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승부는 결정났다.


 이쪽의 비장의 일격은, 끝내 상대를 찌르지 못하고 도중에 바스라졌다.




 "마지막 남은 영웅점을 소모해 치명타 확정 굴림을 리롤, 네놈의 급소를 찌른다.


 이것으로 [THE END] 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분해 광선마저 스매시 프롬 더 에어(Smash From The Air) 피트로 짤라낸 파이터가, 무자비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그 앞에 쥐죽은 듯이 고요하게 서 있던 소녀는.




 "ㅡ윽...!"




 다음 순간,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5판!!!!"




 마스터인 소년이 절규를 토해내며 달려갔다. 물론, 피웅덩이에 잠긴 소녀의 응답은 없다.


 파이터는 거대한 팔치온을 어깨 너머로 짊어지며 나지막히 말했다.




 "적이지만 훌륭한 투혼이었다. AC와 공격 보너스에 한계가 있는 5판, 심지어 개중에서도 최약의 직업이라 손꼽히는 소서러를 들고서 이정도까지 몰아붙일 줄은.


 가속과 미스티 스텝으로 기동성을 확보해, 확정 피해를 주는 마법 화살이나 화염구 등의 주문들로 체력을 갉아먹는다는 전술도 훌륭했다.


 그런 너희들의 패인은 단 하나..."




 투구 너머로 붉은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상대가 나빴다는 것. 오직 그뿐이다."




 5판이 필사적으로 쌓아올린 턴 당 120피트의 기동성. 여기에 5판 특유의 이동->행동->이동 매커니즘을 활용한 치고 빠지는 원거리 전술은, 상대 - 패스파인더 파이터 - 의 간단한 움직임에 파해되었다. 비행과 가속을 중첩시키고 돌격을 행한다는 너무나도 간단한 전술에.


 셀레스티얼 아머로 비행 속도 60피트를 받고, 가속부츠로 그 속도에 +30피트를 더한다. 그리고 돌격을 통해 그 두 배인 180피트를 이동해서 때린다. 패스파인더 유저라면 그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전술을, 5판과 그 마스터는 떠올릴 수 없었다.


 5판에는 마법 아이템이 공용이 아니니까.


 가속과 비행을 중첩시킬 수 없으니까.


 물론 원래라면 설령 접근을 허용했다 하더라도 쓰러질 일까지는 없었다. 왜냐면 분신술이 있으니까. 엄청나게 운이 없지 않는 한 분신으로 공격 한 번 정도는 버틸 수 있고, 그럼 다음 턴에 차원문으로 도주해버리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디스펠이든 뭐든 준비해서 대책을 세우면 된다.


 그러나... 패스파인더 파이터의 '어떤 능력' 이,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고급 무기 훈련 워리어 스피릿 ㅡ 하트시커(Heartseeker)"




 파이조의 노답 씹사기 디자인의 대표격. 대부분의 패파플에서 필밴 선봉장으로 꼽히는, 고무훈의 워리어 스피릿.


 그 능력으로 뽑아온 모든 은폐를 무시하는 능력에, 5판은 반항조차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쌓아온 데이터의 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이클롭스 헬름 (하루 1회, 주사위 값을 임의로 결정 가능. 자연 20도 가능.) 으로 100% 치명타를 뿌리는 일격 같은 건, 네놈들은 상상도 못할 테지. 그것이 우리들ㅡPaizoㅡ의 힘이다. 수많은 판본을 마구 섞어 탄생시킨 뒤틀린 파워빌딩.


 뭐, 치명타 확정 굴림이 펌블났을 땐 과연 나라도 간담이 서늘했다만... 영웅점을 소모하면 그 정도쯤은 덮어쓸 수 있다는 거지."


 "5판! 일어나! 5판!!"




 이미 소년의 귀에, 파이터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저 피투성이가 된 소녀를 일으켜 울부짖을 뿐.


 파이터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냉엄하게 선언했다.




 "소용없다, 소년. 팔치온의 크리티컬 배수는 x3. 내 자연 피해가 45점이었으니, 그것이 3배로 늘어나면 총 피해는 135점이다. 일개 시전자가 버틸 수 있는 딜이 아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저승 가는 길 명복이나 빌어줘라."


 "시끄러!! 웃기지 마!! 5판은 죽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꺼내 마구 뒤지는 소년. 아마 포션이라도 찾으려는 것일까. 5판 포션은 끽해봐야 2d4+2 만 회복시켜줄 텐데.


 파이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돌았다.




 '아무리 명령이라고는 하나, 어린 여자를 참살한 게 유쾌하지만은 않군...'




 스마이트류를 피하기 위해 가치관도 TN을 고른 파이터였지만, 그에게도 인간의 마음은 남아 있다. 살인이 기분 좋을 리는 없는 것이다.


 돌아가면 평소처럼 검이라도 휘둘러서 잡념을 떨쳐내자. 파이터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대 그 때.




 "....기다려..."


 "....?!"




 등 뒤에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이터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ㅡ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만신창이가 된 채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5판 소서러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 어떻게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거지? 힐링포션 따위로 회복될 피해량은 아니었을 텐데?"


 "아아, 위험... 했지...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으니까...


 그렇지만... 쿨럭!"




 소서러가 피를 토해냈다. 거의 빈사 직전의 몰골. 하얀 원피스는 그녀 자신이 흘린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ㅡ 그녀는 투지를 잃지 않은 눈빛으로 파이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5판은... 체력이 음수로 떨어지는 공격을 받아도 0으로 고정되니까 말야...!"


 "...그런 시스템이 있었나."




 파이터가 솔직하게 경탄에 찬 목소리를 냈다.


