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휴 추워라...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했네! 할아버지, 장작 가져왔어요. 시키신 일은 했으니 빨리 저번에 하던 이야기나 마저해주세요." 


 "그래 장하다 우리 손녀딸...크흠, 어디보자...그래, 음유시인 롤랜드가 열네살때 일이었단다. 롤랜드의 부족은 종종 서리거인들과 교류를 했어. 사시사철 춥고 배고픈 지방이었기에 거인들도 가끔 필요에 의해 인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단다. 초겨울에 접어든 문명의 오지엔 그믐달만이 걸려 있었어. 꼬박 나흘밤낮을 잠을 아끼며 걸어야 거인들의 무리에게 갈 수 있었다고 하니 아주 힘들었을 테지. 흐음...안타깝게도 말이지 요한나, 방목을 하는 서리거인들의 무리에게 엘크가죽을 얻으러 갔던 롤랜드는 음....그, 아인힐데 이남의 도시에서 온 노예사냥꾼들에게 붙잡혀 꼼짝없이 큰 곤욕을 치루게 됐지......" 


 "못 참겠네! 아이 참... 할아버지! 그 얘기는 저번에 하셨잖아요!" 


 "어이쿠 그랬었나...그래...요한나 이 할애비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요새너머 따뜻한 남쪽도시에 노예로 팔려갔던 롤랜드가 검투사가 되는 것까지 했었니?" 


 "그 얘기하고도 한~참 지났다고요! 나중에 롤랜드의 지기이자 스승이 되는 크레스켄스랑 목숨을 건 검투경기를 하고나서 같이 석양을 봤다는 얘기가 벌써 일주일전이에요!" 


 "내 정신좀 봐! 그랬었구나!" 


 "그래서 검투경기에서 승리하고 노예신분에서 벗어난 롤랜드는 어떻게 됐죠? 망자의 왕 로드릭 3세는 도대체 언제 잡는 건데요?" 


 "으흠......어디서부터 얘기를 할까? 그래, 롤랜드가 부족에 있을 당시 롤랜드는 전승지식 지킴이였단다. 부족에 내려오는 모든 이야기와 모든 노래들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워야 했지." 


 "그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롤랜드가 사라진 사이, 부족은 노예사냥꾼들을 피해 더 먼 북쪽으로 이주해버렸다는 걸 알고 실망한채로 다시 남쪽의 도시로 돌아왔다고 했잖아요? 케케묵은 노래와 이야기들은 그럼 더 이상 값어치가 없었겠죠. 부족에서만 전해지던 노래들인데, 부족민들이 없다면 이젠 들어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요. 결국 롤랜드는 사흘밤낮을 울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셨었잖아요. 롤랜드가 불쌍해요." 


 "그래 그랬었지.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나보구나. 그런데 얘야,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단다. 보렴,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이 할애비도 너에게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있잖니? 세상 모든 건,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거라도 어딘가엔 쓸모가 있는 법이란다. 롤랜드가 외웠던 시와 노래들도 그러했어. 아주 오래된 이야기와 노래들엔 그 자체로 아르카나(Arcana)가 깃들어 있었던 거야. 그 때문에 롤랜드는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어느샌가 시와 노래에서 마법의 비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지." 


 "와! 그럼 벼락을 부리고 산을 부수고 외차원에서 온 악마들을 무릎 꿇렸나요?" 


 "껄껄껄, 얘야, 롤랜드는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었단다. 고작해야 길거리 요술쟁이 수준에 불과했어. 롤랜드는 자신이 가진 마법의 한계를 알기에 평생을 '진짜 마법사'에 대한 미묘한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았단다." 


 "그건 좀 아쉽네요. 그렇다면 검술은요?" 


 "딱 자기 몸을 지킬 정도였을뿐이지. 검과 도끼창으로 바위를 부수고 하늘을 가르는 진짜 투사들에 비하면 롤랜드의 검술은 보잘것 없는 기교에 불과했단다." 


