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적는 글. '근데 여기서 뒹굴거리는 사람이면 다들 이 내용은 알 거 같긴 하다'고 썼는데

아닌 거 같아졌어. 


선 / 악

이거는 존중하는 "대상"의 범위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면 됨. 당연히 악할 수록 이 범위는 좁아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선한 캐릭터라면 상황에 따라서는 심지어 적에게도 호의를 베풀겠고, 중립이라면 자기 지인이나 파티원부터 챙길거고, 악한 캐릭터라면 일단 상황이 꼬이거나 뭔가 이득이 생길 때 일단 자기부터 챙기고 보겠지. 자기 캐릭터를 특정 성향으로 짰다면 대체로 이런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면 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범위가 사실 정확히 딱딱 맞춰 떨어질 리가 없다는 것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자기 가치관과 상황의 충돌을 감수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임. 일단 전자부터 예를 들자면 조낸 사람을 밥먹듯이 죽이는 놈도 가끔씩 멋대로 거지한테 동전 한 닢 정도 적선하는 뭐 그런 경우를 예로 들면 될 것 같다. 이건 그러려니 하는데... 역시 이거보다는 자기 가치관과 상황의 충돌을 감수해야 하는 게 더 큰 문제겠지.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편법" 내지는 "동료"의 도움을 받는 것임. 예를 들어서 "절대 포로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서약을 했는데, 이 서약이 깨지면 죽거나 병신이 되는 캐릭터가 있다면 다른 캐릭터가 "멀리 데려가서 풀어주고 따라간다"고 하고 포로만 데리고 멀리 가고 걔는 다른 파티원들이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먼저 가는 식으로 말이지. 당연히 돌아올 때는 포로는 없고.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런 식으로 편법을 써서 상황을 해결하는 걸 대체 누구 중심으로 맞추느냐인데... 그거는 일단 아래에서 설명.


질서 / 혼돈

이쪽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과 방법에 얼마나 덜 얽매이느냐...의 문제가 됨.

질서 성향으로 갈수록 나름대로 정해진 수단과 방법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혼돈은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걸 얼마든지 개무시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성향임. 문제는 이거도 상황 나름이라는 거고, 눈치없이 막 나대면 그냥 트롤링에 불과함. 왜냐면 혼돈 성향은 말 그대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대한 문제지, 개념을 아주 은하철도 999에 태워다 보내고 막 아무거나 저질러도 된다는 그런 게 아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악 성향의 빌런들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사실 이 새퀴들은 자기 빼고는 신경 안 쓰니까(악) 자기의 개인적 목표 - 남이 보기엔 아주 쓸데 없을 지도 모르는 것 - 에 도달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데다(혼돈) 거기에 얽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실 아무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방해되면 다 밀어버릴 수 있고 실제로 대개 그러기 때문이지! 다만 어떤 혼돈+악 성향 악당이라도 사실 그 "개인적 목표"에는 다들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게 함정이야.  


다시 DC 코믹스의 예를 들어서 혼돈+악=트롤링이라는 편견을 만드는데 일조한 장본인 중 하나인 고담의 야인 김조커 선생을 보자.

사실 이 양반의 목표는 "박쥐남과 하하호호 노는 거" 그 자체다. 그런데 이 양반은 혼돈+악이잖아? 그러니까 악 성향이므로 목표에 필요한 인물 둘, "박쥐남과 자기" 말고는 사실 다 존중 안 해도 상관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혼돈 성향이니까 그 수단도 가리지 않는 거지. 그러니까 범죄를 일으켜서 박쥐남을 불러내고, 다른 누군가가 (아군이라도) 박쥐남을 쓰러뜨린다거나 해서 자신의 목표를 방해하면 가차없이 제압하며 계속 박쥐남과 논다는 자기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거지. 가끔씩은 파트너인 할리도 조지잖아? 근데 TRPG에서의 트롤링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내부에서 설명 가능한 논리를 가진 게 아니거든. "캐릭터 자신의 개인적 목표"를 위한 나름의 논리를 갖고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 그 뒤에 있는 "플레이어의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캐릭터가 그 세계 안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거잖냐. 그래놓고는 "어... 제 캐릭터는 혼돈 악이라서 RP한 거예요 ㅎㅎ"라고 말하기만 하면 수습된다고 믿는 거지! 설명했듯이 그 목표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많은 양아치들이 혼돈+악 성향을 트롤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게 가슴 아픈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공동 목표 / 규칙

사실 가장 중요한 거. 성향 상관 없이 파티에서 같이 활동한다는 것은 파티 공동의 목표나 규칙에 "일단은" 동의한 상태라는 것임.

문제는 이게 얼마나 가냐가 문제겠지만... 그런데 이걸 무시한다면 나머지 파티원들과는 더 이상의 관계가 없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음. 솔직히 너 같으면 같이 일하지도 않고 자원만 축내고 있을 놈을 굳이 파티에 데리고 있고 싶냐? 적어도 와우같은 MMORPG 게임에서 이런 거 하나는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건 인정해야 됨. 


그러니 이것도 또 한 번 DC 코믹스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플래시와 투닥거리는 범죄자 집단인 "로그스"는 위의 범주대로 나누어 보자면 "질서+악" 성향의 파티로서 범죄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여자와 어린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라든가 "플래시가 깝치면 조지되 실제로 죽이지는 않는다" 같은 나름대로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영업해 왔음. 그런데 "블랙키스트 나이트" 이벤트 당시에 이 파티의 멤버 중 하나가 좀비가 된 자기 가족에게 여자나 어린이들까지도 먹이로 던져 주다 다른 파티원들에게 걸림. 전통적인 파티의 규칙을 어긴 것에 개빡친 캡틴 콜드는 그 대가로 얘를 가족이 있는 곳에 던져 넣었고, 당연히 아무도 말리지 않았음.


뭐 로그스는 다들 이런 성향이라 그냥 애 하나 던져지고 끝났지만 또 여기 누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후폭풍이 벌어질 수 있고, 플레이 분위기도 망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캐릭터가 가진 가치관이나 생각이 파티의 상황 / 공동의 목표와 대놓고 충돌하는 경우 양 쪽 다 일단 일을 저지르기 전에 일단 합의점부터 좀 찾고, 안 되겠다면 양 쪽이 어디서 어떻게 합의할 수 없는지를 확실히 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함. 그렇게 명확하게 정리해 보면 대개 누가 옳냐... 까지는 아니어도 누가 더 말이 안 되냐...는 건 견적이 대충 나오거든. 그러면 좀 더 쉽게 중재할 여지가 생기고, 말하는 놈 입장에서도 자기가 그걸 고집하다보면 병맛스러워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말이야.


3줄 요약

선 / 악과 질서 / 혼돈을 요약하면 존중하는 대상과 사용하는 수단의 범위 문제다.

혼돈+악은 단순한 트롤러들의 피난처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표와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파티 내에서 가치관 / 성향 문제로 싸울 때는 일단 파티의 공통 목표 / 규칙부터 생각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