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초대 (ii)
하은이 데미안에게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그 예언이란걸 한 사람이 당신이죠?”
그녀의 꿈에서 탈출하기전, 강철의 요새 안에 갇혀 있던 데미안. 그가 요새를 둘러본다. 자신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으면 쉽게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수준이지만, 별 훈련 없이 이 정도로 방어 기제를 마련했다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 아니다.
“네.”
“좋아요. 그 예언의 내용이 뭔지 알려주면 보내 줄게요.”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먼저 절 풀어주셔야합니다만.”
그의 말과 함께 데미안을 구속하고 있던 수갑이 풀린다. 데미안이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하은을 쳐다본다.
“진심입니까? 당신은 다른 깡통들보다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계신 모양이네요.”
“예언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당신들이 무슨 생각으로 절 해치려는지는 알아야겠네요.”
데미안이 한숨을 쉰다. 너무 성급하게 약속을 해버린 감도 있었다. 현실 세계라면 구두 약속은 어긴다 해도 제약이 걸리지 않지만, 꿈의 세계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세계다. 단순한 약속을 어기더라도 분명히 심리적인 제약이 걸린다. 그것과 별개로 데미안 본인은 탈리아의 결정에 대해 100%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최소한 그녀의 궁금증은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손을 들어올린다. 그의 손과 팔 주위로 공간 -정확히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정신 속의 무언가지만- 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잠깐, 머릿속 좀 빌리겠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강철의 요새가 산산조각 난다. 수많은,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몰아친다. 형형 색색의 모습들. 그가 들여다보는 수많은 ‘미래’의 단편들이다. 그 중 하은에게 똑똑히 보이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어깨 위에 악마가 앉아있는 여성.
사람의 말을 하는 용.
그리고, 자신의 모습.
“저건…?”
휘몰아치는 이미지의 폭풍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똑똑히 나타난다. 그녀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다. 검붉은 안개, 철의 냄새. 망설임이 느껴진다. 폭풍이 더욱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무엇인가 그녀의 몸을 내부에서부터 침식해나간다. 토해내려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된다.
위험한 것이.
그 순간 휘몰아치는 폭풍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 가운데는, 완전히 박살난 요새와 하은, 하은의 모습을 한 인형, 그리고 데미안 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감상은 어떠셨나요.”
“…당신들이 말도 안되는 미신을 믿고 있다는 건 알겠군요. 하지만 당신들이 이걸 믿는 이유는 이해가 가네요.”
데미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다.
“굉장히 인상적인 이미지의 나열이니까요. 의미를 부여하기는 좋지만.”
“결국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라는 걸 돌려 말하시는 거군요.”
데미안의 말에 하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데미안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약속대로 전 가보지요. 놔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 꿈에서.”
그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다. 다음 순간, 그는 사라져 있었다.
그 정도가 하은이 ‘예언’에 대해서 아는 것의 전부였다.
“데미안이라는 사람에게서 예언에 대해 전해 들었어요.”
탈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사실, 전신이 화려한 물감의 패턴으로 덮여 있기에 진짜 눈썹인지 그려낸 눈썹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녀가 허리춤을 섬세한 손길로 문지른다. 물감이 살짝 소용돌이치며 서서히 그녀의 손길을 따라 뭉쳐간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단검의 그림이 그려진다. 어찌나 사실적인지, 심지어 빛을 반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준다.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단검이라는 그림은 현실로 화한다. 탈리아가 단검을 쥐어든다.
“데미안이?”
그녀가 쥔 단검이 더욱 위협적으로 빛을 발한다.
“데미안이 자발적으로 말해줬을리도 없고. 그렇다면…”
탈리아가 잠시 그 말을 곱씹는다.
“예언이라는게 그냥 의미 없는 꿈이 아니라고 가정하죠. 당신들은 이상한 일들을 하니까.”
하은이 회의적으로 말을 계속한다.
“그 이미지들이 인상적이고, 따라서 의미를 부여하기 쉽다는 것은 알겠네요. 하지만 최소한 납득이라도 할만한-“
“납득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일이야.”
탈리아가 그녀의 말을 끊는다.
