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드워프 칠형제보다 더 이전에 플레이했던 프리퀄 격인 이야기임.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첫 TRPG 캠페인이자 가장 오래했던 캠페인이기도 하고, 드워프 칠형제를 본격 드워프 덕후로 만든 캠페인이기도 해.
그래서 어쩌면 조금 이야기가 유치할 수도 있어. 아무래도 가장 미숙하던 시기의 이야기다보니까 말야.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친구 두 놈과 TRPG를 시작했어. 놀랍게도 셋 다 전사를 하고 싶어했는데
나는 주인공이라면 왠지 전사일 것 같다고 생각했고, 다른 친구 놈 하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근데 다른 친구 한 놈은 달랐어. 그 녀석은 드워프 방패전사를 하고 싶어했어.
그 놈이 제일 즐겨 하는 게임이 와우였는데, 거기서 플레이 한 캐릭터가 드워프 방어특성 탄 전사였거든...
녀석은 자신이 왜 드워프 전사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드워프의 멋짐'에 대해 역설했고
아버지는 왕가의 먼 방계 혈통으로 멀리 동쪽에 일족 소유의 광산을 하나 가지고 있으며, 자기 위로 두 형님이 있었는데 광산을 두고 싸운 고블린과의 두 차례의 전쟁에서 각각 한 명씩 전사했고, 자기는 본래 기술자였지만 위로 두 형님이 전사했기 때문에 가문의 수장이 되기 위해 전사 교육을 받는다는 설정의 캐릭터를 만들어 왔어.
가문의 수장이 되기 위해 왜 전사 교육이 필요하냐고 묻자, 드워프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가진 종족이므로 일족의 수장은 가족을 지킬 만한 힘과 무예를 가져야 하는 설정으로 하고 싶다고 했음.
우리보다 한 학년 위였던 마스터는 거기에 크게 흡족했는지 "맥주 마시는 RP 같은거 잘하면 좋겠다"면서 우선 수락했음.
심지어 원래 기술자가 되기로 했다는 설정이니까 특별히 1레벨 기술점은 익스퍼트(Expert) 클래스 만큼의 기술점을 주겠다고 했었음.
파이터(Fighter)는 기술점이 Int+2라서 전직 기술자라는 설정을 살릴 수 없었거든, 그래서 Int+8을 받고 시작했지.
반면에 나랑 다른 친구 한 놈은 정말 참담했어.
둘 다 전사를 하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으면서 들고왔던 캐릭터가 심지어 컨셉까지 비슷했거든. '유명한 무가 가문의 후예인 소년 무사' 같은 설정이었던거야.
마스터는 고민을 하다가 한 명은 마법사를 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가 양보하는 것으로 했어.
그런 나에게 마스터는 그럼 네 캐릭터는 본래 무가출신인데 몸이 허약해서 마법사 교육을 받은게 어떠냐고 물었고, 본래 무가 출신이니까 시작 HD는 위저드의 d4가 아니라 워리어의 d8을 받고 시작하고, 전투 무기 숙련(Martial Weapon Proficiency)도 같이 주겠다고 했어. 기초적인 전사 교육은 받았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인간 전사 컨셉을 유지한 플레이어는 리시타나 디어뮈드(Fate/Zero에 나오는 랜서)같은 쌍창잡이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디앤디에서 한 손에 쥘 수 있는 창은 short spear가 전부였기 때문에 데미지가 d6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자비로운 마스터는 장창/단창 쌍창술 같은것도 실제로 있으니까 피트 하나를 써서 Exotic Weapon Proficiency를 찍으면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것처럼 피트 하나를 소모하면 장창(데미지 d8)을 한 손으로 쥘 수 있게 허가해줬어.
나랑 인간전사 한 놈은 아무리 고딩때였어도 그렇지, 데리고 시작하기 참 힘든 PL이었을 것 같군....
아마 첫 TRPG다보니 이런저런 부분들을 마스터가 많이 양보해 준 게 아닐까 싶어.
이것만 보면 드워프 7형제 PL은 나와는 다르게 정말 내추럴 본 훌륭한 RPGer였던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쨌든 전사 둘, 마법사 한 명으로 시작한 파티는 '함정은 스톤스킨 걸어서 몸으로 해제하고', '회복은 오직 포션에만 의존'해가면서...
