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옥상의 문이 열린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친다. 몰레티가 아직도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하은과 함께 옥상으로 나선다.
샤앗-
마치 모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 유령 같은 모습의 가 나타난다. 옥상까지 올라와 있던 몰레티가 실체화되는 그를 본다. 그가 귀에 꽂힌 통신기로 급히 연락을 취한다.
“그레인저, 혹시 건물 옥상에 숨겨놓은 비밀 무기 같은게 있으면 지금-“
“건물 서북쪽 코너에서 뛰십시오!”
그의 말을 에이팍의 다급한 말이 가로챈다. 몰레티와 하은이 코너로 뛰어간다.
“아무것도-“
“그냥 뛰어요!”
그레인저의 명령에 몰레티가 얼굴을 찌푸리며 뛴다. 이런 일을 하긴 너무 늙었는데, 라는 표정을 지으며.
“쿵!”
그들이 허공에 착지한다. 에이팍이 암살자를 보자마자 급히 수배한 무인 조종 수송기다. 지금은 에이팍이 노먼의 보조를 통해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클로킹 장비까지 장착된 기체다. 아예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지상에서는 마치 그들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 처럼 보일 것이다. 상부의 해치가 열리자 두 사람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수직 이착륙 기능을 겸비한 수송기가 밤하늘을 해치고 빠르게 날아오른다. 그들 밑에서 암살자가 우두커니 수송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 살았군요. 설마 비행기를 쫓아오진 않겠죠.”
살짝 흔들리는 수송기의 벽에 나란히 붙은 좌석에 몰레티가 걸터앉으며 말한다. 하은도 그의 옆에 앉는다. 그녀가 좌석에 앉는 동작은 꽤나 서툴러 보였다. 임시 의체이기에 제대로 조정도 되지 않은 탓이다.
“죄송합니다.”
그의 옆에 앉은 하은이 갑자기 사과한다.
“도로시, 당신이 잘못한 건 없습니다.”
“제가 원래 상태라면…”
하은이 말을 끝내지 못한다. 차갑기만 한 전신 의체화 요원으로서는 드문 광경이다.
“그렇군요.”
몰레티가 그녀의 심정을 눈치챈다. 지금쯤 그녀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의체가 제공하는 강력한 전투력에 의지하다가, 통계학적 불가항력이나 거부 반응으로 인해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마치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요새 보이던 의기소침한 모습은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로시. 그래도 당신은NWO의 계몽된 요원이 아닙니까?”
“호신술이나 사격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만전일때보다 훨씬 비효율적일 겁니다.”
몰레티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웃는다. 하은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어떻게 반응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몰레티가 웃음을 멈추고 헛기침 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한다.
“아, 웃어서 미안합니다. 아까 끝내지 못한 코미디언과의 이야긴데…”
이런 상황에서도 울프맨 이야기일까. 하은이 우두커니 그의 말을 경청한다.
“끝났군.”
“어떻게 해요…”
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한다.
“내 잘못이다. 전부.”
몰레티가 완전히 박살 난 울프 네스트를 둘러본다. 가히 슈퍼 빌런이라 불릴 만한, 미친 뱀파이어인 코미디언. 그의 숙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몰레티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는 철저히 추적당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워 안나만 남은 사이 코미디언 일당이 쳐들어와 몰레티의 아지트인 ‘울프 네스트’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던 것이다. 수트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장비와 그의 계획이나 범죄자의 정보가 저장된 서버까지 전부.
다른 사람들은 데이빗 몰레티가 울프맨이라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코미디언은 달랐다. 애초에 너무 수트의 능력에 의지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다녔어야 했는데.
“네스트는 완전히 폭파 시켜야겠군. 청소업체를 부를 수도 없으니.”
“그럼 이제 끝인가요…?”
안나가 눈물을 글썽인다. 분명 많은 돈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범죄자를 잡고 도시를 청소한다는데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코미디언의 광기 어린 모습을 눈 앞에서 본 그녀는 질려버렸던 것이다. 거기에 그녀를 증인으로 남겨, 더 이상 다가오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까지.