“그 예언을 봤으니 직접 느꼈겠지. 네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가 되는지를. 데미안의 예언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어.”
“바로 그 점이 납득이 가지 않네요. 강하다고 해서 곧 위험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두 가지 사이의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 않아요.”
니콜이 팔이 아픈지 그가 ‘아크라이트닝 건’이라고 부른 장난감 총의 총구를 살짝 내리고는 탈리아에게 보챈다.
“탈리아, 얼른 하고 가면 안돼? 나 할거 많-“
그 순간, 하은이 온 힘을 다해 계단 쪽으로 뛰어든다. 니콜이 황급히 아크라이트닝 건을 발사하지만 간발의 차로 빗나간다. 하은이 입고 있는 옷의 소매가 살짝 불탄다. 그녀가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진다.
“니콜, 제발 다음에는 집중해줬으면 좋겠네.”
“미안…”
니콜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들이 화염으로 인한 연기가 본격적으로 풍겨 나오기 시작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자마자, 새까만 연기 속으로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니콜.”
“문제없어.”
그가 아크라이트닝 건을 끙끙대며 집어넣고 등에 걸려있는 좀더 작은 총을 꺼낸다. 자세히 보면, 소형 진공 청소기를 개조한 것처럼 생겼다. 그러나 외형 자체는 상당히 매끈하고 멋지게 디자인 되어 있다. 심지어 겉에는 “PU-RIPPER”라고 은색으로 멋들어진 글씨가 새겨져 있다. PP는 F위에 덮어쓴 글씨지만.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장비가 진동한다. 니콜이 자신의 손등위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케이블을 잡아 청소기의 전원 포트에 해당하는 부분에 꽂아 넣는다. 팔의 피부 밑으로 시퍼런 혈관이 불거져 나온다. 그 안에서 흐르는 것은, 그 자체가 연료이자 발전기인 일종의 액화 연료 전지Quintessence다. 푸른 형광색이 케이블을 타고 청소기의 꽁무니로 주입된다.
“작동 시작!”
동시에 청소기가 굉음을 내며 사방의 연기를 빨아들인다. 검은색의 연기가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청소기의 양쪽에서 상쾌하게 정화된 공기가 내뿜어진다. 연기속의 유독성분들은 안쪽의 필터에 걸린 이후, 그의 인공 혈액으로 흡수되어 재활용된다. 연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그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드러난다.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것의 형상이지만.
“이시야마의 생체병기로군.”
탈리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한쪽 팔이 부풀어오르고 몸 군데군데에 심어진 역겨운 장기와 근육, 희여멀건한 피부, 일그러진 얼굴까지. 잠깐 탈리아와 니콜을 관찰하던 그것이 둘 사이로 달려든다.
“으악!”
인간의 몇배는 되는 속도로 니콜이 있던 곳을 강타하는 그것. 간신히 피한 니콜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진다. 그 다음은 탈리아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팔의 안쪽에서부터 날카롭게 가공된 뼈가 튀어나와 탈리아를 스친다.
“니콜! 빨리 무기나 꺼내!”
“아… 알았어!”
탈리아가 손을 휘두르자 물감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물감이 떨어진 곳은 마치 푹 파인 것 같은 자국의 그림이 그려진다. 괴롭게 신음하는 생체 병기가 그곳에 발을 내딛자 바닥이 정말로 푹 파이며 그것의 균형을 흔들어 놓는다.
“에라이. 내가 왜 이렇게 크게 만들-“
그 순간 층계참 뒤에 숨어있던 하은이 뛰쳐나온다. 이시야마 교수가 생체 병기들을 전부 작동 시켰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기는 연필밖에 없지만, 일단 니콜이라는 소년을 잡기만 하면 인질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한가지만 빼고.
턱.
“어라, 누나 거기 숨어있었네.”
무기를 꺼내던 손으로 니콜이 하은의 손목을 잡는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반응 속도도 훨씬 느렸었는데.
“미안. 예전에는 좀 느렸지? 그때 급하게 나오느라 충전이 제대로 안되어 있었거든.”
