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취미를 섭렵해왔지만, 그 중 압도적으로 \'타인\'을 연기하는 경험을 주는 취미는 \'trpg\'와 \'연극\' 뿐이었다. 후자는 정해진 대본과 무대가 정해져 있어, 그 체험에 한계가 있었지만, 전자는 달랐다. 원하는 세계와 모험(룰북 세팅 or 시나리오)을 선택하고, 내 욕망이 듬뿍 담긴 캐릭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꿈꾸는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인물을 살아내며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근데, 그 경험 자체를 현실 도피용으로 쓰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 이들은 굉장히 천편일률적인 행태를 보였다. 현실의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을 창조하고, 거기에 과몰입해 그 이상적 인물의 행위에 딴지거는 타인을 비난했다. 몇 번을 새로이 플레이를 시작해도 그런 이들의 캐릭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똑같은 성격, 똑같은 외모, 똑같은 말투...달라지는게 있다면 이름, 혹은 직업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현실도피자들이 공유하는 특성은 굉장히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디테일에 집착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방대한 백그라운드와 세밀한 설정들이 분명히 플레이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플레이의 몰입을 돕고, 플레이 내에 써먹을 수 있는 로어들이 넘쳐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것들이니까.

그러나 이들 현실도피자들은 \'자신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기 위한 디테일에만 집착했다.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르려했고, 그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냈다. 타인이 불쾌해 할 만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하고, 그 것이 지극히 정당한 것임을 당당히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대리 만족용 행동이 현실의 자신에게 더 큰 충족감을 줄 수 있는 설정들에 집착을 했다. 앞서 언급한 지나치게 시시콜콜한 설정들에 말이다. 자신이 마치 \'현실\'에서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은, 또다른 세계에서 그런 일들을 하는 듯한 디테일들에 말이다.

적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다는 위험한 선언을 하고 gm에게 그것의 상세한 묘사를 요구하는 디테일, 캐릭터의 주변 환경과의 과도한 인터렉션, 플레이의 흐름을 끊는 잡담들...

그런 것들이 한데 모인 것이 상시플, 일상플의 원동력이 되었겠지. 그 가상의 세계에 항상 연결될 수 있다는 안도감, 도피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가장 최적화된 플레이 말이다.

이런 상시플, 일상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과도할 정도로 다루어졌으니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이 글을 보는 \'현실도피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Rpg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면, 빨리 벗어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