 "아아, 이야기가 벌써 재미 없어지네요. 잘 싸우지도 못하고 요술도 못 부리고! 아인발데의 성주는 그런 사람에게 뭘 믿고 그리도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할아버지." 


 "글쎄... 그건 나도 궁금하구나. 아마 모든 모험엔 이야기꾼이 하나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 


 "하하, 장난이란다.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망자의 왕 로드릭과 세 영웅들>에 나온 얘기들이니 말이지. 시인이었던 롤랜드 본인이 기록하지 않은 이야기는 내가 마술사가 아니니 알 길이 없단다. 음...한 가지 본인 스스로가 짚이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그거라도 얘기해주련? 천신만고끝에 아인힐데까지 피난 온 롤랜드는 요새의 술꾼들과 술내기를 하고 있었어. 힘든 시국일수록 병사든 피난민이든 술을 찾았거든." 


 "롤랜드도 괴로웠나보군요?" 


 "아니, 롤랜드는 그냥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단다." 


 "에이~ 멋없어요. 실없는 사람같아요." 


 "그래, 멋없구나. 네 말이 맞다 얘야. 하여튼 롤랜드는 술을 마시고 칼로 묘기를 곧잘 부리곤 했었어. 칼 위에 가득 채운 술잔을 올려놓고 던진 다음에 재주를 넘고 다시 술잔을 칼로 받아낸다던지... 이런 묘기들 말이지. 실제로 싸우는데는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저런 잡기를 연마하는데는 굉장히 열심이었단다." 


 "혹시 당시의 성주였다는 칼 데르히가 그걸 보고?"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이 할애비는 좀 생각이 다르단다. 칼 데르히는 위대한 장군이었고 훌륭한 성주였어. 고작 칼로 묘기나 부리는 광대에게 중요하고도 위험한 여정을 맡겼을 리가 없지." 


 "그래서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신데요?" 


 "음, 뭇사람에겐 타고난 기백이란게 있단다.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라고 해도 되겠지, 아니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해도 되겠고. 아마 아인힐데의 성주는 롤랜드에게서 그런걸 봤던게 아닐까 싶어. 다른 시인과 이야기꾼들이 남긴 노래들에 따르면 롤랜드는 타고난 미남자는 아니었어도 한번 보는 순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망자의 왕이라는 그 로...로스릭? 하여튼 그 무시무시한 옛 왕국의 괴물을 드디어 잡으러 가나요?" 


 "로드릭 3세! 허허,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조는 건 아니니?" 


 "거의 맞췄었어요. 발음이 샜을 뿐이지!" 

 

 "알았단다 요한나. 그나저나 로드릭 3세와 싸우는 얘기가 어지간히도 듣고 싶은가 보구나." 


 "물론이죠! 이야기 제목부터가 <망자의 왕 로드릭과 세 영웅들>인걸요?"  


 "일단 성주인 칼 데르히와 대면한 부분부터 시작하자꾸나. 모든 모험은 시작이 중요한 법이니." 


 "시작은 어땠나요?" 


 "음......롤랜드가 편협하고 어리석었기에 처음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었다고 하는구나. 노래에 나온 내용대로라면 말이다-"   



** 


  


 피난중에 잉크와 펜을 챙겨와서 다행이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시와 노래는 남길 수 있으니. 그저께는 노스가드 3연대의 지휘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찾아왔었다. 처음엔 내가 성에 끌려갈만한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했었다. 다행히도 데르히공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성으로 부른 거라니 마음이 놓였다.  


 거렁뱅이와 주정뱅이, 술꾼과 사기꾼, 그리고 빌어먹을 아인종 피난민들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것도 질릴때쯤이라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게 칼 데르히는 로스릭을 물리치기 위해 시인과 다른 영웅들을 불렀단다." 



** 



 아인힐데의 겨울처럼 하얗게 센 머리칼과 우물처럼 깊은 눈주름은 노장이 전장에서 지샌 수 많은 낮과 밤을 속삭였다. 내가 겪은 칼 데르히는 베풀줄 아는 영주였으며 행동하는 귀족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레주, 능력 있지만 서릿발처럼 매섭고 권위적인 귀족을 예상하고 있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나를 제외한 다른 모두가 아인종이었다는 거고. 