니콜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가까이서 보니, 기껏해야 고등학생 나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그녀의 손목이 잡힌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기계에 잡힌 느낌이었다. 그의 손 위로 푸른색의 혈관이 박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만화같긴 한데-“
“니콜!”
“알았어, 알았어.”
그가 다른 쪽 손으로 허리춤에 찬 작은 권총을 꺼내 들어 괴물에게 쏜다. 흔히 에테라이트가 “데스 레이” 라고 지칭하는 장비 중 하나다.
“위잉-“
무엇인가 충전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의 깔끔한 광선이 허공을 가르고 탈리아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생체 병기의 관절을 꿰뚫는다. 관절이 꺾이면서 그것의 공격이 빗나간다.
“어디까지 했지? 아 맞다. 내가 우리 중에서 제일 힘세.”
그렇게 말하며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서는 가볍게 벽으로 내던진다. 마치 아이가 어른에게 던져지는 것 같은 모양새로 하은이 벽에 부딪혀서는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내가 무기도 제일 잘 만들고, 그리고 내가 제일 똑똑해.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탈리아가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나무 문을 박살내는 소리에 지워진다. 지하 층 끝에서 또 다른 생체 병기가 튀어나온다. 이번에는 훨씬 작고 재빠른 타입이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돌진해온다.
“파지직!”
그러나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니콜이 꺼낸 아크라이트닝 건이 정통으로 명중한다. 그것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시꺼멓게 표피가 타버린 채로 널브러진다. 아까 관절이 꺾였던 놈도 곧이어 아크라이트닝 건에 맞아 쓰러진다.
“저쪽부터 쏴!”
니콜이 끄덕이며 하은을 노린다. 포획하려는 것인지, 허리에서 또 다른 무기를 꺼내 든다. 대충 만든 테이저 건 같은 무기가 와이어를 발사한다.
“어라?”
니콜이 당황한다. 하은과 니콜 사이에 민첩해 보이는 형상이 뛰어드는 바람에 와이어가 애먼 곳에 맞는다. 분명 사람으로 만들어졌지만, 네발 동물 같은 형상으로 개조되어 있는 바이오모프Biomorph다.
“뭐야 이번엔? “
그의 말에 화답하듯 그 형상이 뛰어오르고 나서 천장을 박차며 니콜을 노린다.
“정신차려!”
탈리아의 손이 허공을 가른다. 위로 궤도를 그리는 그녀의 손을 따라 니콜의 주위로 쇠꼬챙이들이 그려진다. 허공에 흩뿌려진 물감들이 그대로 공중에 고정되어 현실로 화한다. 바이오모프가 그것에 그대로 뛰어들어 목구멍부터 꿰뚫린다.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절명하는 괴물.
“흐… 그어…”
그러나 생체병기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뒤!”
탈리아의 외침에 니콜이 계단 위를 향한다. 몸 이곳 저곳에서 의료용의 파이프가 튀어나와 복부로 연결되어 있는, 그로테스크한 사람의 형상이 그들을 향해 팔을 뻗는다. 손을 대신해, 기분 나쁜 액체를 흘리고 있는 구멍이 있었다. 의료용 파이프에서 불타는 듯한 액체가 흐르고, 그 구멍에서 무엇인가 끓는 소리와 함께 생체 플라즈마가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뿜어져 나온다.
“!”
플라즈마가 탈리아와 니콜을 덮친다.
“에이 정말!”
그러나 한발 빠르게 니콜이 화염을 향해 조그마한 구슬 같은 것을 던진다. 동시에 무엇인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구슬을 중심으로 공간 그 자체가 스스로를 삼켜버린다. 플라즈마 화염 역시 하나의 소용돌이가 되어, 마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사라져버렸다.
“죽어!”
동시에 다른 손에 들린 아크라이트닝 건이 번갯불을 뿜어 생체 병기가 제 2탄을 쏘기 전에 구워 버린다. 그러나 공격은 끊임없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통해 또 다른 녀석들이 덤벼든다. 탈리아와 니콜이 순식간에 포위된다. 가지각색의 생체병기들이 그들을 공격한다. 피부를 뚫고 경화된 뼈가 자라난 바이오모프가 탈리아를 근접해서 몰아붙이지만 그녀는 와이어를 그려내 놈의 사지를 묶고는 조각내 버린다. 산성피를 뿌려 대는 것, 인간이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 팔 대신 기생형 무기와 이종의 사지를 달고 있는 것 까지. 그러나 탈리아와 니콜은 차근차근 그들을 처치해 나간다.