“아니.”
몰레티가 잔해 속에서 무엇인가 꺼낸다. 연막탄, 만능열쇠, 녹음기, 쇠줄 같은 잡다한 도구가 들어있는 벨트다. 꽤나 들어있는 것이 많기에 마치 탄띠처럼 X자로 매는 형태다. 그가 조용히 그 벨트를 착용한다.
“…잠깐만요, 데이빗! 뭐하는 거에요!”
안나가 몰레티의 팔을 잡으면 말린다.
“수트가 없어서?”
“코미디언의 능력을 봤잖아요! 놈은 인간이 아니에요! 수트를 개조해서 다시 싸워도 모자랄 판인데… 차, 차라리 공권력이나 군에 정보를 흘리는게 훨씬 나아요!”
“그러면 경찰이나 군인이 수십은 죽게 될 거야.”
몰레티가 박살 난 수트의 얼굴 부분에서 바이저만 따로 떼어 착용한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안나.”
“네?”
“난 말야, 항상 네가 수트를 입혀줄 때마다 30분씩 고민에 빠지곤 했었다.”
“무슨 고민요?”
그가 벨트를 고쳐 매며 마치 고백하듯 말한다.
“과연 울프맨은 수트인가, 아니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 말이지.”
몰레티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안나,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항상 그의 발목을 잡던 질문이다.
수트를 입고 밤거리를 쏘다닐 때마다 항상 그의 머릿속 한 켠에서 지워지지 않던 질문. 만약 수트가 없다면? 그럼 자신은 정말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것인가?
울프맨은 그냥 근력 강화 기능을 가진 서보모터와 방탄복의 조합에 불과한가? 수트가 없으면 자신은 울프맨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트가 먼저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수트 안에 들어갈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할 시간이야.”
“제 생각에는 당신도 그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몰레티의 말에 하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보건대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몰레티도 그녀의 -물론 사실과는 동떨어졌지만- ‘사고 기록’을 읽어보았다. 그 정도의 일을 겪고, NWO에의한 고강도의 개조 및 소셜 컨디셔닝에 노출 되었다면 사고가 상당히 단순해진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이 제한된다고 할까. 더 이상 철학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에이,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그것보다-“
갑자기 몰레티가 말을 멈춘다. 그의 시선은 수송기의 창문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송기의 옆으로 나란히 날아가는 물체가 있다.
아까의 그 암살자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수송기를 앞질러 시야에서 사라진다.
“몰레티입니다. 암살자가 수송기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항로 변경을-“
순식간에 수송기의 앞쪽을 통과해 암살자가 날아들어온다. 정확하는 그가 공중에 멈춰 있고, 비행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어가는 것이지만.
“윽!”
암살자가 실체화 하며 일어서는 몰레티의 팔을 베어낸다. 방검 기능 덕에 상처는 깊지 않지만 그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순간 암살자가 그의 몸을 타고 오르며 그의 목 뒤를 친다. 몰레티가 혼절하며 수송기 바닥에 쓰러진다.
그의 몸을 넘어선 암살자가 즉시 하은을 공격한다. 그녀가 피해내려 하지만 엄청난 속도에 피하기는 커녕 포착하기도 어렵다.
첫 감상은, 아니, 첫 평가는 엄청난 속도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수송기 안에서도 마치 그 흔들림을 무시하듯 단단히 바닥에 발을 붙이고 민첩하게 그녀에게 접근한다. 초인의 영역까지 단련된 발의 움직임, 날아가는 새를 정확히 포착해 한쪽 날개만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검술. 눈을 돌리지 않고도 사방을 보는 듯한 주변에 대한 인식.
비록 그 움직임에 대항하지는 못하지만 하은의 눈이 그의 실력을 순식간에 파악한다. 그녀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팔을 들어 그의 검을 막는다. 각인이 번쩍이는 그의 검이 의수의 외피를 잘라낸다.
