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D&D의 유구한 떡밥인 시전자 vs 비시전자에 대한 글임.

이 글은 문제의 해결 방법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이 문제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 근본부터 짚어보는 내용.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10415175312/http://www.wizards.com:80/DnD/Article.aspx?x=dnd/4ll/20110412

https://web.archive.org/web/20111024215934/http://wizards.com/DnD/Article.aspx?x=dnd/4ll/20110419





지난 주에는 밸런스의 개념과, D&D에서의 밸런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D&D의 밸런스 문제와,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해주는 건 파이터와 위저드의 비교겠지요.

두 클래스의 차이는 게임이 생겨났을 때부터 사람들이 D&D의 규칙을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근간이었습니다.



태초에...


오리지널 D&D 룰북인 1권: 사람과 마법(Volume 1: Men & Magic)에서는, 매직유저(magic-user)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최고 수준 매직유저들은 아마 게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캐릭터겠지만, 그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어렵고도 긴 여정을 해야 하고,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약하기 때문에 저레벨 매직유저가 성장할 수 있도록 파이터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파이터와 위저드의 관계를 잘 축약한 설명이 바로 나와있네요. 파이터는 궁극적으로 최강의 캐릭터로 성장하는 위저드를 지켜줬습니다.

옛날에는 슬립 주문이 승패의 갈림길일 때가 잦았지요.

위저드는 파이터와 다른 캐릭터들에게 보호받으며, 몰려있는 몬스터들을 쓰러뜨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괴상하게 설계된 게임처럼 보이네요.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식의 체계가 존재했습니다.

워게임에서 한 세력이 초반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을 때, 후반에서 다른 세력의 장점이 발휘되어 소모전 끝에 패배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CCG에서는 빠른 승리에 최적화된 덱이 있는 한편, 시간을 끌다가 강력한 콤보로 마무리하는 덱도 있는 등 이런 점이 잘 드러나죠.


썰물과 밀물과도 같은 이런 전개는 게임을 흥미롭게 만듭니다. 게임이 끝나기 직전이 아니라, 시작하자마자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은 RPG에 적용하기에는 약간 이상해 보이네요. 왜 나중에 얻을 강력한 힘을 위해 초기에 죽을 위험을 무릅써야만 할까요?



플레이 기술의 진화


초기 D&D, 그리고 좀 더 펼쳐보자면 3판까지도, (캐릭터의) 죽음은 지독하면서도 변덕스럽게 찾아왔었습니다.

주사위의 장난으로 HP가 결정되었고, HP가 0이 되면 그 캐릭터는 사망했지요.

HP가 0 이하로 떨어지는 규칙을 적용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다음 모험까지 회복하는 시간이 꽤 길어졌습니다.

(1판 DMG에서는 이런 회복을 거친 뒤에는 최소한 1주 동안의 완전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HP가 귀중한 자원이었던 데다 내성에 실패하면 즉사하는 온갖 함정과 몬스터들이 우글대고,

플레이어의 행동 설명이 스킬 시스템을 대신하던 게임에서는 플레이 기술이란 위험을 피하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구덩이 함정을 발견하려면 지각(Perception) 체크가 아닌, 10피트짜리 봉을 써야 했었습니다.

방을 조사할 때는 어떻게 책상을 부수고 그 속에 숨겨진 보석을 찾을 지 DM에게 해설해야 했죠. 지혜 체크나 스킬에 기댈 수 없었던 겁니다.

소모할 HP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주문을 조심스럽게 아끼면서 몬스터를 전술적으로 우위인 상황에서 상대할 전략을 짜야 했습니다.

무작정 돌격하면서, 문을 걷어차 열고,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면 딱 죽기 좋았지요.


이런 상황에서의 플레이 기술은 좋은 계획을 떠올리거나, 숨겨진 함정 또는 보물을 찾을 단서를 파악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캐릭터의 능력은 주사위에 달려 있어서, 자신의 캐릭터를 빌드한다는 발상은 어찌되든 상관없었지요.