** 



 "롤랜드는 아인종들을 싫어했나요?" 


 "말했잖니? 롤랜드가 부족과 헤어져서 검투사 노예로 팔린 이유가 엘프족 노예사냥꾼들 때문이었단다. 그리고 음...검투사가 된 첫날, 같은 숙소를 쓰는 아인종 검투사 동료에게 그... 굉장히 안 좋은 일을 겪기도 했었지." 


 "그게 무슨 일이었는데요?" 


 "허허, 그건 비밀이란다. 썩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마. 아무튼 모인 면면들을 보니 롤랜드로선 불쾌한 노릇이었지." 



** 



 


 일단은...생강처럼 연한 붉은머리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드워프. 사제인가 전사인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게끔 사제의 성표를 걸고 있긴 했지만 전사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체구다. 잘 발달한 승모근이 아다만트로 만든 중갑옷 사이로도 존재감을 과시하지만 억지로 빚어낸 몸은 아니다. 오래 두드린 강철처럼 자연스럽게 연마한 투사의 몸이다. 대장간일을 오래했는지 불에 그슬리고 못박힌 손을 보는 순간 나는 그가 전사인지 성직자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걸 깨달았다. 그는 강철을 두드리는 모루의 신, 모라딘을 모시는 사제가 틀림없다.  

  

 다음은 마법사, 


 그리고 마지막으론... 아, 저 여자는 누군지 알 것 같다. 익숙한 얼굴이다. 후드 아래로 찰랑거리는 백발이 자연스레 시선을 잡아끈다. 한 자루 검처럼 차갑고 날카로이 벼려진 분위기엔 더할 부분도, 쳐낼 부분도 없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건 누군지 알아요! 엘라드린족의 영웅 아르노아잖아요!" 


 "허허, 그래. 그녀는 로드릭을 잠재우기 위한 모험을 떠나기 전부터 엘라드린족의 영웅이었지. 폭군의 성에 침입해서 힘없는 민중들을 무장시키고, 로드릭의 권속들이 기나긴 세월을 넘어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을땐 엘라드린족의 피난민들을 이끌었단다. 권리를 내세울줄만 알지 의무는 등한시하는 추잡한 귀족들을 대신해서 말이야." 


 "그런데 할아버지, 영웅 아르노아의 머리카락이 백발이 맞나요? 학교에서 배운 시에 의하면 <마치 달의 여신이 아흐레동안 한줌한줌 정성스레 모은 달빛을 물레에 넣고 짜낸듯 아름답고 풍성한 은발이었다> 라고 하던데요?" 


 "흐으음... 모르겠구나. 이 할애비는 할애비가 들은대로 얘기하는 재주밖에 없어서 말이지. 뭐, 진실은 동시대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지 않나 싶구나. 이야기꾼과 시인이란 족속들은 곧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곤 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네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그렇다면 은발이라고 하자꾸나." 



**

      



 ...그리고 마지막으론... 아, 저 여자는 누군지 알 것 같다. 익숙한 얼굴이다. 후드 아래로 찰랑거리는 은발이 자연스레 시선을 잡아끈다. 한 자루 검처럼 차갑고 날카로이 벼려진 분위기엔 더할 부분도, 덜어낼 부분도 없다. 


 저 얼굴을 어디서 봤었더라? 


 그래, 아인힐데로 오던 길이었다. 유난히 조용한 피난민 무리가 있었다. 예의가 없진 않지만 다른 무리에 결코 먼저 다가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먹고 자며 자기들끼리 추모를 하던 독특한 피난민 무리.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너무 조용하고 베타적인 작자들이다보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어림잡아 기백에 달하던 그 무리를 이끌던 지도자가 바로 저- 



** 



 "잠시만요, 고작 백명이요? 제가 듣기론 오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 



 그리고 어림잡아 오백명에 달하던 그 무리를 이끌던 지도자가 바로 저- 



** 



 "할아버지! 다시 생각해보니 오백명은 너무 많고 한 이백명 정도였었다는 것 같아요!" 


