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당연히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음. 그러니 또 뻘글으로 추위를 달래보겠음.
핍진성
문학 작품 등에서는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이 있음. '외견상 사실적이거나 진실해 보이는 정도나 질'이라고
해석되는데, 이 개념을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지금 독자든 관객이든 하여간 이 작품을 보는 애들 앞에 주어진 상황이
걔들에게 보여 준 세계관 내에서 얼마나 있음직한가"를 나타냄.
문제는 이게 결핍되면 이야기가 참 꼴사나워진다는 것을 생각 못하는 놈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야. 특히 자신이 이야기를
보기만 할 뿐 아니라 만들어가는 입장이 되서 그러는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해져. 잘 모르겠다면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인
'그 영화'가 그렇게 욕을 쳐먹고 '스타워즈' 기준으로는 흥행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핍진성이 부족하기 때문임.
그러면 핍진성을 깎아먹는 두 가지 방법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다른 매체에서 뭘 가져와서 넣어보기
대략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로 요약할 수 있을 테고, 혼모노력이 넘쳐 흐르는 상징과도 같은 개념인데, 여기에도
사실 생각해 봐야 할 요소가 좀 있음....
<간단한 예시>
'츠무기'는 얼마 전에 D&D를 하는 팀에 새로 들어왔음. D&D는 전에도 조금 플레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라노베을
보고 거기 나왔던 주인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어느 나라 왕의 사생아인데 투구와 판금 갑옷으로 정체를 감추고 다니는
여성 파이터 '못쟝'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재미있게 플레이를 했었음. 그래서 츠무기는 생각 없이 이번에도 똑같이
못쟝으로 플레이를 해 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불행히도 얘가 이번 팀에서 플레이하게 될 세계관은 다크 선이었음....
(이하 생략)
다크 선이 무슨 세계관인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전쟁 및 인종청소를 하다보니까 세계 자체가 사막화됐고
지배자들은 인간을 때려치운 뒤에 진짜 용이 된 지 오래고 세계의 마력이 고갈된 여파로 금속으로 된 물건이 희귀해져
재수가 없으면 평생 구경도 못하는 그런 세계관임. 그러니까 저번 플레이에서는 못쟝은 그 세계관에 나름대로 적합했던
캐릭터였겠지만, 이번에는 출신과 장비가 모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캐릭터가 되었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다른 데서
가져온 캐릭터를 넣기 전에 일단 그 세계관의 상황 파악부터 잘 하고 캐릭터를 집어넣어라'는 의미라는 거지.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은 일단 그렇게 집어 넣은 캐릭터는 원작에 나온 인물이 아니라 그 세계관 내의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거임. 그게 싫으면 이고깽같은 설정을 갖고서 억지로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고 주장해도 되는데 그렇게 해 봤자
그 세계관의 사회적 규칙을 거스르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요새 이고깽 라노베에서는 대부분
그게 싫으니까 뭔가 능력을 좀 줘서 반칙을 쓰게 하는데 TRPG에서 그걸 그냥 구경해 줄 만한 마스터는 없을 거임.
사실 짬먹은 마스터가 오히려 순순히 구경해 준다고 한다면 그쪽이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세계관의 축을 무시 / 왜곡하기
이쪽은 플레이어보다는 마스터나 시나리오 제작자 쪽에서 나오는 문제인데, 기존 세계관의 축을 다루기 힘들거나 혹은
그런 거 잘 모르니까,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까 패스해 버리는 거임. 문제는 이러면 그게 뭐하러 그 세계관으로
돌아가야하는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음. 이거에 대해서는 간단한 예시보다는 다들 최근에 흉흉한
소문을 들어 보았을 '그 영화'로 예를 들어보자.
'그 영화'에서는 하이퍼스페이스 항행을 활용한 자폭 공격이 나오는데, 사실 이 장면은 아마도 에피소드 6에서 완성된
루크 스카이워커의 캐릭터가 이상해진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임. 자폭 공격 자체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문제는
그 방법과 여파거든. 이게 먹힌다는 것을 보여주면 하이퍼스페이스 항행이 가능한 모든 함선은 자폭 공격에 활용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옴. 근데 '그 영화' 제작진들이 간과한 것은 기존 작품들의 우주전 장면들 절대 다수는 그런 개념을
도입한 적이 없었다는 거지.
예를 들어서 '그 영화' 설정대로라면 데스스타도 드로이드 하나 하이퍼스페이스 항행시킨 엑스 윙 한 대에 태워다가
박았으면 끝났을 테니 에피소드 4의 최후반부는 그냥 개뻘짓이 되고, 대놓고 드로이드를 마구 굴리고 자폭 공격도 했던
분리주의 연합은 한참 전에 하이퍼스페이스 항행을 통한 드로이드 대량 자폭 전술로 공화국 해군을 개박살냈어야 함.