“탈리아! 저거 위험해!”
니콜이 착용하고 있는 미소열역학에 기초해 제작된 스캐너가 붉은 빛을 발한다. 니콜이 가리키고 있는 바이오모프가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려는 듯이 부풀어 오른다. 하은이 그 모습을 알아본다. 그 때 병원을 폭파할 뻔 했던 종류다. 탈리아가 놈을 향해 유리로 된 작은 물감통을 던진다.
“모든 것은-“
그녀가 조그맣게 왼다. 물감통이 터지며 안에 들어있던 물감이 바이오모프를 휘감는다.
“-거짓의 그림.”
바이오모프가 부풀어오르기를 멈춘다. 물감에 덮인 부분은, 더 이상 바이오모프가 아니라 허공에 그려진 그림에 불과하다. 지탱해줄 캔버스 없이는 그냥 무너져 내릴 뿐인 그림. 하은이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생체병기들은 하나 하나가 초인적인 내구력과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 하나가 최소한 수십의 일반 병사를 학살할 수 있을테고, 종류에 따라서 기갑장비도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은 암살도 가능할 것이며, 다른 것들은 무차별한 자폭 테러에 극히 적합하다. 말 그대로 전쟁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아니, 개조된 생물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하는 두 사람. 현실 그 자체를 자기들 만의 방식으로 휘어잡는 존재들.
하은은 탈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하다고 해서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다, 라는 자신의 말을 떠올린다. 그건 너무 원론적이기만 한 생각이었다. 이제야 그녀의 사고방식을 납득할 수 있었다.
저 자들의 능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따라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녀가 몸을 추스린다. 다행스럽게도 생체병기들은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해 먼저 두 사람을 제거하기로 한 것인지 하은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도 두 사람도 하은을 노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가기전에 이변이 일어난다.
“파직!”
“어라.”
니콜이 당황해서 아크라이트닝 건을 흔든다. 그러나 과부화된 융합로는 김을 뿜어내며 과열의 신호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니콜!”
탈리아가 아까처럼 허공에서 쇠꼬챙이를 그려내어, 니콜의 빈틈을 노려오는 바이오모프를 꿰뚫어버린다. 그러나 아까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은 그림. 동시에 그림을 그려낸 탈리아의 팔 위에 점착하고 있던 물감이 마치 수채화에 물을 부은 것처럼 녹아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녹아 내리는 것은 물감뿐 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팔 역시 녹아 내린다. 방금까지는 팔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면, 지금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단지 팔의 모양을 한 그림이 있었다고 하면 될까. 그리고 지금까지 녹아 내렸던 바이오모프처럼 그녀의 팔도 형상을 잃고 질척이는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허용 된 것 이상으로 권능을 휘두른, 또는 휘두를 수 밖에 없었던 자에게는 누구든지 찾아오는 현실의 반동, 패러독스Paradox.
“탈리아, 괜찮아?”
“무리했군…”
그녀가 신음한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뒤에서 무엇인가 일어난다. 하은이 눈 앞에서 직접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한 생체병기다.
“탈리아! 뒤!”
망설이지 않고 걸어오는 생체 병기. 탈리아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팔에 맞아 벽으로 내팽겨쳐진다. 팔이 더욱 빠른 속도로 녹아 내린다. 그것이 성큼성큼 니콜에게 다가선다.
“어, 어라.”
그가 당황하며 방아쇠를 당기지만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시꺼멓게 불탄 예비 배터리 팩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황급히 허리에서 아까의 권총을 꺼내서 쏜다. 보랏빛 광선이 표피를 뚫지만 그것 뿐. 저지력이 없는 광선으로는 관절 부위를 정확히 맞추지 않는 이상 놈을 멈출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무릎을 노려서 쏘지만 잠시 휘청거릴 뿐.
“으아!”