다음 공격.
그러나 공격을 피하는 하은의 머릿속에, 다음 공격에 대한 예상이 아닌 엉뚱한 질문이 떠올라온다.
왜 비실체화 하지 않는거지?
그녀가 묻는다. 언젠가 이런 상황에 처한적이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그녀를 노린거라면 아까 몰레티가 가로 막았을 때 무시하고 비실체화하여 자신만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철저하게 검술에만 의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팔의 가드를 비실체화 하여 무시하고 그냥 동력계만 파괴하면 끝일 것이다.
하은이 살짝 물러난다.
아까 암살자가 날아들었을 때를 생각한다. 실체화된 몸으로는 멀쩡히 날았던 그가 비실체화된 몸으로는 단지 ‘정지’ 해 있었을 뿐이다. 중력은 물론이고 관성마저 무시하는 상태.
결론을 내린다. 안 쓰는게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적하지?
“쉬익-“
그가 다시 빠르게 리치를 파고든다. 그의 검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의체의 어깻죽지를 베고, 아랫배를 찌르고 허벅지 안쪽까지 난도질 한 이후 그가 바깥으로 빠진다.
정말 철저한 풋워크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자신이 전투용 의체라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없다. 아마 계속 지속적으로 이곳저곳의 약점을 공략당해 소모전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다.
일단 발이 너무 빠르다. 전투용 의체라 하더라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속도.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돌풍이 일어날 정도다. 발에 비하면 검은 한없이 느리지만 그것은 비교 대상이 너무 빠른 것 뿐, 그의 검술 자체도 엄청난 속도다. 힘과 리치의 부족을 기교와 속도로 커버한다. 거기에 상당히 작은 체구여서 그 장점은 배가 된다.
반면에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장점은 내구도 정도. 상대의 장점에 비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치익-“
한쪽 서보모터가 곧 고장 날 것 같은 불길한 소리를 내뿜는다. 하은의 생각이 옮겨간다.
발을 어떻게 묶지?
또다시 그가 공격해 들어온다. 이번에는 등쪽이다. 연달아 인간이라면 신장이 있을 곳을 찔린다. 보조 동력이 다운된다. 이러다간 저쪽이 패러독스에 삼켜지는 것보다 이쪽의 셧다운이 더 빠를 지경이다.
자신의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의체도 없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 어떤 도구도 없다. 기껏해야 인간보다 타격을 좀 더 버티는 저급의 의체와 무거운 질량 정도.
-그렇다면…
[에이팍 소위.]
[요원님, 괜찮으십니까?]
에이팍이 다급한 통신. 하은이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의사를 전달한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에이팍이 놀라며 되묻는다.
[네? 하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노먼!]
에이팍의 지시에 그의 원격 조종을 보조하고 있던 AI, 노먼이 즉시 재계산에 들어간다.
[네, 소위님.]
노먼이 지체없이 로터를 전환시켜 비행기를 수직 활공 모드로 전환한다. 노먼의 보조와 에이팍의 조종술에 힘입어 마치 허공에 멈춰선 듯한 수송기. 흔들림이 멎은 수송기 안에서 암살자가 검을 들어올려 그 끝을 하은에게 향한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암살자가 하은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낙하 개시!]
“-!“
다음 순간 기체가 45도로 기수를 내린 채 빠르게 가속한다. 패러볼릭 플라이트에 돌입한 기체 안이 무중력 상태가 되며 모든 것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기절해 있는 몰레티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널려 있는 기재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암살자의 발도 서서히 바닥에서 떨어져간다.
“무슨 짓을-“
그가 깨닫는다.
만약 엄청난 속도의 풋워크에 밀린다면, 그 속도를 따라잡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아예 중력을 없애 그 이점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디딜 곳이 없으면 빠른 발은 무의미하다.
“컥!”
