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을 굴리면 누구나 다 가질 법한 의문이긴 하다. 왜 얘네들은 항상 비극이 없는 라인은 안 내고, 초자연체마다 고뇌와 갈등을 하게 만드는 내/외적 요소를 꼭 넣고, 분위기를 씁쓸하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디앤디, 스타워즈와 섀도우런을 보면 알겠지만 얘네들은 라인에 무슨 분위기를 넣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주류 trpg(주류라는 말이 조금 그렇다면, 비인디) 중에서 특정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건 월드 오브 다크니스 외에는 콜 오브 크툴루 정도밖에 없고, 아예 주제의식을 넣는 애들은 얘네가 유일하다.


인디 룰이면 그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주류 규칙들의 데이터/편집 퀄리티/서플 개수 등을 이길수가 없고, 인디 룰은 항상 독특한 분위기나 주제+그걸 드러내는 메카닉 중심으로 가니까.(그래서 범용적이고도 혁신적인 메카닉을 제시한 아포월이 명작 취급받는 거고)

근데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구판이나 신판이나 양쪽 다 업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거대 라인들이다. 근데도 굉장히 인디스러운 감성이나 마인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실 메인스트림 rpg에서 볼 법한 정교한 메카닉+인디 업체 라인에서 볼 법한 유니크한 설정이 쨍의 세일즈 포인트이기도 하고.


그럼 왜 wod는 댄디의 길을 걷지 않는 걸까? 그냥 라인에 복잡하게 설정 부여할 필요 없이 어반 판타지 배틀물을 만들면 편하지 않나? 구체적인 설정은 서플로 내던가 하고. 마법사와 늑대인간과 악마와 인조인간이 별다른 제약이나 문제 없이 막 싸돌아다니는 게임을 만들면 왜 안될까? 가령 요새 판타지 소설 시장에 흔하디 흔한 레이드물이나, 아니면 그 유명한 페이트, 갤러리에서 '그 단어'가 금지되게 만든 클로저스 같은 경우는 이렇게 인상쓰고 고뇌하는 내용이 아니지 않나?


이건 내가 생각하는 이유고, 실제로 공인된 건 아니다. 내 입장은 쨍이 그렇게 하지 않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월드 오브 다크니스가 월드 오브 다크니스로 남아 있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를 가정하자.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와 거의 동일한 세계에서 활동하는 초자연체의 이야기를 다룬다."


1. 고전 판타지와 어반 판타지는 다르다.

일단 어반 판타지는 그 특성상 항상 현대를 다룰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의 몰입감이 깨지기가 훨씬 쉽다. 전사와 그 동료들이 용을 찾아서 썰어먹고 왕이 되는 이야기는 별로 문제가 없다. 선과 악의 거대한 전쟁에서 활약하는 마법사 이야기도 익숙하다. 하지만 대기업 사장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뱀파이어, 2차 한국전쟁의 영웅이 되는 늑대인간들은 플레이어들의 위화감을 강하게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 옆에 있는 이야기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이 불신의 자발적 유예(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를 하게 하려면 설명해야 할 양이 많아진다. 고전 판타지에서 마법은 마법이고 신은 신이며 여기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딱히 없다. 어반 판타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법사들이 있다면 왜 마법을 쓰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설명해줘야 플레이어들이 납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차피 설정을 다 짜야 하고, 그럴 바에는 잡다하게 섞어서 내지 말고 한 라인씩 내자는 결론이 나온다.


2. 원래 초자연체를 다루는 매체 중에서 가벼운 분위기가 적다.

메인스트림 중에서는 그렇다. 당장 페이트만 해도 그렇잖아? 대부분 내가 왜 이렇게 변했고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서 칙칙한 분위기 내는 작품들이지 와! 법사! 현실조작! PPAP! 하면서 다니지 않는단 말이야. 결론적으로 이는 참고문헌들의 분위기가 곧 음울하고 무겁다는 뜻이고, 이러면 곧 라인 자체의 분위기와 주제와도 직결된다.

사실, 여기까지로는 좀 부족한 게, 이런 암울한 분위기는 대부분 90년대 뱀파이어물의 특징이고, 마법사나 요정 쪽으로 가면 어반 판타지인데도 의외로 밝은 라인도 많음. 하지만 뱀파이어가 이렇게 기준을 잡아놨으니 다른 라인들도 맞춰서 적당히 가오를 잡아줘야 전체 라인의 통일성이 살아서...


3. 주제의식이 실종된 어반 판타지는 히어로물과 구분하기가 힘들다.

라인별로 잡다하게 섞어서 마음대로 노세요! 하면 이제 뮤턴트&마스터마인드랑 차별화하기가 힘들다. 소설 같은 경우에는 왜 늑대인간/마법사/요정/미라들이 히어로 짓을 안 하고 다니나요? 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지만(가능한 대답:이 소설은 히어로물이 아니니까!), TRPG인 쨍은 이제 그거 그냥 히어로물 룰로 돌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에 대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생김. 그래서 나온 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매우 힘들어보이는 약점 떡칠 초자연체들이고.


4. 아마도 제일 현실적인 대답일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했다가 망함.

몬테 쿡이 월드 오브 다크니스로 d20기반 그냥 어반 판타지 냈다가 어떤 호응도 없이 말아먹음. 애초에 이런 분위기 자체가 쨍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상황이라서 다른 걸로 변화시키기가 아주 힘들고.


혹시 쨍 말고 어반 판타지물인데 디앤디처럼 완전 널널한 분위기 있으면 말해주셈. 제일 가까운 건 섀도우런인데 여기도 애초에 다른 세계라는 걸 확실히 하고...