비명을 지르는 그를 하은이 간발의 차로 떨어지는 일격에서 구해낸다. 나뒹굴다시피 하는 니콜을 똑바로 붙잡은 채 하은이 니콜의 권총을 쥔다.
그런데, 도저히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Paradigm 알 수가 없는 권총이다. 분명 예전에 봤던 것은 장난감 같이 생기긴 해도 방아쇠는 있었는데, 이 권총은 방아쇠도 없고 탄창도 삽입되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줘봐! 쓰지도 못하면서!”
니콜이 권총을 잡아채서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생체 병기를 향해 쏜다. 방아쇠도 없는데 어떻게 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녀가 니콜의 손을 잡고 대신 조준을 시작한다.
“뭐 하는거야?”
“내가 쏘라면 쏴.”
“그치만-“
니콜이 그녀의 태도에 질린 듯 입을 다문다. 하은이 니콜의 손을 움직여 권총을 조준한다.
“분명히-“
마치, 그녀의 손을 누군가Genius 인도하는 듯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끔찍한 수술대에서의 광경이 떠오른다.
풀썩, 하고 경련하던 여성의 모습. 폐 옆을 지나가는 이식된 신경다발.
총구가 그녀의 가슴에서 살짝 왼쪽을 향한다.
“쏴.”
그녀의 말과 함께 니콜이 -대체 어떻게 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권총을 발사한다.
“위잉-“
잠깐의 충전 소리와 함께, 보라색 빔이 한때 여성이었던 흉물의 가슴팍을 꿰뚫는다. 저지력은 없지만 관통력은 있다. 하은이 분명히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던 위치다. 보랏빛 광선이 신경 다발을 불태워버린다. 한때 여성이었던 것이 풀썩, 하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우와…”
하은이 손을 떼자, 니콜이 감탄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누나 대단하다.”
“너보다 군사 훈련을 좀 더 받은 것 뿐이야. 어쨌든 저걸 관통할 정도로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건 너니까, 반반으로 하자.”
그녀의 말에 니콜의 표정이 더욱 멍해진다.
“반할 거 같아… 이게 첫-“
그러나 그가 돌아보기도 전에 하은이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탈리아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은 엄청난 병기들을 가지고 있지만 정식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탈리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윽…”
“탈리아, 괜찮아?”
니콜이 가방을 뒤지더니 -자세히 살펴보면, 가방 안쪽이 바깥보다 2배는 넓다- 적수정이 그려진 주사기를 꺼내는 그.
“아플거니까 참아.”
그가 능숙한 동작으로 그녀에게 주사기를 찔러 넣는다. 그녀의 어깻죽지 밑으로 주사액이 퍼져 나간다. 그녀의 팔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근본 요소 Prime자체가 얼어붙는다. 하지만 잠깐이다. 진행을 되돌리는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늦춘 것에 불과하다.
“돌아가야…”
니콜의 말을 무시하듯 탈리아가 일어나서는 계단 위로 향한다.
“아직도 잡을거야? 우릴 구해줬으니까…”
“그건 피차일반이야.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지. 아까 멍 때리고 감상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치만 난 그렇게 막 끊는게 잘 안돼서……”
얼버무리는 니콜과 탈리아가 계단을 통해 지하층에서 나온다.
“오랜만입니다, 탈리아.”
한치도 어긋나지 않은, 동일한 목소리들이 동시에 물어온다. 탈리아가 갈수록 꼬여만 가는 상황에 탄식한다.
“하.”
1층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을 호위하듯 서있는 다수의 클론들이었다. 그들이 또 다시 한 한치의 차이도 없이 권총을 들어올린다. 심지어 정장마저도 똑같다. 얼굴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조금씩 다르게, 그러나 몰개성 하게 설계되어 있다.
“…상태를 보아하니, 당신들이 하은양을 구해준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들이 일제이 한 목소리로 묻는다. 탈리아는 빈정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전혀.”
“돌아가자. 저기, 에이다 씨 맞죠? 우리 그냥 보내주지 않을래요? 누나도 우리가 음… 구했으니까?”
“그렇게 하시죠.”
클론들이 동시에 대답한다. 니콜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가방 속에서 무엇인가 꺼낸다.