이미 비행기가 떨어질 것을 알고 있던 하은이 옆의 의자를 차며 돌진해온다. 방금 전이라면 거리를 벌리고 회피하겠지만 발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거기에 일단 질량이라면 금속으로 이루어진 하은의 무게가 훨씬 더하다. 마치 차에 치이듯 그가 하은과 충돌해 밀려난다.
“윽!”
벽에 부딪히며 튕겨 나오는 그. 그러나 하은은 이미 천장을 차며 다시 그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직이다!”
그가 하은의 팔을 잡아내며 공격하려 한다. 그러나 하은은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대신 팔을 크게 휘두른다. 무중력이기 때문에 그의 공격은 몸이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아가는 바람에 허공을 찌를 뿐. 하은이 대신 그의 허리 부분을 잡아 다른 쪽 팔을 휘둘러 쳐낸다. 더 먼 거리를 더 무거운 질량으로 움직여 타격한다. 기교를 발휘할 수 없는 지금의 그녀에게는 최상의 방법이다.
“컥!”
그가 가슴에 주먹을 맞고 신음을 내뱉는다. 분명 동작은 훨씬 둔탁하다. 아직도 암살자의 무술이 훨씬 예리하며 기술적으로 우월하다. 반면 하은은 제대로 조정도 되지 않은 임시 의체로 간신히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주에 있었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배웠던 무중력 상태의 전투 기법을 활용해서다.
“…”
암살자가 공중에 뜬 상태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군. 그냥 인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내 비행기가 45도로 기수를 치켜든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솟는 수송기 안이 고중력 상태로 변한다. 이렇게 되면 아까보다 움직임이 느려 질 수 밖에 없다. 그가 불리함을 깨닫는다. 고중력 상태에서는 발이 봉쇄되어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 그의 속도와 정확도는 하은을 훨씬 뛰어넘지만, 힘과 내구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그가 비행기에 침입했던 것처럼 무형의 실체가 된다. 순식간에 비행기의 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그. 동시에 엔진에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먼, 지금 당장 다시 비행기를-]
[안됩니다. 암살자가 도망가며 폭발물로 엔진을 고장낸 것 같습니다.]
[요원님! 조금 있으면 수송기가 폭발할 겁니다!]
노먼과 에이팍의 경고에 그녀가 즉시 탈출용 낙하산을 착용한다. 기절해 있는 몰레티의 몸에 하네스를 씌우고 두 사람의 몸을 연결한다. 수송기가 추력을 잃으며 이번에는 진짜로 추락한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지면에 충돌해 납작 해지기도 전에 수송기가 폭발할 것 같다.
[노먼, 문 열어!]
그녀의 명령과 함께 기체의 문이 강제 개방된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뛰어내린다. 바로 위에서 기체가 폭발하며 파편을 뿌린다. 고도를 감지하고 자동으로 개방된 낙하산을 파편들이 관통한다. 두 사람이 매달린 낙하산이 반정도 찢겨진 채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들 밑으로 눈에 덮인 산 꼭대기가 보인다. 이미 낙하산은 조종이 불가능한 상태. 그들이 비탈면에 착지해 거칠게 구르기 시작한다.
“피익-“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한쪽 팔의 서보모터가 충격으로 고장 난다. 그녀가 다른 쪽 팔로 눈 속을 헤치며 뭔가 부여잡으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눈 덮인 비탈일 뿐.
비탈면이 끝나기 직전, 바위가 하나 있다. 하은이 연결고리를 분리한다. 몰레티를 차내면 바위에 걸려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겠지만. 그녀가 몰레티의 몸을 차낸다. 그의 몸이 바위 쪽으로 밀려난다. 동시에 그녀가 눈비탈의 끝을 넘어 떨어진다.
“…!”
그녀의 움직임이 공중에서 멈춘다. 막 깨어난 듯한 몰레티가 하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른 쪽 팔은 비탈에서 튀어나온 바위를 움켜쥐고 있었다.
