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악마의 등뼈 첫 시나리오를 마스터링했던 이야기다. 그리고 사실상 나의 두번째 마스터링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데볼라의 명령을 대충 받아 잠복천사라는 바이러스 개체들의 송신탑을 부수러 간다. 자세한 건 악마의 등뼈 시나리오집을 참조하자.

중간에 지하철 비슷하게 생긴 누메네라 장치를 타고, 바위벌레와의 난데없는 싸움을 거쳐 플레이어들은 마침내 송신탑에 도착한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의 길을 가로막는 게 있었으니......


바로 시간이었음

스터디룸을 한 4-6시간째 빌려서 하고 있는데 저녁도 먹어야하고 오늘 안으로 안 끝날 것 같은 거야. 시나리오집 본 사람은 알겠지만 9층탑인데 안에 한 층마다 인카운터가 있다. 이거 일일이 마주치면 오늘 안에 못 끝내겠다는 생각이 듬.

게다가 송신탑 주변에도 경비가 많고.

그런데, 파티의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던 글레이브 하나가 의견을 제안한다.

“중력 장화로 벽을 밟고 올라가면 어떨까요?”

사실 중력 장화는 데볼라를 잡아야 주는 아티팩트지만, 내가 실수로 플레이어들에게 쥐어 준 물건이었음. 벽을 타고 올라가는 장화다.

나는 떡밥을 덥썩 물었다. 플레이어들은 그 방법 말고 빨리 처리할 방법을 몰두하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일단 이 방법을 권하는 게 가장 나아 보였음.

나는 한 층을 오르는 데 한 라운드가 필요하며, 난이도는 3이라고 했다. 판정은 등반. NPC를 통해 특이점 폭탄이라는 20딜 사이퍼를 쥐여줬다.

그때, 평소에 까불거리다가 유독 가만히 있던 잭이 갑자기 선언함.

“저 그럼 가변 기능 써서 등반 익숙함으로 할게요”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그 잭이 폭탄을 메고 등반하는 동안, 다른 일행들이 시선을 끌기로 했다. 매 턴 우선행동 판정을 해서, 성공하면 인카운터를 지나치는 방식으로.

그렇게 위험천만한 등반이 시작되었다. 중력을 조종할 줄 알았던 잭은 15m를 공중부양해서, 첫번째 층을 가볍게 밟고 올라섰다.

천천히. 잭은 콩나무를 기어오르듯 한 층 한 층 기어올랐다. 미끄러지기도 하며,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분발해가며.

송신탑은 외부에 계단이 잠깐 드러났다가 안으로 다시 계단이 드러나는 그런 구조였음. 그래서 계단에 다른 잭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단을 뛰어오를 준비를 했다.

첫 번째. 딱정벌레 모양의 숙주체가 등장했다.

“우선행동 판정 굴림 해주세요.”
“저 분발 쓸게요.”

두 번째, 시각 숙주체 셋이 있는 방이었나?

“우선행동 판정 굴림 해주세요.”
“저 분발 쓸게요.”

세 번째. 딱정벌레 두 마리.

“우선행동 판정 굴림 해주세요.”
“저 분발 쓸게요.”
“실패했네요. 회피 판정. 실패했구요, 피해 받아주세요.”
“저, 저기...”
“네?”
“지, 지능에서 깎게 해주면 안될까요?”

곰곰히 생각했다가 나는 받아들였다. 뭐, 사람이 악에 받치면 맹목적으로 변해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될 수도 있지. 그런 느낌으로.

다음 층을 지나 잭은 마침내 9층에 도착했다. 보호막에 감싸인 물레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특이점 폭탄은 20점 피해로 보호막을 씹어버리고도 남지만, 잭은 보호막이 있으면 물레가 파괴되지 않을까봐 보호막부터 제거하려고 했다. 나는 보호막이 전선에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잭은 우선행동 굴림이 실패했고, 멀리 튕겨져나갔다. 그 판정으로 인해 잭은 속력이 0이 되어 중상을 입었다. 최후의 순간.

그가 떨어진 자리는 전선의 바로 옆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잭이 말했다.

“저 뺀치로 전선 자를게요.”

?????????????

그렇다. 그는 공구 세트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뺀치가 있었던 것이다!

뺀치로 전선을 자르는데 판정이 필요한가? 그럴 리가. 전선은 끊어졌고, 보호막도 꺼졌다.

“폭탄을 던지고 뛰어내립니다.”

특이점 폭탄이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점처럼 줄어들었다가 확대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잭은 송신탑이 무너져내리는 풍경을 떨어져내리며 지켜보았다.

잭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최후는 예정되어 있었다.

아니다,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중력을 조종하는 잭이었으니까.

그는 가까스로 추락 직전에 꽃게자리의 중력의 10억분의 1만큼의 중력을 냈고, 판정에 성공해서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을 넘기지 않고 플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션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한 주는 갑자기 친척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 다음주에는 한명이 자다가 깜빡 시간을 넘겨버린 탓에 결국 나는 플을 터뜨리기로 했다. 사실 개강 전에 끝내는게 목표였는데 개강이 코앞이었으니가 압박감도 느껴졌고, 마스터가 부담이 되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그 잭 한 친구와 누메네라 1:1플을 한 이후로 아직까지 플을 못뛰고있다

플뛰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