리버인데 정말 사랑스러워. 좀 있으면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그걸로는 수류탄을 좀 사둬야겠어.] 말 그대로 우리만의 세계관이 되는거지. 


다만 약간 오컬트적인 요소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사념의 소용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엉성하게 뭉쳐있어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싸이코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조종하는 초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것임. 이 사념의 소용돌이는 사실 이야기가 정보 부족으로 막혔을 때 억지로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에 가깝고 (억지로 돌파하다보니, 액션을 실패했을 때 치루는 대가도 큰 편) 이런 요소를 보강하기 위해서 싸이코라는 존재를 집어넣은 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 다소 호불호가 갈릴지도? 


파워드 바이 더 아포칼립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사실 던전월드로 더 유명하지. 개인적으론 던전 판타지 RPG에는 이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이 잘 안어울리는 거 같아 ㅎㅎ. Powered by the Apocalypse. 이하 PbtA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셋 정도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음.


각각의 능력치는 -2~+3 사이의 값을 갖고, 2d6+능력치로 판정해서 10+면 온전한 성공 7~9면 부분적 성공 6 이하면 실패한다는 부분적 성공 시스템.

줄거리를 미리 정해오지 않고 플레이를 통해 알아냄.

"안 좋은 일을 내버려두거나 잘 처리하는데에 실패하면 더 더욱 안좋은 일이 된다."라는 위험 요소 (국면) 개념


보통은 2d6 판정법이나 즉석 플레이쪽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론 위험 요소 개념이 가장 의미가 깊다고 생각함. 


어쨌던, 이 PbtA 시스템의 장점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 다른 RPG에서 트롤링이나 다름없는 몇 가지 행동에 대한 제한이 풀림. 


예를 들면 유령의 집을 조사해야하는데 "거기 무서우니까 안갈래요." 하는 순간 플레이가 파토가 나겠지? (애초에 그러면 왜 플레이하나 싶긴 하지만) PbtA에선 그런 상황이 생기면 다음주가 되니 조사를 부탁한 삼촌 아저씨가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유령의 집은 활활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는 걸로 다시 시작되는거지. 이런 식의 처리 방법은 다른 RPG 시스템에서도 쓸 수 있지만 PbtA는 기본적으로 샌드박스다보니 이런 게 훨씬 간단하게 이뤄짐. 이야기를 미리 준비해놓은 게 아니다보니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도 별 문제가 없음. 


플레이어는 편리해


아포칼립스 월드는 2판 기준으로, 플레이어가 딱히 룰북을 읽을 필요가 없음. 대신 playbook과 reference sheet라고 해서 다른 룰의 캐릭터 시트와 룰 서머리에 해당되는 걸 뽑아와서 플레이 전에 잠깐 읽고, 도중에 계속 참고하면서 플레이를 굴림. 모르는 건 마스터가 말해주는 식으로. 캐릭터 메이킹 과정마저도 캐릭터 시트에 죄다 적혀있기 때문에 이게 캐릭터 메이킹인가, 심리 테스트인가 싶은 정도로 캐릭터 메이크를 하면 됨. 


물론 마스터가 "너네 뭐뭐 읽어오셈" 하면 얄짤없이 읽어오면 됨 ^^ 


다만 룰북에선 룰북은 마스터가 읽는 것으로 가정하고 쓰여있음. 근데 이 룰에선 마스터가 아니고 MC라고 부른다. Master of Ceremonies. 국민MC할 때 그 MC임. 


시트를 보면 알겠지만 그 캐릭터 메이킹마저도 "체크" 하는 식으로 되어있음. 능력치 셋트 중 하나를 고르고 이름을 목록 중에서 하나 고르고, 장비를 리스트에서 몇개 고르고, 성별, 외모, 복장을 고르고... 제일 어려운 건 Hx를 정하는 거지만 아포칼립스 월드 2판에선 이 Hx 결정 과정마저도 훨씬 간단하고 재밌게 변했음. 궁금하지? 드루이브쓰루켜셈ㅎ 국내에 정발된 1판도 물론 훌륭하다. 


MC는 편리해


물론 즉석으로 이야기를 맹그는 일은 그 자체가 어렵고 골치 아픈 일임. 나도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꽤 걸렸고 해도 해도 자신이 안 생기지. 그래도 그 골치아픈 일을 좀 쉽게 처리하라고 룰에서 몇 가지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음. 


*전투는 판정 한 번으로 처리.

맞음. 전투가 판정 하나로 끝남. 그래서 피해를 교환하는 식임. 이래서 전투를 잔뜩 처리해도 금방 금방 진행할 수 있음. 


*일 대 다 전투는 패거리(15명 늘어날 때마다 묶어서 피해 +1점 장갑 +1)로 처리.

갱단 60명과 전투를 펼쳐도 판정 하나로 처리할 수 있음. 


*쉽게 만들 수 있는 NPC 

피해는 무기에 의해 결정. 장갑은 입고 있는 옷에 의해 결정. 그 외에 딱히 스텟 없음. 심지어 NPC 이름 리스트도 준다.


*MC는 주사위를 굴리지 않음. 

NPC와 NPC 사이의 일은 '적당히' 처리함. MC 맘대로 하거나, 좀 중요하다 싶으면 심지어 PC에게 맡기기도 하고...


준비도 편리해


플레이 준비물


*레퍼런스 시트 뽑기 (룰 서머리와 캐릭터 시트 포함)

*각자 필기구.

*6면체 2개.


미리 캐릭터를 만들어 오는가? X

미리 시나리오를 만들어 오는가? X

미리 플레이어에게 룰북을 읽혀와야 하는가? X


물론 이런 부담들이 플레이 도중에 즉석으로 이야기를 짜는 식으로 전가되긴 함 ^^


(덤) 스페셜 액션은 불편해?


성인 지향의 섹스와 폭력이 가득한 세계를 지향하다보니, 룰 내부에 섹스를 하면 벌어지는 일을 규정지어놨음. 별 건 아니고 둘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 다음 판정에 +1을 받는다던가, 아무 물건이나 비용없이 상대에게 선물로 줄 수 있다던가 하는 것들. 


그럼 막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도 보여줘야할 거 같고, 아니 얼굴을 맞대고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해요 싶지만 사실 "딱히 그런 내용 안해도 상관없음." 룰북에 "내가 MC를 볼 때나, 내 캐릭터가 포함된 장면에서는 부끄러워서 그냥 장면을 블랙아웃처리합니다."라고 되어있음. 그러니 부끄럽고 쑥스러운 사람들도 딱히 불편해할 필요 없다. 내가 하던 팀은 그냥 끝까지 안하고 끝났음. 정말 정말 불편하면 아예 시트에서 지워버려도 된다고 되어있음. 


3줄 요약


존나 대충 망한 세계의 존나 멋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RPG

망한 세계에서 일은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 

플레이어와 마스터를 편하게 하는 장치가 나름 마련되어있다. 


정말 좋은 룰인데 소개를 잘 못한 편이니 다른 사람이 더 잘 소개해주면 좋음 ㅎㅎ

쓰고나니 드럽게 길게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