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아는 D&D 3.5/패스파인더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유는 다음과 같음.




1. 모험의 필수요소인 마법이, 일반적으로 그 서비스 가격이 매우 높게 책정되어 있다.


간단히 3레벨 마법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디스펠 매직같은 실 모험에 굉장히 필수적이고 유용한 주문들을 시전 서비스 받는 비용이 3 * 5 * 10 = 150 GP로 책정되어있고


스크롤로 들고다니는 비용이 375 GP로 되어있음. 뭐 아이템이야 현장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으니 비싼걸 이해할수있지만, 3레벨 주문 하나에 150 GP 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싸지 않아?


비교를 위해 올리자면, 상인/성직자/하급귀족 등 "중산층 증에서도 힘깨나 쓰는" 층의 "1달 생활비"가 150 GP 수준임. (이곳을 참조했다) 그 정도에 해당되는 돈을 기본 행동으로 시동어 좀 읊고 손짓 좀 해주는 것으로 벌 수 있다고. 그로 인해 잃는 건 하루 자고 일어나면 충전되는 3레벨 슬롯 하나. 원가 제로 수준임.


물론 캠페인에 따라 주문시전자를 매우 희귀하게 설정해둘 수도 있으므로 그 가정 하에선 저 가격대를 리즈너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음. 하지만 일반적인 캠셋에선 막 마법대학 같은 것도 있고 군대에선 마법사부대 같은 것도 운용하는 등 마법이 그렇게 희귀하게 취급되지 않는단 말이지.


5레벨이 높냐 아니냐를 봐도, 포렐이나 골라리온 기준으로 따지면 낮은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닥 높다고 하기도 어렵고.



사실 스펠캐스팅 가격이 높은 건 어느정도 게임적인 설정임. 댄디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마법 버프 팡팡 걸고 가면 밸런스가 말도 안 되게 흐트러지니까. 여러가지 이유를 끌어대서라도 그 원가율(?)에 비해 높게 책정해둘 수밖에 없는거지.


그런데 사실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딱히 마법을 시전받을 일이 그닥 많지 않으므로 이는 별 문제는 안됨. 인생에 살면서 변호사 찾아가는 횟수가 얼마나 되겠냐? 마법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하지만 모험가의 경우는 다르다. 모험자에게 있어 버프 하나를 더 두르고 가냐 마냐, 혹은 적대적인 마법/저주/독/질병 등에 걸렸을 때 그것을 치료할 수 있냐 마냐는 생사에 직결되는 문제임. 당연히 상시 마법시전을 받을 수 있는 거점에 대한 수요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마법사/성직자 입장에서도, 안전한 도시에 눌러앉아서 매우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워 주문시전을 해주느니, 따로 모험자들 위한 거점 같은 곳에 상주하면서 조금 할인된 가격으로라도 많이많이 써주는게 이득임. 왜냐면 주문 슬롯은 원가가 제로고, 하루 자고 일어나면 다시 충전되니까. 3레벨 슬롯 1개를 150 GP로 바꾸는것보다 2개를 각각 100 GP 씩으로 바꾸는게 당연히 더 나은거야.


그리고 이렇게 양자의 이해가 합치되기 때문에 "모험자 거점" 이라는 개념이 탄생할 수 있다. 모험자는 약간 비싼 수수료 (그러나 여전히 일반 주문서비스보다는 적은 비용) 를 지불하지만 대신 유용한 주문들을 시전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고, 마법사/성직자들은 어차피 아껴봤자 낭비되는 슬롯들을 안전하게 리스크 없이 보다 많은 금전으로 전환할 수 있다. 서로에게 Win-Win이니만큼 이러한 개념 자체는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된다고 생각해.




2. 문제는 저 "모험자 거점"이 어떤 국제적이고 조직적인 "모험자 길드" 로 진화할 수 있냐 여부인데, 나는 그것도 긍정적으로 본다.


일단 1번에서 "모험자와 시전자는 뭉치면 이득" 이라는 부분을 설명했었다. 그리고 이건 보다 상위 레벨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텔레포트나 리저렉션, 힐, 스크라잉 같은 고-급 주문들을 시전받을 필요가 있을 때, 따로 그걸 쓸 줄 아는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기보단 그냥 "큰 거점에 있는 고레벨 시전자" 를 찾아가는게 쉽고 빠르니까.