“후, 시원하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라니. 바위를 움켜쥔 그의 손이 날카로운 면에 찢어져 피를 흘린다. 그가 신음한다. 그는 손 뿐만 아니라 팔 전체로 바위를 감싸 쥐듯 잡아 두 사람의 체중을 통¬채로 버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버틸 뿐. 그의 근육량을 감안하면 하은 정도의 체격을 가진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은 간단하다.
문제는, 그녀가 웬만한 성인보다 훨씬 무거운 의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지구력이 곧 한계에 달할 것임을 눈치챈 하은이 말한다.
“놓아주십시오.”
“우…울프맨은 윽… 동료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비즈니스 맨들은 다 저렇게 태평한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하은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제기랄… 운동을 좀 더해놨어야…”
어떻게.
어떻게 하지.
자신이 원래 의체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정도는 아닐텐데.
또.
또 방해만 된다. 무겁기 만한 의체. 아까는 어떻게든 빠져나왔지만 지금은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후우… 후우…”
몰레티가 필사적으로 숨을 고른다. 이렇게 있다가는 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하은은 박살 나고 몰레티는 즉사할 판이다.
“몰레티, 놓아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가는 둘 다 떨어집니다.”
“농담도… 윽… 잘하시는군요!”
그가 입술을 깨문다. 그가 하은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 속에서도 살짝 웃으며 묻는다.
“그래서, 제가 기절해 있는 동안 답은 찾았습니까?”
…아!
하은의 머릿속에 너무나 간단한 해결책이 떠올라온다. 빠른 발을 따라잡을 수 없다면 디딜 곳을 없애면 된다. 마찬가지로 무게를 버틸 힘이 없다면 무게를 줄이면 된다. 그녀가 즉시 의체의 서브루틴을 작동시켜 의수를 분리한다. 한쪽 팔과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거기에 보조동력계나 기타 연산장치가 들어있는 복부까지 분리하자, 그녀는 이제 훨씬 가벼운 무게가 되었다.
“으…아…!”
몰레티가 온 힘을 다해 하은을 끌어올려 바위에 기대 놓는다. 피부가 찢어져 피가 철철 나는 손으로 그도 기어올라온다.
“후… 운동 부족.”
그가 혼잣말 하며 하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이제 가슴 위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얀 눈 벌판 위에 피를 철철 흘리며 숨을 몰아 쉬는 몰레티와, 사실상 움직이는 파츠라고는 머리 밖에 남지 않은 반쪽 의체를 지닌 하은. 두 사람은 언제라도 꺼질 듯한 낭떠러지 위에서 작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내참. 도로시, 예산 관리자가 저인건 알고 있습니까?”
몰레티가 마치 타박하듯 말한다. 하은이 목을 돌려 대답한다.
“경위서는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몰레티가 숨을 고르며 웃는다.
“후, 그, 그런데 여기 춥군요.”
“그렇습니까.”
하은이 대답한다.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도 의체로 옮기는 걸 생각해봐야겠군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몰레티가 투덜거린다. 하은이 하늘을 바라본다.
아주 잠깐이나마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무언가, 한때 자기 자신이었던 것 같은 무언가로.
“그래서 울프맨과 코미디언의 결투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하은이 묻는다. 몰레티가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무용담은 유니언의 수색용 공중자산이 그들을 찾아내기 전까지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에취!”
몰레티의 병가를 승인한 그레인저가 재채기를 하는 그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하은은 멀쩡했지만 몰레티는 추위 속에서 지독한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울프맨도 감기에 걸리나 보죠?”
“사실 늑대도 감기에 걸립니다. 다만 우리가- 에취!”
세계적인 부호인 그가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면 그의 정적들이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삼을 것이다.
“됐습니다. 이 기회에 몰타 섬이나 다시 가야겠군요. 보고서는 다 작성해 놨습니다.”
그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한다. 울프맨부터 감기까지. 몰레티의 체면이란 이제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원래 늙으면 주책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
“네. 벌써 읽었어요.”