클래스와 종족을 빼면 고를 선택지도 얼마 없어서, 캐릭터의 빌드보다 캐릭터를 어떻게 플레이하느냐가 성패를 갈랐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파이터와 위저드의 차이는 납득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파이터는 쉬운 난이도에서의 게임과 비슷했었습니다. HP가 더 많고, AC가 더 높고, 무기도 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이 똑같았을 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규칙으로 결정할 순간이 다가오면 저레벨에서는 파이터가 유리했구요.


매직유저는 HP와 AC 모두 최악이었습니다. 3레벨까지, 또는 심지어 그 이상의 마법사라도 공격 한 방에 죽을 수 있었죠.

(가장 악명 높은 예시는 집고양이들에게 찢겨죽는 거였습니다)

비슷한 레벨인 두 마법사끼리의 결투는 그 향방이 누가 먼저 고레벨의 피해 주문을 쏘느냐에 달려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매직유저를 고르는 건 어려운 난이도를 스스로 고르는 셈이었습니다.


게임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차이는 합당해집니다.

저난이도 게임을 하면 생존률은 높아지지만 능력의 한계치는 낮지요.

반면 고난이도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죽을 가능성이 높은 대신 강력한 주문을 얻을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DM은 PC가 죽으면 새 캐릭터가 1레벨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2레벨 이상의 캐릭터를 짜는 방법은 1판 DMG(부록 P)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꾸준히 지속되는 캠페인에서의 활용이 아니라 컨벤션에서 열리는 게임을 상정한 것입니다.

다른 파티원들이 6레벨 근처일 때 혼자만 1레벨로 돌아가는 건 엄청난 페널티였습니다.

그 동안 얻은 경험치를 잃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욱 강력한 적을 상대할 때 자신의 약한 PC가 또 다시 죽을 위험도 함께 지는 셈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 상황이 어떻게 바뀌고 그게 게임 내에서 무엇을 의미했는 지,

그리고 그게 D&D의 진화와 어떻게 엮이는 지와, RPG에서 '진화'란 무엇을 뜻하는 지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D&D 초기의 파이터와 위저드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었습니다. 이 차이는 신기하게도 4판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지요.

이 정도의 파워 차이는 그저 (게이머들에게) 받아들여진 걸로 끝난 게 아니라, 게임의 핵심으로 인식되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면 먼저 AD&D의 메카닉에 대해 들여다봐야 합니다.



분단, 우선권, 주문 상실


AD&D 시절에는 전투에서 주문을 시전한다는 게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우선권 규칙에 따르면 모든 전투원이 매 라운드마다 새로 우선권을 굴렸고, 행동 순서를 파악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주문이 완전히 시전되려면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우선권을 굴린 뒤 한참이 지나서야 주문 시전이 끝났지요.

주문이 완료되기 전 시전자가 피해를 받으면 그 주문은 아무 효과도 없이 소모될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든 오크 몇 명만 있어도 주문시전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구요.


그러므로, 주문을 쓰는 건 적절한 팀워크를 갖추면서도 약간 운이 받쳐줘야 했지요.

이걸 알게 되면 파이터와 위저드의 차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좁게 보일 겁니다.

파이터가 없다면 주사위의 신이 우선권에 관대하지 않은 이상 위저드는 그저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위저드가 강력한 주문을 뿌릴 때마다 파이터는 그 주문을 시전할 수 있도록 도운 자신의 존재감을 간단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저드와 달리) 파이터는 언제나 멀쩡히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죠.

위저드가 파이어볼을 쓰려고 행운을 빌 때마다 파이터는 공격을 잃을 염려 없이 오크 무리들을 썰어댔습니다.

위저드의 능력은 사용에 걸린 제약을 통해 균형을 맞춘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이 3판으로 갱신되면서 우선권 시스템은 대대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모든 전투원이 굴린 우선권의 순서는 (일부러 지연하거나 준비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았고, 주문은 즉시 시전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두 클래스의 차이를 크게 벌려놓았습니다.