즉 연대의 필요성이 있고, 그 연대는 크고 조직적일 수록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수단의 문제임. 그러한 큰 조직을 일률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체계/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자면, ㅇㅇ 가능함. 마찬가지로 마-법이 있기 때문임.


일단 연락망 구축의 경우, 단방향이라면 Whispering Wind 라는 주문이 있다. 2레벨 주문이고, 1마일/레벨의 거리만큼을 커버함. 최소 레벨대인 3레벨 시전자를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약 반경 5km 정도를 커버할 수 있는 연락망이지.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필요한 주문 레벨이 낮다는 점을 이용해 관련 마법 아이템을 개발한다면 CL 9 정도를 기준으로 반경 15 km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게 된다. 이 정도면 거점별 의견교환은 무리더라도 거점-모험자 간의 연락은 충분히 가능하겠지?


쌍방향 연락을 원할 경우, 패스파인더에서 등장한 Conversing Wind 라는 개념을 쓸 수도 있음. 이쪽은 Whispering Wind 랑 비슷한데 다만 차이점이라면 1시간/레벨 만큼의 시간동안 양쪽에서 서로 메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최소 CL 7이므로 연락 닿는 반경이 11.5km 정도니까 한 도시 내에서라면 충분히 상호간에 긴밀한 연계를 취할 수 있음.


그럼 거점별 연락은 무엇으로 하느냐? 클레릭 4레벨, 소/위 5레벨 주문인 Sending 을 쓰면 됨. 이건 거리 제한 무시하고 메세지를 날리는 거라서 서로 대륙 반대편에 있어도 즉발로 메세지가 날아간다. 레벨이 레벨이니 아무리 그래도 많이 쓸 순 없지만, 국제적 규모의 조직이면 9렙시전자 쯤은 많이 갖추고있을테니 중요 거점별로 하나씩 거점장으로 배치하면 그만이고.


실제 운송이나 수송은? 댄디 전통의 친구 텔-레포트가 있지. 마찬가지로 소/위 5레벨 주문이고, 캐스터 레벨당 100마일씩 날아가니까 어디 뭐 다른 차원에 가려고 들지 않는 이상 충분히 즉발성 이동이 가능하다. 오히려 이 부분에 있어선 현대보다 우월한 면이 있어. 현대에선 암만 잘났어도 실제 물리적 실체로 순간이동은 못하니까....




3. 즉 종합하자면, D&D의 마법에는 국제적 규모 조직체계 정비에 필요한 마법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고, 이것을 잘 유용한다면 현대 기업마냥 빠릿빠릿한 건 무리더라도 대략 19세기 무역회사나 동인도회사 정도의 체계는 갖출 수 있음. 


수요가 있고, 수단이 있다. 이렇다면 야심 많은 누군가는 국제적 규모의 모험자 지원조직을 키우자!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거다. 물론 굉장히 험난하겠지만, 누군가는 성공해서 부를 쓸어담겠지.


그리고 이렇게 만든 애들이 고작 주문시전 지원조직으로만 남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고 분명 중개업무도 할거다. 의뢰 중개 목적으로만 거점을 만드는 건 수지가 안 맞지만, 이미 있는 거점에 중개능력을 갖추는 것은 어렵지도 않고 안 하는 게 이상하니까. 당연히 이러면 현지인들도 구태여 일일이 모험자님들을 기다리거나 찾아갈 필요 없이 거점에 의뢰를 등록하면 되므로 무척 편리해지겠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 "모험자들이 창구에 모여 의뢰를 받고, 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간에 무용담을 자랑하고, 부상이나 저주 등에 당했을 때 치료해줄 의무진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모험자 길드가 탄생하게 되는것이다.




글이 길어졌는데, 핵심을 요약하자면 흔히 생각하는 "모험자 길드 = 의뢰중개소" 의 역할이 아니라 "모험자 길드 = 시전자-모험자 간 연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창설된 협동조직이 규모를 불리며 중개업무도 하게 된 것" 이라는 거임.


반박 환영함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