“그렇다면… 에취!”
그가 말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방을 나간다. 노먼의 홀로그램이 드론을 대동하고 나타나 공중에 소독 물질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인저가 다시 보고서의 내용을 곱씹는다.
우주에서 그녀가 썼던 속임수.
비행기를 이용해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 상대의 빠른 발을 무력화 시키는 급조된 프로시져.
의체를 분리했기에 가능했던 생존.
도저히 전신 의체화 요원에 어울리지 않는다.
“에이팍.”
그녀가 에이팍을 호출한다. 기술실에서 각종 장비의 수리에 몰두하고 있던 그가 금방 응답한다.
“예, 감독관님!”
“절 위해 조사해줄 게 있어요. 지금 포워딩 할게요.”
“넵! 받았습-“
에이팍이 말을 멈춘다.
“이건… 도로시 요원의 두뇌 임플란트가 아닙니까?”
“맞아요. 대체 그 임플란트가 뭘 하는건지, 기능은 어떤건지 최대한 조사해주세요.”
“하지만 NWO의 기밀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요. 책임은 제가 질 테니 걱정 말고요.”
에이팍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실물을 두뇌에서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 능력이 닿는대로 조사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주세요.”
“예.”
그와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녀가 이번에는 노먼에게 즉시 지시한다.
“노먼, 내 집무실을 차폐 모드로. 지금의 기록은 집무실의 블랙 박스에서도 삭제하도록. 네 기록에서도.”
“알겠습니다, 감독관님. 차폐 완료.”
그녀의 집무실이 어두워진다. 그가 서랍을 열고 레지던트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받은 저장장치를 꺼낸다. 그것을 홀로그램 재생기에 꽂는다.
“위잉-“
낮은 소리와 함께 프로젝터가 작동한다. 노이즈. 그러나 이내 노이즈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무엇인가 희미한 형상이 나타난다. 한 여성.
“이건…”
그녀가 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다. 낡은 잔이다.
동굴. 아니, 오래된 건축물의 안. 고대의 것처럼 보이는 문자. 붉은 안개.
휘몰아치는 이미지의 폭풍. 그 가운데서 여성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진다. 그 여성은 분명 노하은이다.
그녀가 잔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이게… 뭐지?”
짧은 광경이 반복된다. 그녀의 기억 안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기록은 그녀의 개인 이력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왜 이런 기억이 있는 거지? 설마 조작된 기억인가?
그러나 그녀의 직감이 이 기억은 진짜라고 단정 짓는다. 조작 되었다기에는 너무나 격렬한 기억. 충격적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는 꿈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
그녀가 재생을 중단한다. 분명 무언가 있다. 제일 먼저 의심되는 사람은 류 국장이다. 그러나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그녀가 아까 보았던 고대의 문자를 수첩에 그린다. 한참 그 문자를 쳐다보던 그녀가 즉시 유니언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이 문자의 정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혹시 이것과 유사한 사건 기록이 없는지 검색한다. 단지 대상자가 누구인지 검열되었을 뿐 내용 자체는 살아있는 기록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 기억은 데미안이 하은에게 알려준 예언이라는 것을.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닌, 일어나리라 경고 된 일임을.
==
참고 작품: 배트맨 비욘드, 배트맨 비긴즈, 아이언맨, 판옵티콘 (의 크리스토스)
사실상 배트맨 비욘드 S2E4 Lost Soul의 메이지 판입니다.
"Is Batman just the suit or the man inside?"
라는 대사가 너무 멋있어서 꼭 써보고 싶었음
안타깝게도 5월까지 휴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팔아픔이나 등등 사정이 있지만 돌봐야될 사람이 생겨서 그때까지 쉬겠습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더데니즌 크로니클.... 아 그래도 추천은 했음
무중력전투...북 오브 시크릿?
기다릴게요 - dc App
몰레티 할배 좋다 - dc App
개추
잘 보고있어요
ㅇㅁ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