 소서러의 말은 틀리지 않다. 5판에서는 체력이 음수로 떨어지더라도 HP는 0에서 고정되어 더 내려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큰 피해를 입어도 힐링 포션 하나로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있다. 체력을 음수로 떨어뜨리는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음수의 절댓값이 체력의 최대치를 초과하면 즉사한다는 사실.


 그녀의 최대 HP는 68. 파이터가 한 번의 공격으로 입힌 135점의 피해를 빼면 -67이 나온다. 즉사까지 단 1 차이.


 즉 그녀는 방금 문자 그대로 "죽음의 문턱" 을 밟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그녀의 마스터.




 "5판, 안돼! 더 이상 무리하지 마!"




 아마 한 번 더 공격을 받으면, 그녀는 눕는다. 즉사까지는 아니더라도 0이 되는 건 확정이다.


 여기까지라면 아까랑 비슷한 상황이지만, 다른 것이 있다. 이번에는 파이터가 소년이 포션을 먹여주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리라는 것. 대신 무자비하게 확인사살을 가해, 확실하게 그녀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그것은 소서러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괜찮아요, 마스터."




 그녀는 생긋 웃었다. 마치 자신의 주인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한 번만 더 공격받으면 넌 틀림없이 죽..."


 "거기까지 안 가요. 그 전에 제가 이기니까."


 "...어?"




 말문이 막힌 소년의 뒤로, 파이터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흥미로운 주장이군. 네가 나한테 이긴다는 건가? 이 국면에서?"


 "그래."


 "어떻게 말이지?"


 "단 한 방만 꽂아넣으면 돼. 네 HP도 16밖에 안 남았잖아?"




 확실히, 소서러의 필사적인 치고 빠지기로 파이터 역시 체력이 많이 남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5판이 아니라서 재기의 바람 같은 것도 쓸 수 없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런 소서러의 주장을 코웃음쳤다.




 "아, 분명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러는 네 쪽은 주문 슬롯을 다 쓰지 않았던가? 소서리 포인트도 슬롯을 바꿔먹을 수 없는 1점뿐이고.


 반면 내 쪽은 다음 턴에 다가가서 한 대만 치면 승리. 대체 어떻게 날 상대하겠다는 거냐? 캔트립 크리라도 기대해볼 셈이냐?"


 "두고 보면 알아."




 소서러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법의 힘이 깃든 두루마리. 일회용 주문 발사대. 통칭 스크롤(Scroll).




 "스크롤인가? 뭐 파워 워드나 위시 주문이라도 챙겨왔나보지?"


 "설마. 우린 2레벨 주문 이상은 다 언커먼이라구. 이건 1레벨 주문이야."


 "1레벨???"




 파이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폭소하기 시작했다.




 "크하핫, 아하하하! 1레벨! 그것도 스크롤이라! 코미디가 따로 없군!


 좋다! 어디 한번 써봐라! 그게 날 쓰러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파이터가 손을 활짝 펼쳤다.


 그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내성은 암드 브레이버리-파이터 리플렉스 효과로 인내/반사/의지 전부 +15 이상. 게다가 운명의 부적까지 차서 펌블 대책까지 확실. 스크롤에 대한 내성 성공률은 95%도 아니고 100%다.


 그렇다면 16 남은 HP를 깎으면 되는가? 유감스럽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파이터는 고무훈으로 무기 희생도 찍어서 1라운드 한정으로 데미지를 전부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좆같은 건 다 들었다.


 내성은 100% 성공. HP 피해도 100% 흡수. 뭘 당하든 1턴은 버틸 수 있고, 그럼 다음 턴에 접근해서 한 대만 후려치면 된다. 그것으로 게임은 끝난다. 정말 위시라도 들고 오지 않는 한 파이터에게 사각은 없었다.


 ...패스파인더 기준으로는 말이다.




 "자, 그래서 무슨 주문을 쓸거지? 어디 한번 말해봐라!"


 "슬립."


 "슬리이이입!? 그딴 저렙용 주문을 들어서 뭣에 쓰려...고...."




 그 순간, 파이터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는 사실이 스쳐지나갔다.


 컨센트레이션의 도입으로 대부분이 너프당한 댄디 5판의 마법체계에서, 유일하게 3.5 때에 비해 대폭 버프받은 주문이 있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쓰려는 슬립.


 1라운드를 잡아먹던 시전시간이, 다른 마법과 똑같은 1액션으로 너프되었다. 4HD 이하의 개체에게만 적용되던 주문이, 현재 체력 기반으로 적용대상이 정해지도록 바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설마...!"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네. 둔해빠진 멍청이가!!"




 소서러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5판 슬립은 내성 같은거 안 굴려! HP가 5d8 결과값 이하면 무조건 쓰러지는 거야!


 네놈의 체력이 16밖에 남지 않고, 나한테 턴이 돌아온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있었어!"


 "이 개년이...!!!"


 "받아라! 이것이 나의... 우리들ㅡWizard of the Coastㅡ의 최후의 의지다!!"




 소서러는 그렇게 외치며 스크롤을 찢었다.


 찢어진 틈새에서 푸른빛 마법 기운이 새어져나오더니, 그대로 파이터에게로 향했다.


 굴림의 결과는 5d8=27. 평균값을 아득히 넘는 수치가 마력으로 화해 파이터를 감싸고...




 "제...길... 뭐 이딴... 사기가..."




 결국 파이터는 몰려오는 졸음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소서러의 모습이었다.




 "꼬우면 너도 5판 하든가."




 그 말을 들은 것을 끝으로, 파이터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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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뭘 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