고레벨에 얻은 심각한 피해들은 아예 트롤로 폴리모프해서 재생해버리는 식으로 버텨가면서 에픽 레벨까지 찍었어.
20레벨까지 찍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존나 병신같은 장편 대서사시이자, 아직도 나에게는 즐겁고 부끄러운 추억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미 1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인데다 리플레이도 다 사라져서 완벽히 떠올리는것도 불가능하고, 그 썰을 다 풀자면 한도 끝도 없을테니 이건 생략하도록 할게.
어쨌든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 이야기는 위에 나왔던 드워프 방패 전사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전사가 들었던 방패 이야기임.
.
.
.
길고 긴 이야기 끝에, 우리 세 명의 플레이어들은 티아마트를 부활시키려는 사악한 색채룡들의 위협을 저지하고 각자 신들의 챔피언 비스무리한 위치가 되었어.
내 위저드는 운명과 행운의 여신의 챔피언이 되어서 하루에 세 번인가 리롤할 수 있는 고유 능력과 물질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사용했던 지팡이를 손에 얻었고,
인간 전사였던 내 친구는 달과 시간의 여신의 챔피언이 되어 하루 세 번 프리 액션으로 트루스트라이크를 시전할 수 있는 홀리어벤저(홀리 리터닝 단창)를 얻었어.
마지막으로 드워프 전사는 기예의 신이자 드워프 만신전의 아버지 신에게서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아다만티움 마법 방패를 얻었어.
이 마법 방패가 굉장히 재미있는 능력을 가진 물건이었는데, 에픽 주문 중에 'Kinetic Control' 이던가 하는 주문이랑 그 효과가 비슷해.
만약 이 물건을 착용한 상태에서 피해를 받는다면, 즉 AC를 뚫고 피해를 입는다면 캐릭터가 데미지를 입는 게 아니라 이 방패가 대신 데미지를 받고 이 데미지를 총 300점까지 저장할 수 있는 물건이었어.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이 방패를 든 채 실드배쉬를 시전하면 지금까지 누적한 피해를 적과 내가 반반씩 나눠받을 수 있고, 만약 방패 던지기를 시전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누적 데미지를 전부 적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묘한 물건이었지.
사실상 우리 파티의 주요 전술은 드워프 전사(이하 드워프)가 가장 강한 적과 일대일로 맞상대하면서 공격을 유도하고, 쌍창을 든 인간 전사(이하 전사)가 장창과 단창을 들고 풀어택 8연타(근접해서 왼손의 단창으로 3타, 5피트 스텝으로 한 발짝 뒤로 빠져서 장창으로 4타를 날린 다음 Point Blank Shot과 Rapid Shot을 동원해 리터닝 단창을 투척)로 자코들을 다 제거하고.
위저드인 내 PC가 이들에게 온갖 전투지원을 해 주다가 보스만 혼자 남으면 드워프 전사가 지금까지 방패에 누적시킨 데미지를 보스한테 투척하거나 방패치기로 전달해서 보스를 폭딜하고, 셋이 함께 마무리하는 방식이었지. 굉장히 재미있었어.
근데 문제는 이 방패가 300점 이상의 피해를 누적시켰을때였는데, 마스터가 이야기하길 너무나도 많은 피해량을 누적시킨 방패는 과부화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 하면서 주위에 300점의 피해를 주는 기능이 있다고 했거든. 사실상 자폭 커맨드 같은거로 쓰라고 준 기능이었어.
그래서 전투가 길어질 것 같으면 지금까지 방패에 몇 점이나 피해가 들어갔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언제 전달해야 하는지를 잘 판단해야 하는 물건이기도 했지.
괜히 실드배쉬를 아끼려고 용을 쓰려다 수틀려서 데미지 300점을 누적시켜버리고 폭사할 우려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빨리 쉴드배쉬를 써버렸다가 24시간 이내로 이후 인카운터에서 300점 이상의 피해를 받게 될 경우 쉴드배쉬 쿨이 다시 안돌았기 때문에 폭사할 우려가 있는거지.