이렇게 설명하니까 이해가 쉽지? 일단 이렇게 한 번 세계관의 룰을 깨고, 그게 반복되면 이게 대체 왜 그 세계관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음. 비슷한 예로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가 욕을 쳐먹는 이유도 절반은
사실 이 작품이 기존 드라마 시리즈들의 프리퀄이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그것들과는 따로 노는 설정 / 방향으로 향하는
물건이라 그럼. 쌍제이가 제작한 스타 트렉 영화들 마냥 '이건 기존 드라마 시리즈와 다른 세계관이에요' 핑계만 댔어도
다들 어느 정도는 참아 주고 봤을 거임.
다만 TRPG에서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데... 왜냐면 마스터가 최종 결정권을 쥐니까 이놈이 '우리 플에서는 그렇다'고
한 마디만 하면 그런 게 됨. 물론 다른 데서 그렇게 나오는 결과물을 본다면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 알게 뭐야. 물론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도 그게 꼬우면 참던가 그냥 그 팀에서는 플레이를 아예 안 해야지 뭐.
물론 '우리 플에서는 그렇다'는 이 논리도 아예 마스터를 위한 무적치트인 건 아닌데, AWE로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
<간단한 예시>
'미나코', '로코', '유리코'가 '리츠코'가 마스터하는 AWE 기반 세기말 미소녀 모험 RPG인 '신데이루'를 돌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로코'가 판정에 실패했다고 치자. 리츠코는 이 상황에서 마스터 액션을 발동할 수 있겠지? 문제는 대개 AWE 기반
룰에는 판정에 실패하면 플레이어가 치르는 대가 정도만 제시되고, 어떤 상황에 어떤 마스터 액션을 쓰라는 방식의 설명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는 것임. 쉽게 말해서 리츠코가 로코를 괴롭히고 싶다면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져 명중한다는 내용의
마스터 액션을 해도 됨. 문제는 그냥 '아 몰라 아무튼 떨어짐'하면 아무도 납득해 주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리츠코는 로코가 판정에 실패해서 뭔가 초고대 문명의 보안 장치 같은 것을 작동시켰다고 설명하고 로코의 캐릭터 머리
위에다 메테오를 떨어뜨리기로 했음.
(이하 생략)
쉽게 말해서 마스터가 들이대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는 이야기임. 또한 이거하고 같은 선에서 보면 '이미 제시한 설정을
새로 번복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충분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러면 무조건 마스터가 제시해 왔던 이야기의
핍진성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훼손되면서 위의 '아 몰라 아무튼 떨어짐'과 같은 상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임. 그러니까
일단 자신이 제시했던 설정을 부정 / 번복하거나 새로운 설정을 내놓으려면 그에 걸맞는 이유를 댈 준비를 하고 있어야
이야기가 안 꼬인다는 거야.
3줄 요약
핍진성이라는 개념이 아무튼 TRPG 플레이에도 존재함.
마스터가 이거 신경을 안 쓰면 이야기가 대개 이상해짐.
그러니 좋은 플레이를 원하면 신경을 좀 써 주도록 하자.
P.S : 이 글은 밀리시타 / 페이트 / 스타워즈 / 북두의 권 등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줄 요약: 무슨 이야기든 최소한 아구는 맞아야한다
외부에서 전투기 한 대가 들어와서 궁극무적우주최강병기를 부술 수 있게 만들거나(결국 설정을 땜빵하기 위해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 우주 단위로 노는 정예병들이 이워크의 화살에 학살당하거나 하던 시리즈에서 핍진성을 논하는 건 너무 양심이 없지 않을까... 핍진성이야 이전이랑 차이 없는데 원작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
근데 스타워즈 처음부터 끝까지 본건 에피소드1뿐이라 왜 8가지고 발광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음.
이워크는 낙하곰에서 모티브를 얻은 식인종 전투종족입니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역시 데스스타는 신경쓰지 않을 줄 알았어! ㅠㅠ
거대한 병기가 어처구니 없이 파괴되는 것은 다이호 / 시나노 등으로 입증된 일본군의 전통이며 은하 제국은 일본군을 모티브 중 하나로 삼은 세력이므로 어찌보면 설득력이 있는 전개입니다.
핍진성이라는 말 대신 개연성이라는 단어도 괜찮지 않을까? 거의 비슷한거 같은데
라스트제다이가 욕먹는 이유는 뭐... 디즈니가 디즈니했기 때문
둘 다 비슷한 말 맞음. 다만 개연성은 현실적인 관점에도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인데, 핍진성은 대개 작품 세계관 내부 범위로 한정된다고 보면 됨. 예를 들어서 이 위의 "아니 그 조그만 이워크의 돌이나 화살에 스톰트루퍼가 학살되는 게 가능하냐"는 건 개연성이 별로 없지만 "스타워즈 세계관의 이워크는 사실 한 솔로마저 잡아먹을 뻔 했던 식인종 전투종족이며 살짝 긁힌 상처로도 훅 가는 신경독을 무기로 사용한다"라는 설명이 붙으면 핍진성이 생기는 거임.
ㅁㅈ 그 세계관 내에서 말이 되는거면 더 랍스터 같은 영화처럼 현실성 1도 없어도 괜찮은데 모순되는 설정에 로지컬한 설명이 없으면 별로더라
그렇지. 내가 말하는 게 그거임.
결론은 라스트 제다이가 병신이라는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