 "흐으음... 요한나, 네가 그렇다면야." 



** 



 ...아니, 오백명은 너무 높게 잡았고, 아마 어림잡아 이백명에 달하던 그 무리를 이끌던 지도자가 바로 저 여자, 아르노아다. 황금, 명성, 책임감... 각자의 이유에 의해 모인 일행들 사이에서 그녀는 유달리 눈에 띄었다. 살아는 있으되 마치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폐병환자처럼, 그녀는 항상 우수에 젖은 눈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것처럼. 


 뭐, 남남이니 내가 신경쓸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 



 "할아버-" 


 "...요한나? 할아버지는 우리 손녀딸이 정말로 사랑스럽지만 이리도 이야기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니 너무 슬프구나. 그냥 원래대로 기백명에 달했었다고 하고 끝내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떻니?" 


 "앗! 자꾸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아는 부분만 나오면 신나서 그만..." 


 "허허, 괜찮단다. 할애비도 할애비의 할애비에게 이야기를 들을때 곧잘 그랬었으니 말이지. 우리가 한핏줄이니 그런 면을 빼다 박았나보구나. 아무튼 오늘의 얘기는 여기까지란다." 


 "에엑? 벌써요? 너무해요! 할아버지를 위해서 저 멀리서부터 장작들을 잔뜩 이고왔다고요! 그리고 이건 불공평해요. 모라딘의 사제는 이름도 나오지 않았고 마법사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나왔어요! 이야기를 여기서 끊는건 그 영웅들에게 너무 불공평한 처사잖아요!" 


 "요한나, 모든 영웅들이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건 아니란다. 로드릭과 맞섰던 세명의 영웅들또한 그러했고." 


 "그런가요? 제가 망자의 왕을 쓰러뜨렸다면 모두에게 자랑거리로 삼고 싶었을텐데요?" 


 "글쎄, 그 사람들의 얘기는 우리가 완벽히 알 수가 없단다. 하지만 마법사는 자기가 이야기에 나오는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여행이 끝났을때, 롤랜드는 마법사가 나오는 모든 시구와 노랫가락을 마법잉크로 덮어서 영원히 가슴한켠에 묻어버렸단다." 


 "전사이자 신을 모시는 종이었다는 그 모라딘의 사제는요?" 


 "글쎄, 거기에 대해선 이 할애비도 해줄 말이 없구나. 롤랜드가 모라딘의 사제에 대해 남긴 구절도 아주 한정적이야. 마법사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마법잉크로 덮어버렸다지뭐냐? 아마 신을 모시는데 전념하고 싶기에 영웅으로서 떠받들어지고 자기 이야기가 퍼지는걸 원하지 않았던걸 거야.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났을때 조용히 떠났겠지." 


 "그럼 이 이야기는 반쪽짜리 이야기가 아닌가요? 아니, 애초에 왜 영웅은 넷인데 노래 제목은 <망자의 왕 로드릭과 세 영웅들>인지도 물어봐야겠네요." 


 "껄껄껄, 요한나, 거기엔 아주 재미난 일화가 얽혀있단다. 당장은 이 할애비가 목이 타서 그러는데, 주방에가서 어멈이 만든 뜨거운 초콜릿 한잔 가져다주지 않으련?" 


 "치이...알았어요. 눈깜짝할 사이에 갔다올테니 돌아오면 꼭 얘기 해주기에요?"   






* 사정상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 피드백도 피드백이지만,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세션을 열어준 마스터에게 플레이어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는 '이야기'라고 항상 생각해왔기에 염치불구하고 올립니다 

 

* 이 이야기는 물론 팀원들과 마스터님에게 바칩니다 


* 불편하신 분이 있으면 메시지 주세요. 확인하는 대로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 참고할만한 설정노트가 없어서 많은 부분은 상상하면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