그래서 늘 언제 어느 타이밍에 방패의 기능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토의가 계속 있어왔지.
그러던 어느 날, 요 영악한 고등학생들은 마스터의 호의를 져버리고는 방패의 기능을 오용하기로 마음먹었어.
어느 악명높은 레드드래곤을 잡으러 가기 직전의 어느 마을에서, 나와 전사는 갑자기 드워프에게 공격을 선언했음.
아군을 공격해서 미리 방패에 물리력을 290점대까지 저장한 다음, 백 오브 홀딩에 넣어놨다가 드래곤전에서 꺼내서 방패 투척을 전술 핵처럼 사용하겠다는 계획이었지.ㅋㅋㅋ
마스터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하는 대신에.. 뭔가 재미있다는듯이 우리를 바라보다가 '맘대로 해라'라고 했어.
우리는 충분한 데미지를 저장한 다음 방패를 백 오브 홀딩에 넣어둔 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드래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아이템들을 구매하기로 했고
무기들은 용과의 싸움에 대비할 수 있도록 대장간에 맡겨서 손보게 했지(원래대로라면 대장간에 맡기는 건 게임상 별다른 이득이 없지만, 우리는 대장간에 무기를 맡겨서 손 보게 했을 때 해당 무기의 첫 공격은 반드시 최대값으로 데미지를 낼 수 있게 하는 하우스룰을 만들어 쓰고 있었어)
그리고 무기를 대장간에 맡기고 걸어나오던 우리에게 마스터는
"대장장이가 힘이 몇일까? 아마 12~13쯤 되려나? 음.. 그러면 수리용 망치는 라이트해머니까 데미지는 대략 1d4+1 정도 되겠지?"
하면서 이를 내보이고는 비릿하게 웃었어.
우리는 잠깐동안 마스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내 마스터가
"그러면 저 방패는 망치질 몇 번 만에 터질까? 세 번? 아니면 네 번?"
라고 하는걸 보고는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지.
그리고 황급히 뒤돌아 대장간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지축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멀리 대장간의 외벽과 지붕이 산산조각 나면서 거대한 버섯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날 세션이 끝나고, 마스터와의 후담 끝에 우리는 이날 있었던 대폭발을 롤백해서 없던 것으로 하는 대신에 앞으로 아군을 공격해서 방패의 데미지를 쌓는 행위는 하지 말기로 약속했어. 앞으로 방패의 데미지 누적은 어디까지나 '적대적 간섭'으로만 입은 데미지만 카운트하는 것으로 했지.
왜냐면 대장장이의 망치질이나 용광로에 넣었다 빼는 등의 행위도 일일히 데미지로 계산하자면 끝도 없을 뿐더러 규칙을 그런 식으로 악용하면 결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존나 미숙했을 때지만 다시 돌이켜봐도 마스터가 우릴 굉장히 지혜롭게 혼냈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RPG를 할 때마다. 특히 마스터링을 할 때마다 나 또한 이처럼 현명한 RPG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품고는 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말야....
지금 그 마스터는 어디서 뭐 하고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다만...
혹시 지금도 RPG에 대한 관심을 접지 않고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그 때 그 PL들이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을 아직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고
우릴 TRPG로 이끌어줬다는 사실을 깊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이 글을 평소처럼 존댓말로 쓴 게 아니라, 간만에 반말로 쓴 것도 반 쯤은 이것 때문이야.
형, 잘 살고 계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크, 턀갤 올라온 썰 중에 이만큼 재밌고 유쾌한 썰 별로 못 본듯. 추천추천
와 너무 멋진 썰이다. 드워프7형제보다도 더 꿀잼이고 감동적인 썰이군
퐁
와 나도 저런 마스터가 되고 싶다
재미있었겠네.
비브라늄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잡은 썰
폭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dc App
감동작이다 ㅋㅋ
아 너무나 멋진 마스터다.
팀원을 배려하는 적절한 하우스룰, 압박과 윽박지름이 아닌 적절한 교훈성 에피소드, 그리고 에픽 레벨까지 팀원을 이끌고 가는 지도력.... 정말 갓갓인듯.
퍄퍄퍄 - dc Ap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ㄷㅁㅊ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