“어휴. 예비용으로 아껴 놨던 에너지까지 다 쓰겠네.”
불평하며 마치 리모컨 같은 그 장치에 케이블을 연결한채 키패드를 두드리는 니콜. 동시에 두 사람이 황금빛으로 잠시 빛나더니, 공기중으로 사라져버린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는 클론들이 동시에 권총을 내린다.
“괜찮습니까?”
그 말과 함께 한 여성이 정문을 열고 들어온다.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정보기관 요원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클론들과 똑같은 정장, 감정을 숨긴 표정, 생각을 읽을 수 없게 하는 흑색의 안경, 인종을 분간하기 힘든 생김새, 귀에 꽂힌 이어폰까지.
“아… 감사합니다.”
거의 하루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인지 하은이 약간 멍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에이다 웨더스입니다. 소령님의 부관이죠.”
그녀가 다가오자 클론 중 하나가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킨다.
“이 클론들은…?”
“저희 아말감이 부릴 수 있는 직접 통제 가능한 전투병력 중 하나입니다. 일반 시민으로 이루어진 병력은 모집의 효율성은 있으나 정보 통제의 비용을 생각하면 운용에 제한이 있죠. 그러나 클론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물론, 제가 직접 통제합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녀. 그녀가 한쪽 손을 들어올리자 클론들이 정확히 그 동작을 따라한다. 통제 수준이 아니라, 조종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멀쩡하시군요.”
“네.”
“꽤나 큰 소동을 일으켰더군요. 덕분에 주위에서 화재 신고를 비롯해 각종 신고가 들어와서 수월하게 찾았습니다. 의도한 일입니까?”
“반 정도…”
하은이 대답한다. 에이다의 말투는 소령보다 훨씬 사무적이었다.
“이시야마 교수는?”
“이미 도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정말 사무적이다.
“지하입니다.”
에이다가 잠시 그녀를 살핀다.
“지쳐 있겠지만, 활동에는 지장이 없겠군요. 안내를 부탁합니다.”
지하의 공간은, 괴이Freak한 광경이었다.
그곳은 마치 사무실이라면 하나씩 있는 서버실 같았다. 단, “컴퓨터”들이 기계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
“이건…”
적당히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 바이오컴퓨터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다. 푸른색의 관 안에 신경다발과 거대하게 부풀려진 뇌,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뼈와 척수액이 기괴한 모습으로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나선형으로 그것들을 감고 있는 점막과 그물망처럼 사방에 퍼져 있는 정체모를 생체 기관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것들은, 한때 사람이었다.
“이시야마 교수의 정보 처리 시스템이군요.”
그 뿐만이 아니다. 키보드의 역할을 대신해 직접 신경망으로부터 입력을 받아오는 젤 형태의 장치, 무수한 미생물이 끊임없이 색을 바꿔가며 글씨를 써내는, 말하자면 모니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 중 눈을 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직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부품들. 그들 중 대다수는 머리와 척추 부근이 절개되어 중추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일종의 보조 연산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다. 서서히 녹아가고 있기에 사실상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시야마 교수군요.”
그 복장을 알아본 하은이 말한다. 녹아가는 형상의 두개골에는 마치 탯줄을 연상케하는 무엇인가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끝은 중추 시스템을 이루는 거대한 신경망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아마 세계 곳곳에 안전가옥을 마련하고 있을 겁니다. 그 중 한군데로 스스로의 의식을 전송해 클론을 만드는 중이겠죠. 그를 잡기가 더 어려워지겠군요.”
간략한 에이다의 설명.
“이런식Vulgar, Qliphothic으로 만들어진 바이오 컴퓨터는 처음 보는군요.”
턱.
갑자기 무엇인가 하은의 어깨를 잡는다. 두 사람이 홱, 하고 뒤를 돌아본다.
“다… 당신들은…”
허리 밑이 이 ‘컴퓨터’에 파묻혀 있는 사람이다. 그의 얼굴 위로 비대화된 신경다발들이 피부를 뚫을 기세로 불거지고 있었다. 말도 멀쩡히 할 수 있다. 제한적이지만 동작도 가능하다. 두 사람을 알아본 것으로 볼 때 외부의 자극에 반응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메인 인터페이스인 것이다.