게다가, 주문시전자는 더욱 쉽게 포션, 스크롤, 완드를 비롯한 더 많은 주문을 쓸 수단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주문 도중에 피해를 받으면 주문이 깨질 수 있지만, 집중 스킬 보너스가 충분히 높으면 이런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캐릭터 제작과 최적화


이런 변화를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실 더욱 강력한 원인이 플레이 내에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내에서의 능력과 효율성의 느낌을 좋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문을 방해받지 않고 쓰는 게 훨씬 쉬워지는 등의 D&D의 변화는 이런 감정에 따라가는 것이었죠.

위저드를 하고 싶어한다면 주문을 쓰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겠죠?

그럴 때 게임에서 주문을 쓰기 더욱 어려워진다면, 위저드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마 그 게임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더 높을 겁니다.


3판에서의 커다란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를 만들 때의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겁니다. (예전 칼럼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능력치를 굴리고, 클래스를 고른 뒤 주문 몇 개를 정하는 정도였습니다. 마법 아이템을 찾으면 쓰거나 버리는 둘 중의 하나였죠.

3판에서는 피트와 스킬, 주문, 그리고 구매한 마법 아이템을 조합해서 특정한 메카닉을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많은 플레이어에게 있어 게임의 플레이 기술이란 환경을 탐사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으로부터,

캐릭터 능력을 어떻게 구성하는 지의 적절한 조합을 찾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주문시전자를 훨씬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몇 시간 동안 캐릭터를 다듬었지만, 정작 게임의 규칙에서 그 캐릭터의 특기를 쓸 수 없도록 규제한다면 이상하겠죠?

심도 있는 캐릭터 제작과 최적화는, 룰 디자이너가 플레이어가 스스로 선택한 능력을 쓸 때의 장애물을 없애는 방향을 장려했습니다.


저는 게임에서의 이런 변화가, 진화가 D&D를 어떻게 바꾸었는 지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진화'가 '발전'으로 대응되는 듯한 말들을 많이 듣고는 하죠.

새로운 컴퓨터가 옛 모델의 진화라거나, 스포츠의 약팀이 좋은 드래프트 픽과 트레이드를 통해 컨텐더로 진화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이 단어를 제대로 쓴 게 아닙니다. 진화는 외부의 영향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화란 어떤 환경에서 일어났는 지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물이 부족한 곳에서 진화한 종은 다른 종보다 더욱 가뭄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종이 다른 종보다 더욱 우수한 건 아닙니다.

건조한 기후에 더욱 잘 적응할 수는 있겠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다른 종들이 훨씬 더 잘 번식할 수도 있을 겁니다.


D&D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게임의 진화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선호도와 플레이 스타일 변화에 게임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3판이 떠오르면서 D&D는 챔피언스(Champions)나 겁스같은 다른 RPG처럼 캐릭터의 특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트렌드는 키트를 도입하고, 숙련 슬롯을 다양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2판과, 스킬과 능력(Skills & Powers) 서플리먼트의 경향을 따라간 것입니다.



모든 게임은 국지적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저는 D&D를 즐기는 옳은 방법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이 다양한 스타일이나 새로운 취향을 받아들이도록 변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게임을 즐기는 '올바른' 방법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그룹에 달린 것입니다.

캐릭터 빌딩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캐릭터를 직접 움직이는 걸 좋아하시나요?

어려운 전투와 웃긴 롤플레이 장면 중 어느 쪽에서 흥미를 느끼시나요?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른 취향이 있습니다. 똑같은 D&D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서로의 추구하는 방향이 항상 양립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판본 간의 대립이 보여주듯이, 이건 R&D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요.


아래쪽에 링크한 영상은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D&D와 연관된 사람들이라면 느낄 게 많을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https://youtu.be/iIiAAhUeR6Y (한글 자막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