“그… 그 사람은…?”
그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대신 녹아 내리고 있는 시체를 가리킨다.
“여… 역시…”
그가 갑자기 눈을 까뒤집는다.
“으…으아악!”
동시에 수많은 기관들이 꿈틀거린다. 죽어버린 세포들을 대체할 새로운 세포를 만들고, 삼중으로 백업된 데이터를 다시 백업하고, 필요 없는 데이터는 세포 자체를 사멸 시킴으로써 지워버린다. 이 사람은 그 과정을 온 신경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미안… 미안.. ㅎ…. 무…”
그가 말을 잇지 못한다.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 삭제된 것이겠지. 그런 것은 필요 없으니까.
“드디어 전 죽을 수 있습니까?”
그가 묻는다.
“저희는 그의 연구결과들을 저장하고 끊임없이 기억해내야 합니다. 그가 본 것들, 기억한 것들, 그의 구상들까지 전부요! 그 끔찍한 것들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매분 매초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칠 수조차 없어요!”
절규하듯 말하는 그.
“그의 기억을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이 사람들을 전부 죽여주세요!”
그가 간절하게 부탁한다. 하은이 회수해 온 자신의 권총을 꺼내들어, 그의 이마에 겨눈다.
“고…마…고…”
고맙습니다, 라는 단어까지 잊어버린 것이겠지.
그녀가 방아쇠에 손을 올린다.
“어서요.”
그가 속삭이듯 말한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방 안의 살아있는 모든 것이 꿈틀거린다.
“…”
그러나,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미안합니다.”
하은은, 총구를 내린다.
“하, 하지만! 왜입니까! 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의 두뇌가 또다시 회로로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전산 시스템이라면 항시 계산을 수행하고 있을터.
“이시야마 교수를 잡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머릿속에 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때까지는…”
하은이 무감정하게 말한다.
“제발! 어떻게-“
그의 눈동자가 커진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곧 눈 속의 실핏줄이 터지며 그것이 피눈물로 변한다.
“…미안합니다.”
하은이 고개를 돌리고는 방을 나선다. 그가 손을 내밀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다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위장 절차를 요청한다.
“이젠 좀 괜찮아?”
니콜이 묻자 탈리아가 끄덕인다. 그녀는 100호 캔버스를 앞에 두고 유화를 그리고 있었다. 녹아 내린 그녀의 팔은 니콜이 제작한 위상 고정 장치로 감싸여 있었다.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정도 정립된 그들 만의 처방이다. 그녀가 붓을 들더니 그림의 한 부분을 지운다. 누군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던 부분이다.
“그 그림은 얼마나 그려야 만족할거야?”
“글쎄.”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니콜이 위상 고정 장치를 체크한다. 탈리아가 지워졌던 부분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지우고, 덧칠하고, 다시 지우고 덧칠하고.
“언제까지 그릴건데?”
“완벽해질 때까지.”
그녀가 대답하며 잠시 그림을 살핀다. 니콜은 점검을 마치고는 여기저기가 고장난 자신의 장비들을 점검하러 돌아간다.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은지 탈리아는 계속 그림을 고친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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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챱챱. 전문적으로 글쓰는 사람이 아니다보니까 캐릭 창조 하나하나마다 넘 고통이고 장편쓰는 사람들 존경스럽다..
짤은 할로우원.. 이 아니라 스타워즈 레이가 시스라면? 의 팬아트인듯
가이드 투 트래디션 엽편처럼 개념설명을 소설식으로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ㄴ 그건 옛날에 많이 썼잖워
그거 별로임
더보고 싶은데 이제 못보네요
님님 다음 안타고니스트로 언실리 코트의 fair folk 등장시켜 주셈
테크노크라트의 Banality 10에 산채로 겉과 속이 뒤집히며 고통스럽게 타죽는 타락한 sidhe 귀족새끼 보고 싶음 ^^
ㅅㅇㅁ // 힉 왜 못봐여
104// 님 이거 그러는 이야기 아님 (..) 히익
너무 좋네요...
아주 소설이여 소설 진짜 재밌슴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